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4화 (229/239)

234화. 52 – 1

창백한 유제니의 얼굴에 거마로트 공작 부인은 흠칫 놀랐다.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에 두 개의 눈이 달린 거대한 머리가 보였다.

그제야 공작 부인은 폭풍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드래곤이 숨을 내쉬는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두 개의 콧구멍에서 바람이 들어갔다 나오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뭔가 그르릉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드래곤의 눈동자 두 개만이 빛처럼 보였다.

이 생명체를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공작 부인은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여기가 그녀가 데려올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데려온다 해도 드래곤을 죽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다시 볼 일 없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네만.”

약간 낮은, 그러니 확실하게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어 발시안의 언어였다. 공작 부인은 드래곤의 머리가 방금 전보다 훨씬 가까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저는 그렇습니다.”

공작 부인의 뒤에서 엘리엇이 말했다. 그는 놀라서 일어난 유제니를 한 팔로 끌어안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검을 뽑을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그럼 뭔가.”

다아리브혼은 마치 인간이 두 팔에 머리를 괴듯 앞 다리를 이용해 몸을 눕혔다. 그럼에도 눈높이는 여전히 다아리브혼이 더 높았다.

유제니는 거대한 드래곤의 머리에 시선을 빼앗겨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다아리브혼과 시선이 부딪치자 깜짝 놀라서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왜 사과하는 거지?”

“음, 상대방을 빤히 쳐다보는 건 예의에 어긋나니까요.”

퍽 재미있는 인간이다. 다아리브혼은 유제니에게 고개를 돌렸다. 드래곤을 빤히 쳐다보는 게 예의에서 어긋난다고 사과하는 인간은 처음이다.

그는 유제니에게 물었다.

“인간의 예의와 우리의 예의가 같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긴 하다. 문화가 다르면 예의범절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하물며 종이 다르면 더 그렇겠지.

하지만 유제니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면 불편하거든요. 당신도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상대와 자신이 같은 감정을 느낄 거라고 생각하는군.”

다들 그렇지 않나? 어리둥절해하던 유제니는 다아리브혼이 웃는 것처럼 느끼고 놀랐다. 웃는다고? 다른 종이라 해도 감정은 느낄 것이다. 하지만 머리의 생김새가 달라 어떤 감정인지 알기가 어렵다.

그런데 유제니는 다아리브혼이 꽤 재미있어한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너는 마고의 후손이군.”

다음 순간, 다아리브혼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유제니는 물론 거마로트 공작 부인도 놀라 얼어붙었다. 엘리엇만 빼고.

유제니는 엘리엇의 몸이 굳지 않은 것을 느끼고 그를 쳐다봤다. 엘리엇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그렇게 닮았나요?”

유제니의 질문에 다아리브혼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꼭 인간 같은 행동이다. 그녀가 신기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가 말했다.

“닮은지는 모르겠는데. 인간은 다 똑같이 생겨서.”

용의 눈에 인간은 다 똑같이 생겼다. 그래서 처음 본 인간을 생김새로 구분하는 건 어렵다. 대신 모든 생명체는 내뿜는 기운이라는 게 있다.

“비슷한 느낌이거든.”

그럼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에 다아리브혼은 마고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인간의 수명은 짧고 많이 낳는다. 몇만 년이 흘러도 수가 그대로인 드래곤과 달리 인간은 몇백 년 만에도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그 많은 인간을 구분할 수 있는 건 같은 피가 흐르면 내뿜는 기운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피를 이어받았다면 가지는 능력도 비슷하게 이어받는다. 세대를 지날수록 옅어지긴 하지만.

“마고와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군.”

다아리브혼의 말에 유제니의 입이 딱 벌어졌다. 왕실에서 국왕 부부와 왕대비에게 그런 말을 들었지만 반신반의하고 있던 터다.

“비슷한 힘을 가졌어요? 내가?”

용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는 것처럼 거세게 바람을 내뱉더니 말했다.

“몰랐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모, 몰랐어요.”

말도 안 된다. 다아리브혼은 가만히 유제니를 응시했다. 거대한 용의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게 불편했을 텐데 유제니는 그대로 서서 용의 시선을 받아 냈다.

“이 정도 힘을 가졌다면 모를 수가 없는데.”

“마고의 후손으로 자란 게 아닙니다.”

용의 말에 엘리엇이 나섰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다아리브혼이 엘리엇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유제니를 한 번 돌아보고 다시 말했다.

“다른 집에서 자랐거든요. 이런저런 이유가 있어서.”

인간의 복잡한 사정을 용이 알 필요가 없다. 말한다 해도 이해할지도 알 수 없고.

다아리브혼은 엘리엇의 설명에 탄식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유제니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자랐겠군.”

“전 저 자신을 알아요. 제 부모님은 절 잘 길러 주셨으니까요.”

유제니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그녀는 레이디 비스컨으로 살았다. 레이디 비스컨이건 고귀한 레이디 사운더키즈건 다르지 않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안다.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도 안다.

하지만 다아리브혼이 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는 당돌한 유제니의 말에 히쭉 웃었다. 마고와 비슷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데 하는 짓도 마고와 비슷하다.

