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51 – 1
“자네가 늦지 않게 도착해서 다행이군.”
엘리엇이 아서를 어떻게 잡았는지 이야기를 마치자 왕비가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다행이라는 듯 유제니를 향했다가 엘리엇에게 돌아갔다.
과연 다행이라고 생각할까. 유제니는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차를 홀짝이며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아서는 죽지 않았다. 엘리엇은 그저 그를 기절시켰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 마법사의 탑 감옥에 갇혀 있다.
엘리엇의 요청으로 마력석을 감정하러 나온 마법사가 마법사의 탑에 연락했기 때문이다.
딱히 마법사의 탑 소속이니 그들이 거두겠다거나 하는 책임감 있는 이유는 아니었다. 아서는 괜찮은 마법사고, 마법사들은 이런저런 실험을 하는 걸 좋아한다.
마법사의 탑에게 있어 범죄자인 마법사는 실험할 수 있는 좋은 대상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서는 그날 엘리엇의 손에 죽는 게 나았다고 생각할 생을 살 것이다. 왕족에게 해를 끼쳤으니까.
“몸은 어떠세요?”
이야기가 끝나고 정적이 찾아오자 차를 홀짝이던 유제니가 왕대비에게 물었다. 아서의 마법으로 쓰러졌던 그녀는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렇게 심한 상처는 아니다. 턱에 든 시퍼런 멍은 화장으로 잘 가렸고 팔은 뼈에 금이 갔을 뿐이다. 하지만 화장으로 가렸다 해도 밝은 곳에서는 보일 수 있어서 사람을 만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오늘 이 모임은 왕대비에게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그녀는 유제니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으니 걱정 말렴.”
정말 괜찮다는 뜻이었는데 유제니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죄책감으로 일그러지자 왕대비는 다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레이디 비스컨, 자네 잘못이 아니야.”
다들 그렇게 말한다. 오늘 아침에야 수도에 도착한 비스컨 백작 부부도 그런 말로 자신의 딸을 위로했다.
아서가 유제니에게 접근했다는 말에 비스컨 백작 부인은 펄펄 뛰었고 비스컨 백작은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평생 아서를 두려워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 마법사가 비스컨 백작의 친구였다던데.”
국왕의 질문이 비스컨 백작을 향했다. 아들과 놀라울 정도로 닮은 비스컨 백작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릴 때 잠깐입니다.”
“하지만 레이디 비스컨을 자신의 딸로 키우지 않았나. 아주 친했던 거 아닌가?”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다. 비스컨 백작 부부의 시선이 부딪쳤다.
아주 친했다. 아카데미 시절에는 그랬다는 말이다. 아서와 비스컨 백작은 절친한 친구였고 비스컨 백작 부부가 결혼한 데 아서의 도움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우정은 제네비브 공주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아서가 도망침으로 끝이 났다.
“그자의 행적을 밀고한 게 접니다.”
비스컨 백작의 말에 국왕 부부의 눈이 동그래졌다. 두 사람은 동시에 왕대비를 쳐다봤고 그녀의 표정으로 그게 사실임을 알았다.
“그래. 내가 그자를 잡아서 결단을 내리려 했지.”
왕대비의 말에 유제니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녀 때문이 아니다. 아서 때문이다. 그러니 유제니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의문의 사고로 다리가 무너진 탓에 예상보다 늦게 수도에 도착한 비스컨 백작 부부가 그렇게 말했다. 모든 건 아서가 나쁜 거라고.
“왜 안 잡으신 겁니까?”
국왕의 질문에 왕대비는 인상을 쓰다가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의 탑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녀가 말하기 전에 비스컨 백작이 먼저 대답했다. 마법사의 탑으로 도망쳤다. 원래 마법사의 탑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던 자다. 그러니 그걸 도망쳤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도망친 게 맞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냥 내버려 둔 거지?”
왕비의 질문에 비스컨 백작 부부의 시선이 부딪쳤다. 두 사람은 이어서 왕대비를 쳐다봤다가 백작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공주님을 위해서죠.”
마법사의 탑에 들어간 마법 장학생을 빼내려면 타당한 이유가 필요하다. 그러지 않으려면 그가 마법사의 탑에서 받은 장학금의 몇 배를 지불하고 데려와야 한다.
당시의 왕대비와 비스컨 백작 부부, 제네비브는 그럴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제니비브 공주는 몇 달 뒤면 뉴커크로 떠날 사람이었으니까.
“왕실의 수치를 막아 줘서 고맙군.”
이야기를 들은 국왕이 말했다. 비스컨 백작 부부가 유제니를 자식으로 기른 덕분에 왕실의 수치를 막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외교적인 문제까지도.
다시 유제니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엘리엇이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았다. 왕은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다. 유제니를 왕실의 수치라고 지칭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유제니 역시 그걸 안다. 그녀는 엘리엇을 쳐다보고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 누이가 감사의 표시를 했나?”
