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51 – 2
그때는 그냥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비스컨 백작의 딸이라면 레이디 비스컨이 된다. 당연히 귀족과 결혼할 것이다.
하지만 제네비브는 확실하게 했다. 외국의 귀족이 아니라 자국의 귀족과 결혼시켜 달라고.
“그게 요정의 피와 무슨 상관이죠?”
말도 안 된다는 유제니의 말에 왕대비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그자가 널 공격하려 했을 때, 마법이 통하지 않았어. 그렇지?”
그제야 유제니는 아서가 그녀에게 마법을 쓰려 했을 때를 떠올렸다. 아서의 반지에 달린 마력석이 ‘반짝’ 하고 빛이 났다. 그리고 유제니는 반사적으로 거부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그냥 불량일 수도 있잖아요.”
마력석도 불량이라는 게 있을 수 있나? 유제니가 그런 의문을 떠올렸을 때, 왕비가 말했다.
“아서 브라이트의 마력석을 말하는 거라면, 전부 멀쩡하다고 하더군.”
그를 잡았을 때 압수한 것들은 전부 마법사가 확인했다. 한두 개를 제외하면 가지고 있는 모든 마력석은 마법을 품고 있었다.
유제니와 왕대비의 생각대로, 그는 그날 비스컨 저택에 올 때부터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던 거다.
“네 능력이었던 거야.”
왕대비의 말에 유제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리 달갑지 않다. 그녀의 얼굴을 본 왕비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놀라운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는데 두려워하는 표정이군?”
당연하다. 유제니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영웅의 후손이라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다. 요정의 힘을 이어받았다는 것 역시 좋은 이야기일 것이다.
“제가 제어할 수가 없으니까요.”
유제니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어떻게 아서가 마력석을 사용하는 걸 막았는지 모른다.
다시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국왕은 유제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래서 자네의 거취에 고민이 많아.”
유제니가 제니비브의 자식일 뿐 아니라 요정의 힘을 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자 왕대비와 국왕 부부는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요정의 힘이 없어도 유제니는 왕족이다. 어쩌면 왕자와 왕이 후손 없이 사망하면 그녀의 아들이 왕이 되어야 한다.
게다가 마법을 일시적으로 막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졌다면 유제니는 더더욱 발시안 안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제안을 할까 해.”
제안이라는 말에 비스컨 백작 부부와 엘리엇의 시선이 국왕을 향했다. 통보가 아니라 제안이다. 그것만으로도 국왕이 유제니에게 관대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게 유제니는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냥 레이디 비스컨이면 족하다. 지금보다 더 집중받을 수 있는 자리는 원하지 않았다.
“우리는 자네를 양녀로 받아들일까 하네.”
“아니요.”
국왕의 질문에 유제니는 생각해 볼 새도 없이 대답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튀어나온 대답에 방 안에 당황스러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유제니.”
비스컨 백작이 딸을 불렀다. 그의 딸은 왕족이 되는 걸 진중하게 고심해야 한다.
하지만 유제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를 돌아보고 말했다.
“걱정하시는 건 알아요. 하지만 이미 고민했어요.”
유제니는 다시 국왕과 왕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로 어젯밤까지도 그녀는 입장에 대해 다방면으로 고민했다. 제네비브 공주의 입장이나 외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그녀의 입장과 엘리엇, 비스컨 백작가의 입장까지도.
“저는 레이디 비스컨인 게 좋아요. 이 집에서 자라서 행운이었어요.”
그 말에 비스컨 백작 부부의 시선이 부딪쳤다.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테이블 아래로 서로의 손을 찾았다. 왕궁에 올 때까지만 해도 유제니가 원한다면 보내 줄 각오를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유제니가 아니라 유제니 공주님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자랑스럽겠군.”
국왕은 비스컨 백작 부부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 걸린 미소에 비스컨 백작 부부도 미소로 대답했다. 비스컨 백작 부인의 머릿속에 갓 태어난 유제니가 떠올랐다.
어찌나 병약하던지, 다섯 살이 될 때까지는 침대 밖보다 침대 안에서 하루를 보낸 날이 더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잘 자라 주었다.
“그렇다면 자네에게 뭔가를 주고 싶은데.”
지참금이라도 주려는 건가? 비스컨 백작 부부와 엘리엇은 그렇게 생각했다. 유제니가 공주라면 그녀가 결혼할 때 가져가야 할 지참금은 왕실에서 내줘야 한다.
건방지다고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유제니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자네만큼 요정의 피를 강하게 이은 사람이 없었거든.”
“요정의 피를 강하게 이은 걸 축하하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국왕은 유제니의 반문에 피식 웃었다. 축하할 수도 있지. 어쨌거나 좋은 거니까.
요정 마고의 힘을 가졌다는 건 좋은 일이다. 나라를 위해서나 유제니를 위해서나.
그러나 유제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국왕의 표정을 보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표시를 하시려는 거군요.”
“유제니.”
딸의 말에 비스컨 백작 부인이 가만히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유제니는 어머니를 쳐다보지 않았다.
이들은 유제니에게 표시를 하려는 거다. 정확하게는 그녀의 핏줄에. 요정 마고의 혈통을 보존하려는 거다.
