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6화 (236/239)

236화. 52 – 3

유제니의 눈앞에 거대한 용의 눈이 나타났다. 커다란 몸에도 용은 움직임은 빨랐다.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에게 고개를 들이민 용이 나직하게 그르릉대는 소리를 들었다.

놀랍게도 유제니는 다아리브혼이 그녀에게 참아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아마도 그녀가 마고의 후손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그런 짓을 하면 당신을 잡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올 거예요.”

용 사냥꾼은 아직도 존재한다. 하지만 극소수고 그들이 실제로 용을 사냥한 적은 없다. 용 연구자들과 함께 용이 떠나 버린 둥지를 찾고 조사할 뿐이다.

하지만 다아리브혼이 발시안을 공격하면 발시안은 당장 그를 퇴치하기 위해 사람을 보낼 거다. 아니, 그를 퇴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막기 위해 군대를 보낼 거다.

그 과정에서 발시안 외의 다른 나라가 참가할 수도 있고.

“내가 인간 따위를 겁낼 것 같나?”

나직하게 그르릉대듯 용이 물었다. 그럴 것이다. 발시안을 세운 영웅조차 용을 물리치지 못했다. 마고가 간신히 크리사를 설득해 거처를 옮기도록 했을 뿐이다.

유제니는 천천히 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힐데자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한가운데가 방사형으로 금이 간 게 보인다.

“당신을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세계 최강의 생명체를 걱정해 줄 정도로 유제니는 오만하지 않다. 그녀는 손을 뻗어 방사형으로 금이 간 알을 만졌다.

“수많은 인간이 몰려들면, 당신이 아무리 지키려 해도 이 애가 다칠 수 있어요.”

부모가 아무리 해도 모든 위험에서 자식을 구할 수는 없다. 하물며 그 자식이 움직일 수 없는 알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날 협박하는 건가?”

다아리브혼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만약 그의 자식의 안전을 두고 협박하는 거라면 잘못 선택했다. 이곳에서 어느 누구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럴 리가요.”

유제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어떻게 용을 협박하겠는가. 그녀가 가진 어떤 것도 다아리브혼을 상대로 무기가 될 수 없는데.

“그녀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재빨리 다가온 엘리엇이 유제니의 편을 들어 주었다. 덕분에 다아리브혼의 분노가 약간이나마 가라앉았다.

“전 이 애가 걱정되는 거예요.”

이 모든 일이 결국 힐데자르와 거대한 알 사이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벌어졌다. 이 알은 자신을 보호할 수도 없었다. 알이었으니까.

어쩌면 그게 세계 최강의 생명체에게 세상이 주는 불이익일지도 모른다. 다른 동물처럼 용도 태어나자마자 걷고 뛸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좀 더 위험해졌을 테니까.

그때, 유제니가 만진 부위가 약하게 움직였다. 방사형으로 금이 간 탓에 움직임은 유제니에게 아주 생생하게 느껴졌다.

“오.”

깜짝 놀란 유제니가 손을 떼자 움직임도 멈췄다. 하지만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의 눈에 금이 간 부위가 볼록 올라와 있는 게 보였다.

“워, 원래….”

원래 이렇게 알 위로 움직이는 게 느껴지냐고 묻고 싶었지만 놀란 나머지 유제니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다아리브혼은 볼록 올라온 부위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원래 이렇게 움직이냐고? 그래.”

원래 이렇다. 하지만 힐데자르가 알을 공격한 이후로 움직임이 딱 멈췄다.

“슬슬 걱정하던 차야.”

다치거나 겁에 질린 게 아닐까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움직임이 없어서 걱정하고 있었다. 다행인 건 아직 알이 따듯했다는 거다.

“다행이네요.”

유제니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금이 간 부위에 손을 얹었다. 이렇게 되어 유감이다. 진심으로 그녀는 알 속에 있는 새끼에게 미안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을 겪어서 유감이야. 도와줄 수 있다면 좋겠는데.

유제니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녀의 손이 닿은 부분에서 빛인 나기 시작했다.

“유제니!”

깜짝 놀란 엘리엇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덕분에 유제니의 손이 알에서 떨어졌다.

유제니는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아무 변화도 없다. 방금 전까지 느껴지던 따듯한 느낌도 사라졌다.

그리고 알을 쳐다보자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방사형의 금의 일부가 뭔가로 메꾼 것처럼 변해 있었다.

“세상에.”

유제니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건 거마로트 공작 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뒤를 이어 다아리브혼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와 달리 기쁜 듯한 기색에 유제니는 저도 모르게 용을 쳐다봤다.

“내, 내가 한 거예요?”

차갑게 느껴지던 다아리브혼의 눈동자가 따듯한 기운을 품었다. 그는 엘리엇을 한 번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저 녀석의 소원을 네가 들어줬다고.”

엘리엇이 소원을 빈 것처럼 알 안의 새끼도 소원을 빌었다. 껍질이 고쳐지기를. 그리고 유제니가 도와주고 싶어 했기 때문에 그녀의 힘이 나온 거다.