다시 국왕이 물었다. 그녀의 실수를 수습해 줬으니 뭔가 보상을 했어야 한다. 비스컨 백작 부부는 다시 서로를 쳐다봤다.
“그 반대입니다.”
이번에는 비스컨 백작이 말했다. 반대라는 말에 다과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백작은 자신의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분 덕분에 제가 세이마리아와 결혼할 수 있었으니까요.”
유제니를 자식으로 기른 것에 대한 보답을 받을 게 아니라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유제니를 자식으로 기른 거다.
“물론 저희가 원한 거기도 하고요.”
비스컨 백작은 재빨리 유제니를 돌아보고 국왕 부부에게 덧붙였다. 백작 부인이 먼저 그에게 유제니를 자신들의 자식으로 기르면 어떻냐고 물어봤다. 백작은 그녀가 하자는 건 뭐든 받아들였고.
“그렇군.”
왕은 다정한 백작 부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유제니에게 고개를 돌렸다. 참 가족과 닮지 않은 아가씨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알겠다.
레이디 비스컨은 그의 누이인 제네비브 공주와 닮아 있었다. 고집 센 턱이나 눈동자, 금발 같은 게.
“갑자기 이런 사실을 알게 되어 충격이 컸겠군, 레이디 비스컨.”
유제니는 왕비의 말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충격이 컸냐고? 어느 쪽이 더 충격이 큰지 모르겠다. 그녀가 부모님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과 친아버지라는 자가 저런 놈이라는 것 중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드려 면목이 없습니다.”
국왕 부부는 유제니의 말에 서로를 쳐다봤다. 두 사람은 이 자리를 빌려 유제니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하지만 평소에도 그리 좋지 않은 레이디 비스컨의 안색은 오늘따라 유독 더 창백해 보였다.
“어머니께도 말씀드렸지만, 자네에게 확실하게 하고 싶은 게 있어.”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유제니에게 이번에는 왕비가 물었다.
“앞으로 자네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알고 싶네.”
“어떻게요?”
뭘 어떻게 하고 싶냐는 건지 모르겠다. 어리둥절해하던 유제니는 거기 모인 사람들이 다들 곤란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엘리엇만 빼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기에 곤란해하는 거지? 잠시 생각하던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전 비스컨 백작가의 사람인 게 좋습니다.”
유제니는 국왕의 조카가 된다. 제네비브 공주의 자식이니까. 설마 관대하게도 공주로 인정해 주기라도 하겠다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그녀에게 국왕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그걸 원한다면 레이디 비스컨으로 사는 것도 괜찮지. 비스컨 가는 아주 훌륭한 집안이니까.”
유제니는 국왕의 말 다음에 하지만이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네는 내 누이의 혈육이지.”
“그렇다면, 이렇게 하길 원하시나요?”
국왕 부부가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다. 유제니는 두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을 이었다.
“제가 가졌을지 모르는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습니다.”
“유제니.”
가졌을지 모르는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 유명한 말이 유제니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비스컨 백작 부인이 재빨리 딸을 불렀다.
그녀가 가질 수 있는 왕족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말이다. 그런 게 있다면 말이지만.
“괜찮아요, 어머니. 전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게 맞아요.”
공주로서의 의무를 하고 싶지 않다면 권리 역시 포기하는 것이 맞다. 다행히 유제니는 공주로 자라지 않았으니 왕실에 어떤 부채도 지고 있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네.”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왕대비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유제니 쪽으로 뻗은 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네가 제네비브의 딸이라는 건, 네게 마고의 피가 흐른다는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유제니는 눈을 가늘게 떴고 엘리엇은 나직하게 욕을 내뱉었다.
“젠장.”
모든 사람의 시선이 엘리엇을 향했지만, 엘리엇은 사과하지 않았다. 그는 국왕 부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영웅 마고는 요정이었죠.”
엘리엇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흘러나왔다. 그런데? 유제니와 비스컨 백작 부부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고 국왕 부부는 서로를 쳐다봤다.
발시안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영웅 마고는 요정이었고 발시안은 인간이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마고는 발시안의 아이를 가졌다.
“설마.”
다음 순간, 유제니는 엘리엇과 국왕 부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고 입을 딱 벌렸다.
“그건, 그건 그냥 전래동화 같은 거잖아요?”
마고는 요정이고 마고의 아이들에겐 요정의 피가 흐른다.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이 나라에는 종종 기적이 일어났다.
“제네비브는 네가 이 나라에 남길 바랐어.”
왕대비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는 그냥 외국으로 시집가는 게 싫어서 자신의 딸이라도 이 나라에 남길 바라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네비브는 다시 한번 확실하게 말했다. 유제니는, 그녀의 딸은 발시안에 남아야 한다고.
“오, 맞아요. 제게도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비스컨 백작 부인이 깜짝 놀라며 끼어들었다. 제네비브 공주님은 그녀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유제니를 이 나라의 귀족과 결혼시켜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