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5화 (235/239)

235화. 52 – 2

힐데자르라고? 유제니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남자가 고개를 돌리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얼굴이 보여도 그녀는 남자가 힐데자르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힐데자르는 마지막으로 유제니가 봤을 때보다 훨씬 초췌했고 덥수룩해져 있었다. 확 늙어 버린 듯한 모습에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세상에, 힐데자르! 힐데자르!”

공작 부인은 아들의 등을 끌어안고 울었다. 세상에. 그녀의 아들이었다. 몇 달 동안 그토록 찾고 보고 싶던.

“어, 어머니?”

쉬고 기운 없는 목소리가 힐데자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머니가 여기는 어떻게? 하지만 그는 금세 희망을 품고 공작 부인을 향해 돌아섰다.

어머니가 왔다. 그를 구해 줄 것이다.

“어머니.”

몇 달 만에 만나는 모자의 상봉에 유제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 부인에 대한 감정과 별개로 그녀가 아들을 얼마나 찾으려 했는지 안다. 공작 부인이 힐데자르를 찾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가자.”

공작 부인은 힐데자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 역시 어머니의 손을 잡고 그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힐데자르가 걸음을 떼는 순간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감히!”

다아리브혼의 분노에 유제니는 깜짝 놀라 엘리엇을 끌어안았다. 분노한 용이 일으킨 바람은 그녀의 몸이 날아갈 정도로 강했다.

그건 힐데자르와 공작 부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겁에 질린 힐데자르는 공작 부인의 손을 놓고 몸을 웅크렸다. 순식간에 공작 부인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렸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힐데자르는 비명처럼 사과했다. 그리고 바람이 멈추자 재빨리 알을 끌어안았다.

바람에 밀려 넘어진 공작 부인은 고개를 들었다가 그 모습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돈이라면 원하는 대로 줄 수 있어요!”

공작 부인이 소리쳤다. 깜짝 놀란 유제니가 막으려 했지만, 엘리엇이 그녀의 손을 잡아 막았다.

저러면 안 될 텐데? 유제니의 시선이 엘리엇을 향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슬쩍 뒤로 물러났다.

“돈?”

다아리브혼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뭐든 돈이면 된다. 공작 부인은 용을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얼마든지 줄 수 있어요. 원하는 만큼.”

“멍청한 인간.”

다시 어디선가 폭풍이 몰려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해하지 못하는 공작 부인에게 다아리브혼이 물었다.

“인간의 돈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지?”

“보, 보석을 줄 수 있어요. 원하는 만큼 가져오라고 할게요.”

용은 보석을 좋아한다. 그런 말이 있다. 금은보화를 좋아해서 둥지에 쌓아 둔다고.

힐데자르를 여기서 데리고 나갈 수 있다면 공작 부인은 거마로트 공작가에 쌓여 있는 금은보화를 모두 줄 수 있었다. 당장 사람을 시켜 옮기라고 하면 된다. 아들을 데려갈 수만 있다면.

“너희 인간은 놀라울 만큼 멍청하군.”

다아리브혼의 시선이 유제니와 엘리엇을 향했다. 가끔 저렇게 말이 통하는 인간이 나오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은 멍청하다.

그는 앞발을 들어 힐데자르의 머리에 얹었다. 그것만으로 힐데자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윽.”

“네 아들의 몸값이 어느 정도지?”

용이 아들을 공격한다 여긴 공작 부인은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 하지만 아들은 죽지 않았다. 아직.

그녀는 빠르게 달려가서 아들의 머리에 얹어진 용의 발을 들어 올리려 애썼다.

“가진 모든 보석을 드릴게요!”

거마로트 공작가에 쌓인 금은보화를 전부 주면 힐데자르의 몸값으로 충분할 거다. 하지만 다아리브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힐데자르의 머리에 얹은 앞발에 약간 힘을 뺐다. 그것만으로 공작 부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제 힐데자르는 신음조차 내뱉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만큼의 보석을 주면 이 녀석을 네 손으로 죽일 텐가?”

다아리브혼의 질문에 공작 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게 문제다. 유제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힐데자르가 단순히 남의 집에 침입한 문제가 아니다.

거마로트 공작 부인이 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왔다면, 다아리브혼 역시 자기 자식의 목숨을 위협한 자를 잡아 둔 거다.

목숨값은 목숨값으로밖에 갚을 수가 없다.

“그, 그럼….”

용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공작 부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용의 앞발을 들어 아들을 도우려 애쓰며 말했다.

“힐데자르 대신 알을 잡고 있을 자를 보낼게요! 그러면 되잖아요?”

힐데자르와 공작 부인을 내리누르던 힘이 조금 약해졌다. 용의 마음이 바뀐 걸까. 공작 부인이 희망을 갖는 순간, 다아리브혼이 말했다.

“네 아들을 구하기 위해 남의 목숨을 걸겠다는 말이군.”

공작 부인이 누구를 보내던지 그는 죽을 각오를 하고 와야 한다. 힐데자르를 살리기 위해 다른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공작 부인은 아직 할 말이 있었다. 그녀는 다아리브혼의 앞발을 들던 것을 멈추고 앞으로 나와 말했다.

