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52 – 4
그게 보답이야? 사람들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을 고쳐 줬으니 적어도 금은보화 정도는 줘야 하는 거 아닌가?
“힐데자르는 어떻게 되나요?”
제일 먼저 유제니가 물었다. 그녀가 알을 고친 상으로 발시안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는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힐데자르는?
“레이디 비스컨이 알을 고쳤잖아요! 그러면 내 아들을 돌려줘요!”
공작 부인의 요청에 용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공작 부인을 향해 크게 울부짖었다. 그 소리에 알조차 흔들렸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분노한 용을 보는 건 온몸의 털이 솟는 느낌이다. 엘리엇은 유제니를 자신의 몸 뒤에 가리려 했고 힐데자르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희 인간은 강도와 의사를 같은 존재로 보나?”
공작 부인은 다아리브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용의 말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자기 아들을 강도로 비유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의사에게 보답으로 강도의 집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하지도 않죠.”
엘리엇이 끼어들었다. 그에게 가로막혀 있던 유제니는 그의 말에 깜짝 놀라 엘리엇의 팔을 잡아당겼다. 다아리브혼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향했다.
그리고 유제니는 다아리브혼이 공중을 향해 나직하게 투덜거리는 걸 봤다. 정확하게는 크르륵거리는 거였지만. 그게 투덜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넌 방금 이 여자를 지키겠다고 말했는데.”
잠시 공중을 보고 이상한 소리를 내던 다아리브혼이 엘리엇에게 말했다. 비꼬는 투였지만 엘리엇은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그녀가 원하는 걸 갖게 하는 것도 제 일이거든요.”
용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유제니와 엘리엇은 처음 보는 공간에 와 있었다.
아주 커다란 동굴이었다. 커다랗다는 걸 알 수 있었던 건 벽에 달린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고. 하지만 두 사람의 더욱 놀라게 한 건 동굴의 천장에 닿도록 쌓인 금은보화였다.
어찌나 많던지 금은보화는 거의 산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유제니와 엘리엇은 금은보화에서 고개를 돌려 동굴 안을 확인했다. 설마 여기 갇힌 건가? 두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다시 다아리브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져갈 수 있는 만큼 가져가.”
엘리엇과 유제니의 시선이 금은보화의 산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사람보다 더 큰 조각상을 보고 그게 정말 순금일지 도금일지 궁금해했다.
다행히 그 대답은 조각상의 아랫부분에 찍힌 자국으로 알 수 있었다.
“네 아들을 데리고 가도 좋다.”
한편, 알이 있는 공간에서 남은 공작 부인에게 다아리브혼이 말했다. 눈앞에서 유제니와 엘리엇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당황하던 공작 부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아리브혼은 그녀가 행복을 만끽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여길 침입한 벌은 받아야지.”
“뭐?”
힐데자르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는 지금까지 여기 갇혀 있었다. 저 거지 같은 알이 깨지지 않도록 붙잡고.
“알을 붙잡고 있었잖아! 아니, 있었잖아요?”
그거면 충분한 벌을 받은 거 아니냐는 말에 용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공작 부인을 쳐다봤다.
저 인간 남자는 자신의 잘못을 수습하는 것과 벌을 받는 것의 차이도 모른다. 그는 초조한 표정의 공작 부인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온 용기를 가상하게 여겨 네게도 선택할 기회를 주지.”
여기 남을 사람을 선택하라는 걸까. 공작 부인은 얼마든지 아들 대신 남을 수 있었다. 아들이 공작이 될 수만 있다면.
하지만 다아리브혼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네 가문과 아들. 둘 중 하나는 미래가 없을 거다.”
저주인지 예언일지 모를 말에 공작 부인의 몸이 얼어붙었다. 미래가 없다는 게 무슨 소리지? 정신을 차린 그녀는 용의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미, 미래가 없다는 건 내 아들이 죽을 거라는 말인가요?”
“오, 내가 죽이진 않을 거야. 저 인간 여자가 우리의 미래를 구했으니까.”
우리의 미래. 사람들의 시선이 유제니가 고친 알로 향했다. 용은 알을 미래라고 말했다. 그 말은.
공작 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다아리브혼이 한 말은 명확했다.
거마로트 공작가와 힐데자르, 둘 중 하나는 후계자를 얻지 못할 것이다.
“네가 직접 선택하거라.”
용은 잔인하게 말하고 앞발 위에 머리를 괴었다. 공작 부인은 이제 더 소중한 걸 골라야 한다. 그녀의 아들은 살겠지만, 아들에게서 손자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니면, 아들에게서 손자는 보겠지만, 거마로트 공작가는 아들의 대에서 몰락할 것이다.
하얗게 굳은 공작 부인의 얼굴 위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크리사.”
금은보화가 쌓인 방에서 유제니가 조용히 용의 이름을 불렀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그녀를 한 팔로 끌어안고 있던 엘리엇이 무슨 소린가 하고 유제니를 돌아보았다.
“전 보석은 필요 없어요. 대신 알고 싶은 게 있어요.”
미친 사람처럼 공중을 향해 말하자 놀랍게도 공중에서 불덩어리가 하나 나타났다. 그리고 알과 똑같은 목소리가 말했다.
“미래를 알고 싶은 거라면 잘못 찾아왔어. 우리는 꿈을 꾸지 않으니까.”
엘리엇은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검 손잡이에 손을 대기만 하고 뽑지는 않았다. 유제니가 평온했기 때문이다.
“자식이 다쳤는데 어머니가 오지 않았다는 건 이상한 일이잖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엘리엇의 표정에 유제니가 말했다. 아무리 용은 수컷이 새끼를 기른다고 해도 알에 금이 갔다. 암컷이 신경도 안 쓸 리가 없다.