마고의 힘은 그런 식으로 움직인다. 간절한 바람을 가진 사람과 그 사람에게 공감하는 마고의 힘이 합쳐진다.

“무슨 소원이었는데요?”

모른다니까. 용은 마치 인간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자연스럽게 유제니의 시선이 엘리엇을 향했다.

하지만 엘리엇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었다. 자신이 무슨 소원을 빈 건지 떠올리기 위해.

“계속해.”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놀란 유제니와 엘리엇은 주변을 돌아보며 여기에 용과 네 명의 인간 외에 또 다른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계속하라고.”

여자의 목소리였다. 유제니는 다아리브혼이 곤란해하는 것을 깨닫고 그를 쳐다봤다.

“어딜 봐? 나야. 네 눈앞에 있잖아.”

다시 여자가 말했다. 눈앞에 있다는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알로 향했다. 설마 알 속에 있는 새끼가 말을 거는 건가?

유제니는 다시 다아리브혼을 쳐다봤다. 그러자 알이 말했다.

“그래. 나라고. 그러니까 계속해.”

여전히 다아리브혼은 곤란한 것 같으면서도 웃음을 참는 듯한 느낌이었다. 유제니는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그때 엘리엇이 물었다.

“괜찮은 겁니까?”

“오, 그 여자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걱정 마.”

알을 고쳐 주는 게 유제니에게 안전한 건지 걱정하는 엘리엇에게 알이 말했다. 유제니는 콧잔등을 찡그린 뒤 다시 손을 알의 표면에 난 방사형의 금에 얹었다.

다시 그녀의 손에서 빛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지나간 자리의 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알이 완전히 매끈하게 변했을 때, 유제니의 몸이 휘청했다.

“유제니.”

엘리엇이 재빨리 그녀를 안았다. 그제야 유제니는 자신의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알을 만진 그녀의 손은 여전히 열을 품은 것처럼 따듯했다.

“괜찮습니까?”

엘리엇의 질문에 유제니는 그를 올려다 봤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는데 기분은 오히려 좋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따듯한 손을 뻗어 엘리엇의 뺨을 감쌌다.

“마고는 이타적인 인간이었지.”

다아리브혼은 앞발로 알을 살짝 건들며 말했다. 그가 만져 봐도 금이 간 부분은 매끈해졌다. 그 안에서 다시 움직임이 느껴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마녀라고 불렀고.”

알이 이어받듯 말했다. 그녀의 말에 유제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엘리엇의 부축을 받아 자세를 바로 하며 물었다.

“요정이 아니라요?”

신비한 힘을 가진 요정이라고 들었다. 기적을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을 도왔다고.

하지만 여자의 비웃는 소리가 이어졌다.

다아리브혼 역시 사람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다들 마고가 요정이었다고 믿고 있는 눈치였다.

맙소사. 그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웃음을 터트렸다. 인간이란 얼마나 간사한가. 마고는 마녀라 불렸고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다. 비가 오지 않으면 그녀 때문이라고 했고 여우가 닭을 물어 가면 그녀가 사주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 아이가 병에 걸리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찾아왔다지.”

낮에는 누구보다 크게 그녀를 마녀라고 비난한 자가 밤이면 자기 자식을 살려 달라고 찾아왔다. 그런 간사한 인간들 사이에서 마고 같은 인간이 나온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아이를 고쳐 줬나요?”

“그래.”

유제니의 질문에 용이 대답했다. 아이는 죄가 없다고 했다. 괴로워하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아이는 죄가 없다고.

그런 그녀가 나라를 세우자 요정이라고 불린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다아리브혼과 크리사는 인간이 얼마나 간사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마고를 마녀라 불렀던 기록은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녀의 뺨을 때리고 더러운 마녀라 불렀던 인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마고가 얼마나 신비로운지 떠돌고 다녔다.

“조심하게, 마고의 후예.”

다아리브혼은 앞발을 내밀어 유제니의 몸을 툭 쳤다.

“인간들은 자네를 이용하면서 뒤로는 비난할 거야.”

다아리브혼은 마치 인간처럼 고개를 기울이며 덧붙였다.

“어쩌면 비난하면서 이용할지도 모르고.”

“제가 지킬 겁니다.”

엘리엇이 끼어들었다. 그러자 다시 알이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반응에 다아리브혼과 유제니의 시선이 부딪쳤다. 용은 크르륵 하고 마음에 안 든다는 반응을 보이더니 유제니에게 말했다.

“넌 저 녀석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게 좋았어.”

그렇게 말해도 유제니는 소원을 들어준 기억이 없다. 그녀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콧잔등을 찡그렸다. 대체 무슨 소원이었던 걸까.

천천히 다아리브혼의 몸이 움직였다. 그는 유제니에게서 살짝 물러나며 말했다.

“보답을 해야겠군.”

힐데자르와 공작 부인의 얼굴에 희망이 피어올랐다. 두 사람은 유제니가 힐데자르를 풀어 달라고 요청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다아리브혼이 말하기 전에 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발시안을 공격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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