그때, 왕대비가 끼어들었다.
“네게 상을 주려는 거기도 하지.”
유제니의 시선이 왕대비를 향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왕대비가 말을 이었다.
“내 생명의 은인이잖니.”
물론 아서가 유제니와 왕대비를 습격한 건 아직 사람들에게 알려지진 않았다. 유제니와 왕대비, 줄리아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아서의 마법에 잠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알리면 된다. 어느 미친 마법사가 왕대비를 납치하려 했다고.
하지만 유제니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친아버지를 감옥에 보낸 상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아서를 아버지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가 그런 짓을 한 건 유제니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왕대비가 위험에 처한 이유가 그녀 때문인데 그 일로 상을 받는 건 옳지 않게 느껴졌다.
“그는 네 아버지가 아니야.”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비스컨 백작이 입을 열었다. 아서는 유제니의 아버지가 아니다. 그 빌어먹을 자식은 제네비브의 임신 소식을 알자마자 도망쳤다. 그리고 그가 보낸 편지에도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비스컨 백작은 평생을 아서를 두려워했다. 마법사의 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도망 다니던 아서를 밀고한 게 그였다.
그래서 비스컨 백작은 어느 날 갑자기 아서가 저택 앞에 나타나서 배신자라고 공격할까 봐 무서웠다. 그가 유제니를 본다면 바로 자신의 딸이라는 걸 알아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몇 달 전까지도 아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빌어먹을 자식은 자기 딸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던 거다.
“알아요. 제 아버지는 아버지뿐이에요.”
유제니는 곧바로 비스컨 백작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비스컨 백작 부부다. 제네비브 공주와 아서 덕분에 태어나긴 했지만 딱 그것뿐이다.
어릴 때 밤새 열이 나는 그녀를 안고 밤을 새운 건 비스컨 백작 부부였으니까.
“하지만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을 수습했다는 이유로 상을 받을 순 없어요.”
고집스러운 유제니의 반응에 국왕 부부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어이없다는 왕대비를 한 번 쳐다본 뒤 비스컨 백작 부부에게 말했다.
“딸을 아주 잘 키웠군.”
비스컨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백작 부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 국왕은 다시 유제니를 쳐다봤다.
보면 볼수록 그의 누이가 생각났다. 나이 차가 꽤 나는 그의 누이도 레이디 비스컨처럼 고집 센 부분이 있었다. 가끔 주변에서 깜짝 놀랄 만한 짓을 하기도 했고.
“하지만 표시하긴 해야 할 겁니다.”
침묵 속에서 가만히 앉아 사태를 관망하면 엘리엇이 입을 열었다. 그는 이 회의가 유제니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면 당장 그녀를 데리고 빠져나갈 생각으로 참석해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유제니에게 그리 불리해 보이지 않았고 국왕 부부의 말도 일견 타당해 보인다. 문제는 유제니가 국왕 부부의 제안을 거부한다는 데 있고.
“그래요?”
유제니는 엘리엇의 질문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깨닫고 물었다.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왕자님께서 성인이 되어 당신에게 반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던 유제니는 깜짝 놀라 입을 딱 벌렸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국왕 부부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유제니가 놀라기 전에 엘리엇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유제니에게 표시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기도 하다.
“제오르지오가 제 고모에게 반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네만.”
왕은 그렇게 말하고 껄껄 웃었다. 왕비 역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농담이다. 제오르지오가 성인이 됐을 때면 유제니는 이미 결혼했을 거다.
어쩌면 자식도 한둘 있겠지. 왕실에서 걱정하는 건 그쪽이다. 불의의 사고로 여기 있는 사람들이 사망한다면, 그리고 제오르지오와 유제니의 자식이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이 남자가 진짜. 유제니는 새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어떤 표시를 하시려는 건지 알 수 있을까요?”
“글쎄.”
국왕은 턱을 쓰다듬었다. 몇 가지 생각해 두긴 했다. 그는 그 모든 걸 유제니가 반길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네와 결혼할 사람에게 영지를 주는 것도 방법이지.”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엘리엇을 향했다. 물론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대신 유제니가 말했다.
“다른 표시는요?”
“자네와 결혼할 남자에게 성을 하사하면 어떨까. 번즈라는 성은 진짜 자네 성이 아니잖나.”
다시 사람들의 시선이 엘리엇을 향했다. 이번에는 엘리엇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남자가 부인의 성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을 텐데요.”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
상인의 딸과 결혼하거나 스승 직공의 딸과 결혼해 그 재산과 사업체를 물려받을 경우에는 그렇게 한다. 하지만 귀족이 그런 적은 거의 없다.
“어떤 성을 고려하고 계십니까?”
유제니는 순수하게 호기심으로 물었다. 왕실에서 그녀가 당연히 엘리엇과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당황스러운 건 엘리엇의 성을 바꾸려는 거고.
“사운더키즈는 어떨까 하는데.”
“전하!”
말도 안 된다. 유제니보다 비스컨 백작 부부가 먼저 나섰다. 하지만 그때, 유제니가 입을 열었다.
“거마로트 공작 부인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