당연히 어딘가에 암컷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생각은 공중을 보고 투덜거리던 다아리브혼의 행동으로 확실해졌다.
“뭐가 알고 싶은데?”
크리사가 말했다. 유제니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엘리엇이 무슨 소원을 빌었나요?”
“내가 보고 듣지 못한 것을 알 수는 없는 법이지.”
모른다는 말이다. 유제니는 콧잔등을 찡그렸고 다시 좀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가 꿈을 꾼 게 그 소원 때문인가요?”
“꿈?”
크리사의 질문에 유제니는 꿈꾼 자라는 말이 그녀와 엘리엇만 쓰는 단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꿈꾼 자를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유제니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여기 있는 엘리엇이, 그리고 몇몇 사람이 이상한 꿈을 꿨거든요. 발시안이 몰락하는 꿈이었대요. 거기서 저는 발시안을 다스리는 마녀였고요.”
크리사가 엘리엇을 쳐다봤다. 놀랍게도 유제니는 크리사가 히쭉 웃는다고 느꼈다. 이목구비가 없는 불덩어리인데도.
“그런 꿈을 꾼 게, 제가 엘리엇의 소원을 들어줬기 때문일까요?”
크리사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두 인간 사이에 아주 강렬한 게 있었다. 가끔 핏줄이 아닌 운명으로 이어진 인간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앞에 있는 두 인간 사이에 있는 강렬한 건 운명 같은 게 아니었다. 아주 끈질기면서 강렬한 힘은 인간의 힘이었다. 물론 인간의 힘은 아무리 끈질기고 강렬해 봤자 인간의 힘일 뿐이다.
고작 인간이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시간을 되돌린 건, 마고의 힘이다. 정확하게는 지금 눈앞에 있는 유제니의 힘이겠지.
“그래. 네가 소원을 빌었고. 마고의 후예, 네가 들어줬군.”
크리사는 다아리브혼과 똑같이 말했다. 그 대답에 유제니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녀의 짓이라는 말이다.
“제가 사람들에게 미래를 보게 했다는 말이군요.”
유제니의 말에 크리사는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유제니의 시선에 맞춰 멈추고 말했다.
“뭔가 잘못 알고 있구나.”
이 아이는 완전히 잘못 알고 있다. 그건 꿈이 아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엘리엇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유제니가 시간을 돌렸다. 크리사는 엘리엇의 소원이 시간을 돌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마고의 힘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문득 크리사는 유제니가 어떤 사정이 있어서 자기 부모에게서 자라지 못했다고 말한 것을 떠올렸다. 불쌍한 것.
유제니를 향한 동정심이 아주 약간이지만 크리사 안에 생겨났다. 이 어린 인간 여자는 자기 힘이 어떤 건지 전혀 모르고 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거다.
“마고의 힘은 염원이 강할수록 강해지지.”
소원을 빈 자의 염원이 강할수록 마고의 힘도 강해진다. 그녀가 마녀나 요정으로 불린 이유다. 그리고 그녀의 힘이 아주 무서운 이유기도 하고.
모든 마법은 대가가 필요하다. 그 대가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마법사들이 계산을 하고 주문이니 보조석이니 하는 걸 사용하는 거다.
하지만 마고는 그런 게 필요 없었다. 그녀는 상대방이 강렬하게 뭔가를 원하면, 그리고 그녀도 상대방에게 동조하면 그냥 이뤄졌다. 어떤 계산이나 주문도, 대가도 필요 없이.
꿈을 꾼 자들은 유제니가 그렇게 만든 게 아니다. 그들이 그걸 원한 거다. 아주 강렬하게 다른 인생을 살고 싶어 했다는 말이다.
“그거, 너무 위험한 거 아닌가요?”
너무 위험한 힘이다. 유제니는 입을 딱 벌리고 크리사의 설명을 듣다가 물었다. 어떤 대가도 없는 즉각적인 마법의 힘이라니.
마법사를 제압할 방법은 마법사가 주문이나 계산을 마치기 전에 물리적으로 공격하는 거다. 그걸 막기 위해 마법사들이 마력석을 이용하는 거고.
그런데 크리사는 지금 유제니에게 그녀가 원한다면 아무도 그녀를 막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유제니의 질문에 크리사는 히쭉 웃었다. 멍청한 인간들.
그녀는 유제니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인간이라면, 인간의 왕이라면 마고의 혈통을 아주 소중하게 보존할 것이다.
하지만 크리사가 모르는 게 하나 있다. 발시안의 왕은 마고의 혈통을 아주 소중하게 보존했다. 마고의 아들이 왕이 됐으니까. 그리고 그 아들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인간은 기억력이 나쁘잖아.”
고작 몇 년만으로도 잊어버리곤 한다. 자신들이 저지른 짓을. 때때로는 은혜조차도.
“그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가만히 크리사와 유제니의 대화를 듣던 엘리엇이 끼어들었다. 아무도 유제니의 진짜 능력을 모르는 게 낫다. 유제니를 위해서.
“또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잠시 생각하던 유제니는 다시 크리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또? 귀찮다는 듯한 태도가 불덩어리임에도 나타났다. 유제니는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 다아리브혼이 그랬잖아요. 가져갈 수 있는 만큼 가져가라고.”
무엇을 가져가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게가 나가는 보석과 달리 지식은 얼마든지 가져갈 수 있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
젠장. 크리사는 공중을 향해 욕을 내뱉었다. 그게 다아리브혼이 공중에 대고 크르릉대던 모습과 똑같아서 유제니와 엘리엇은 서로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