소설리스트

239화 (239/239)

239화. 53 – 2

유제니의 말에 왕이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입 밖으로 내뱉기 전에 왕비가 재빨리 그의 손을 잡았다.

“자네에게 작위를 달라고?”

이게 지금 레이디 비스컨의 요청이 맞나? 확인하는 왕비에게 유제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안다. 지금 그녀가 영지뿐 아니라 작위를 받아 버리면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는 것을. 다들 여자인 그녀가 왜 작위를 받았는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수군거릴 거다.

하지만 그녀는 작위를 받아야 한다. 영지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반드시 작위도 있어야 한다.

“만약 제 딸이 마고의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면 그 애는 자신을 보호할 힘을 가져야 할 테니까요.”

“힘을 가졌는데 자신을 보호할 힘이 왜 또 필요하지?”

국왕의 질문에 유제니는 콧잔등을 찡그리려다 멈췄다. 왕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귀족의 딸로 태어난 여자들이 어떤 기분인지.

그녀는 어떻게 완곡하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이건 완곡하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유제니는 그녀가 보고 겪은 것을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제가 아끼는 동생이 있습니다.”

왕과 왕비는 줄리아를 떠올렸다. 하지만 유제니는 누구라고 말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보호해 줄 가족도, 재산도 없지요. 결국, 그녀의 친척은 그녀를 결혼한 귀족의 정부로 보내려 했습니다.”

로렌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고 도망쳐야 했다.

“그녀의 친구는, 재산이 있지만, 작위를 원하는 아버지의 욕심 때문에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에 결혼을 할 뻔했고요.”

왕과 왕비의 시선이 부딪쳤다. 유제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다. 왕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모든 귀족이 다 그렇지 않나?”

귀족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일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귀족은 아버지끼리의 거래나 친분으로 결혼이 결정된다.

왕비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가 왕과 결혼이 결정된 건 열두 살 때였다. 운이 좋았던 건,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 갈 시간이 주어졌다는 점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차를 마실 수 있었으니까.

“제 어머니 때에는 남편의 얼굴도 모르고 결혼을 했다지요.”

유제니는 왕비에게 말했다. 그때는 그랬다. 하지만 비스컨 백작 부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골랐다.

“제 어머니는 운이 좋았지요. 두 분은 서로가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서로 사랑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안 그랬습니다. 제 어머니가 유독 운이 좋은 편이라는 걸 아실 겁니다.”

왕비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는 비스컨 백작 부인이 운이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비스컨 백작은 너무 소극적이고 무능했으니까. 부인이 가져온 지참금 대부분을 빚을 갚는 데 쓰는 남편은 아무리 빈말이라도 유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말게, 레이디 비스컨.”

왕비의 말에 유제니는 엘리엇을 쳐다봤다. 저런 말은 보통 기분 나쁜 말을 할 때 쓴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자네 어머니의 어머니라면, 미안하지만 좀 더 부유한 남자와 결혼시켰을 거야.”

그러니 비스컨 백작 부인을 운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에 유제니는 미소를 지었다.

미소를 지었어? 생각하지 못한 반응에 왕과 왕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제니가 불쾌해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까지는 예상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웃는다고?

“전하. 그래서 제 부모님은 저를 위해 부유하고 작위가 있는 남자를 준비해 주셨죠.”

두 사람의 시선이 엘리엇을 향했다. 하지만 엘리엇이 아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고 두 사람의 시선이 유제니에게 돌아오자 그녀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불행히도 저는 그와 파혼하는 수밖에 없었고요.”

“오.”

그제야 국왕은 유제니가 말하는 남자가 렌시드 경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 소문이 진짜인지 궁금하던 터다. 렌시드 경에게 남자 애인이 여럿 있다던 소문.

“저는 제가 원할 때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제 딸도 그러기를 바라고요. 그게 유독 운이 좋은 일이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 거라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작위를 받는다고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때에 결혼할 수 있을까? 왕비는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유제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작위와 영지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게 해 주지는 않겠지요.”

작위와 영지는 마법 같은 게 아니다. 작위와 영지를 가진 어린 소년들을 노리는 여자도 있다. 소년이 아니라 소녀가 된다면 오히려 위험해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유제니는 그 위험이라는 건 작위가 없다 해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다. 부유한 집의 아가씨라는 건 언제나 몸값을 노린 유괴를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적어도 기회는 주겠죠.”

유제니는 다른 귀족 아가씨와 다른 교육을 몇 가지 더 받았다. 아버지에게 오라버니와 함께 영지 경영에 대한 수업도 들었고 검술도 배웠다.

렌시드 경과 파혼하는 바람에 더 나이가 든 뒤에 결혼 시장에 다시 나가야 했고 몇 가지 사업도 벌였다.

그게 유제니의 경험을 풍성하게 해 주었다. 그녀가 뭔가를 선택할 때, 그리고 그녀의 딸이 뭔가를 선택할 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할 기회를 줄 것이다.