“내 아들을 대신해서 나설 자들은 많아요. 원하는 만큼 보낼게요.”

“네 아들의 목숨이 다른 사람들의 목숨보다 값지다?”

“이 애는 거마로트 공작가의 후계자예요.”

당연하다. 공작가의 후계자보다 귀한 목숨이 몇이나 될까. 공작 부인은 왕족을 제외하면 없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에 다아리브혼은 히쭉 웃으며 물었다.

“네 아들의 목숨이 내 자식의 목숨과 같다고 생각하나? 감히?”

용과 사람들이 있는 공간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힐데자르가 공작가의 후계자라 다른 사람보다 더 귀한 목숨이라면, 용 역시 마찬가지다. 유제니는 재빨리 엘리엇에게 속삭였다.

“어떻게 설득했어요?”

어떻게 다아리브혼이 발시안을 습격하지 않고 힐데자르와 그 동료들이 알을 지키는 걸로 설득했냐는 질문이다. 다아리브혼 입장에선 인간 몇십 명의 목숨보다 자기 자식의 목숨이 더 귀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거마로트 공작 부인처럼.

“마고가 크리사를 설득한 것과 같은 방법이죠.”

마고가 크리사를 설득했다고? 쫓아 보낸 게 아니라? 어리둥절한 유제니의 표정에 엘리엇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모든 목숨은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고 설득했습니다.”

“그게 통했어요?”

방금 다아리브혼과 공작 부인의 대화를 보면 절대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믿을 수 없어 하는 유제니에게 엘리엇이 말했다.

“마고는 통한 모양입니다. 용이 물러갔으니까요.”

물러갔다. 유제니는 엘리엇이 사용한 단어를 가만히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마고가 사악한 드래곤을 물리쳤다고 듣고 배우며 자랐다. 하지만 죽은 건 용이 아니라 발시안이다. 용은 대륙의 끝으로 거처를 옮겼을 뿐이다.

어쩌면 크리사 입장에선 그녀가 인간을 물리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폐허가 된 거처를 옮긴 거고.

그렇게 생각하면, 마고는 크리사를 물리친 게 아니다. 그녀를 설득해 대륙 끝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한 걸 수도 있다.

어쩌면, 어쩌면 마고와 드래곤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아리브혼도 유제니를 보자마자 마고의 후손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그녀를 보자마자 쫓아내거나 죽이려 했겠지.

“그, 그렇다면, 그렇다면 내가 할게요.”

한참 다아리브혼과 대치하던 거마로트 공작 부인이 말했다. 그녀는 곧바로 아들에게 다가가 나란히 서서 말을 이었다.

“내가 알을 잡고 있을게요. 그러면 되죠?”

“자식의 잘못을 대신 지겠다?”

바로 그 말이다. 공작 부인과 힐데자르의 얼굴에 희망이 피어올랐다. 힐데자르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공작 부인은 아들을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용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콧방귀를 내뿜으며 물었다.

“그게 네 아들과 네 나라에 무슨 경고가 되지?”

인간이 감히 용의 둥지를 침입했고 알에 손을 댔다. 이 일로 제대로 된 본보기를 보여 주지 않으면 같은 일은 또 일어날 것이다.

다아리브혼은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못하게 되길 바랐다. 적어도 발시안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는 동안은.

“나는 거마로트 공작가의 공작 부인, 이자벨라 거마로트 공작 부인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한….”

“충분?”

용은 자신의 가치를 설명하려는 공작 부인의 말을 가로막으며 비웃었다. 공작 부인이 대신 잡혀 있으니까 충분한 경고가 된다?

그는 간절한 힐데자르를 힐끔 쳐다보고 물었다.

“과연 네 아들과 남편이 널 구하러 올까?”

구하러 올 거다. 힐데자르라면. 공작 부인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건 자존심이 상해서 일부러 가슴을 내밀고 말했다.

“내 아들은 공작가를 이어야 해요. 날 구하러 올 필요 없어요.”

“어, 어머니….”

힐데자르의 신음에 공작 부인은 아들을 돌아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힐데자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 아들이 공작가를 무사히 이을 수만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다.

“하나만 묻지.”

두 모자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던 다아리브혼이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이 힐데자르를 향하자 힐데자르가 재빨리 다시 알을 끌어안았다.

“만약 짐승이 네 아들을 물어서 크게 다치게 했다면, 그 짐승을 어떻게 할 건가.”

그 짐승의 씨를 말리려 할 거다. 공작 부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아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마당에 그깟 거짓말이 대수란 말인가.

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

“자유롭게 풀어 줄 거예요.”

다아리브혼의 이가 드러났다. 화났다. 그렇게 생각한 공작 부인은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금세 용이 웃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다아리브혼은 웃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역시 인간은 간사해!”

아주 가끔 그렇지 않은 몇몇 인간이 나오긴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은 모두 간사했다. 그가 만난 인간은 다 그랬다. 단 한 명만 빼고.

“당장 발시안을 불태워 주지.”

분노한 용의 고함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겁에 질린 공작 부인과 힐데자르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앞으로 유제니가 달려 나왔다.

“잠깐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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