마고는 참 당돌한 인간이었다. 서슬 퍼런 크리사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 크리사가 자신의 잘못을 일부 인정하고 거처를 옮길 정도로.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몰랐지.”

다아리브혼의 말에 유제니의 입이 닫혔다. 그녀가 만약 요정 마고의 후손이라는 걸 알았으면 뭐가 달라졌을까?

잘 모르겠다. 왕대비는 그녀가 아서의 마법을 막았다고 하지만 유제니는 아직도 그게 정말 자신이 한 건지 의문스러웠다.

“의심하고 있군.”

용이 그렇게 말하며 유제니를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뜨거운 김이 느껴진다. 머리가 크니까 콧구멍도 큰 모양이다.

유제니는 다아리브혼의 눈동자를 보기 위해 몸을 틀었다. 이 위치에서는 코밖에 안 보인다.

“마법은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어야 하지.”

모든 게 그렇긴 하지만 마법은 더더욱 그렇다. 마법을 사용하는 데 의심이 없어야 한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지면 성공률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특히나 마고의 후손이라면 더 그렇다. 그녀의 마법은 다른 마법사들처럼 지식과 경험에서 나오는 게 아니니까.

“그럼 앞으로 제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인가요?”

유제니의 질문에 다아리브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거세게 콧바람을 불며 말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지? 쓰는 건 넌데.”

“오, 전 써 본 적이 없거든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용은 엘리엇을 쳐다봤다. 그러자 엘리엇이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마법을 쓴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 그렇군.”

없다고 생각한다고? 유제니는 다아리브혼과 엘리엇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두 존재를 번갈아 쳐다봤다.

엘리엇이라는 인간 남자에게 해 준 말을 유제니라는 인간 여자에게도 해 줘야 할 모양이다. 용은 고개를 들고 앞발을 내밀었다.

거대한 발톱이 엘리엇을 향했다. 유제니가 흠칫 놀라는 것과 동시에 다아리브혼이 말했다.

“네가 소원을 빌었고.”

엘리엇의 앞에서 멈춘 다아리브혼의 앞발은 이번에는 유제니를 향했다. 그는 유제니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네가 들어줬군.”

“그녀가 맞습니까?”

엘리엇의 질문에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는 유제니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엘리엇은 어깨를 으쓱하며 설명했다.

“전에 왔을 때 제가 꿈을 꾼 이유를 물었거든요.”

“그게 나 때문이라고요?”

충격적인 사실에 유제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 때문이 아니다.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다아리브혼이 말했다.

“아니, 엘리엇 때문이지. 그가 소원을 빌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유제니에게는 여전히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녀가 소원을 들어준 거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궁금한 건.

“엘리엇이 무슨 소원을 빌었는데요?”

유제니의 질문에 다시 다아리브혼의 머리가 그의 앞발 두 개 위에 올라갔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희 인간은 왜 너희가 한 일을 남에게 묻는 거지?”

소원을 빈 건 엘리엇이고 들어준 건 유제니다. 두 사람이 무슨 소원을 빌고 들어줬는지 용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

유제니는 다아리브혼의 타박에 엘리엇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 역시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콧잔등을 찡그렸다.

“엘리엇의 소원을 들어준 기억이 없거든요.”

생각해 보면 그녀는 항상 엘리엇이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았다. 결혼도 거부했고 약혼조차 하지 않고 있다. 물론 엘리엇이 그걸 요청한 건 아니지만.

“마법이 그렇게 움직였어.”

다아리브혼은 귀찮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덕분에 유제니는 엘리엇을 꽉 끌어안아야 했다. 안 그러면 그녀의 몸은 뒤로 밀렸을 테니까.

“제가 가진 마법이 그 정도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네요.”

유제니의 한탄에 용이 빙그레 웃었다. 그는 뭔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그녀와 엘리엇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릴 때는 다들 스스로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지.”

그게 무슨 말일까. 어릴 때 천재였지만 성인이 되면서 범재가 되는 걸 말하는 걸까. 유제니는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질문하기 전에 두 사람이 잊고 있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

“내 아들은, 내 아들은 어디 있지?”

겁에 질려 있던 거마로트 공작 부인은 다아리브혼이 유제니와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는 걸 보고 용기를 얻었다. 어쩌면 용이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더 대화가 통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용을 설득하거나 거래를 통해 그녀의 아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들?”

다아리브혼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유제니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공작 부인이 다시 말했다.

“그래! 네가 잡아 가둔 내 아들 말야! 원하는 건 뭐든 주지! 내 아들을 돌려줘!”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 다아리브혼의 분위기가 변했다. 유제니는 용이 화가 나서 공작 부인을 공격할까 봐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다아리브혼은 그저 몸을 일으켰을 뿐이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주변의 공기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엘리엇은 여차하면 유제니를 보호할 수 있도록 그녀의 몸을 자신의 팔로 감쌌다.

“이놈 말하는 건가?”

용이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세 사람의 앞에 거대한 알과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알을 끌어안고 있었다. 거대한 알을 끌어안느라 남자의 뒤통수와 등만 보인다.

하지만 공작 부인은 바로 알아봤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아들에게 달려가며 소리쳤다.

“힐데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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