“흠.”

하지만 여전히 왕은 딸에게 이어지는 작위를 달라는 말이 탐탁지 않았다. 장자에게만 왕위를 물려준 건, 그리고 작위 역시 그러한 건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왕비는 유제니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녀가 왕비가 되기 전에 그녀의 남동생이 받은 교육을 같이 받았다면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레이디 비스컨이 작위를 갖는 게 왕실에도 더 나을 겁니다.”

그때, 엘리엇이 입을 열었다. 왕실에도 더 낫다고? 왕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엘리엇은 유제니를 한 번 쳐다보고 왕과 왕비에게 말했다.

“이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면 번즈 백작 부인보다는 비스컨 후작이 왕실의 부름을 받는 게 더 그럴듯하니까요.”

어이없는 이유지만 그럴듯한 이유기도 했다. 국왕은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고 왕비는 웃음을 터트렸다. 곧이어 정신을 차린 왕이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자네는 자네 부인이 자네보다 높은 작위여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엘리엇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유제니가 나보다 더 지위가 높아도 상관없냐고? 그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이미 공주 아닙니까?”

허. 국왕은 엘리엇의 당연한 말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하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비스컨 백작 부부와 엘리엇은 알고 있다. 유제니가 공주의 사생아라는 것을.

“생각해 보지.”

왕은 그렇게 말하고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뒤를 따르려던 왕비는 멈칫하더니 다시 유제니와 엘리엇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마고의 힘이 딸에게만 발현된다고?”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하려는지 깨달은 유제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네, 전하. 두 분 사이에 공주님이 태어나면 그분도 마고의 힘을 이어받을 수도 있지요.”

“흠.”

복잡한 표정으로 유제니를 쳐다보던 왕비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자신의 딸이 마고의 힘을 이어받는 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다.

“그녀에게 자식은 아들 한 명뿐이라는 이야기는 안 하실 겁니까?”

국왕 부부가 멀어지자 엘리엇은 유제니에게 자신의 팔을 내밀며 물었다. 그의 팔 안쪽에 손을 얹은 유제니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가족들을 발견했다.

비스컨 백작 부부와 올리버는 유제니가 국왕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지 걱정하고 있었다.

“네.”

괜찮다는 신호로 가족들에게 손을 흔든 유제니는 엘리엇을 돌아보았다. 그녀와 엘리엇은 크리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다아리브혼은 가져갈 수 있는 만큼 가져가라고 했고 지식은 무게와 상관이 없으니까.

“그건 내가 알 필요가 없는 이야기니까요. 알 필요 없는 걸 안다는 걸 그녀가 알 필요가 없죠.”

유제니의 말에 엘리엇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금세 미소를 지었다. 왕비가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걸 유제니가 안다는 걸 왕과 왕비가 기분 좋게 받아들일 리가 없다.

“생각해 봤는데요.”

천천히 비스컨 백작 부부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엘리엇이 다시 입을 열었다. 춤을 출 생각인지 사람들은 동그랗게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장 가운데에 국왕 부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제가 당신에게 소원을 빈 것 말입니다.”

“오, 네.”

그거. 아무리 해도 생각나지 않는다. 유제니는 엘리엇을 쳐다봤지만, 엘리엇은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첫 번째 꿈이 아닐까 싶습니다.”

“첫 번째요?”

유제니의 질문에 엘리엇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몇 번의 꿈을 꿨는지는 그녀에게 말할 생각이 없다. 그 많은 꿈을 꾸면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 무슨 짓을 한 건지 유제니가 안다면 좀 무서워할 테니까.

“그때 당신이 제게 소원이 뭐냐고 물었거든요.”

“제가 그때도 마녀였나 보죠?”

농담 섞인 유제니의 질문에 엘리엇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자신의 팔에 얹은 그녀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아니요. 당신은 그냥 유제니였습니다.”

그냥 유제니였다. 레이디 비스컨도 아니고 그냥 유제니. 그가 사랑에 빠진 유제니.

“소원이 뭐였는데요?”

유제니의 손을 다시 자신의 팔에 내려놓고, 엘리엇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는 유제니의 질문에 그가 빈 소원을 떠올렸다.

“당신을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다시 한번 유제니를 만날 수 있기를. 그녀와 헤어진 뒤, 엘리엇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소원을 빌었다.

그래서 그가 꿈을 꾼 게 아닐까. 유제니를 만나기 위해서.

“그건….”

아닐 것 같다. 유제니는 그렇게 말하려다 말았다.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답을 아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유제니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그녀가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가까워진 그녀의 어머니가 유제니의 손을 잡더니 속삭였으니까.

“전하께서 네게 작위를 내릴 생각이라고 하시는데. 아까 네게 이야기하신 게 그거니?”

생각해 보겠다고 하더니 결정한 모양이다. 유제니는 미소를 지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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