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50 – 5
이게 무슨 일이지?
나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해서 아서를 향해 돌아섰다. 지금 내가 못 나가게 막은 거야?
“유제니는 보내 줘.”
왕대비 전하가 말했다. 그녀는 꼿꼿한 자세로 서서 아서를 향해 말을 이었다.
“내게 요구할 게 있어서 온 거겠지? 저 애는 보내 주게.”
“오, 그럼요. 당신이 해 줘야 할 일이 있죠.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나는 내 딸이 필요하거든.”
아서의 말에 기분이 나빠졌다. 그가 나를 자신의 딸이라고 부르는 게 불쾌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냥 기분 나빠하면서 서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아서의 주의가 왕대비 전하를 향해 있는 틈을 타서 다시 응접실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문은 마치 고정해 둔 것처럼 열리지 않았다.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왔군.”
왕대비 전하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아서가 응접실의 문을 마법으로 막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마법사라고 했으니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겠지.
하지만 마법사들은 이런 식으로 어떤 준비도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그러려면 몇 가지 보조 도구가 필요하다.
가장 대표적인 게 마력석이고.
“화해를 하려고 한 게 아니었군요.”
나는 이를 악물고 왕대비 전하 곁으로 다가가서 아서에게 말했다. 그의 손가락에 낀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돌이 박혀 있었다.
“화해?”
아서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나와 왕대비 전하를 쳐다봤다. 그리고 여유롭게 말했다.
“당연히 화해를 하러 왔지. 사과도 받고.”
“사과?”
사과를 하는 게 아니라 받는다고? 나는 아서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 인상을 썼다. 재빨리 왕대비 전하를 보자 그녀도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기서 어떻게 나가야 하지?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나가야 한다. 하지만 문은 마법으로 닫혀 있고.
그 마법이 얼마나 유지될까. 안에서 나갈 수 없다면 밖에서 들어올 수도 없는 걸까?
머릿속에 줄리아가 떠올랐다. 그녀가 이 집에 있다는 걸 과연 아서가 알까?
아서가 입에 올린 건 집사와 하인들, 그리고 핸더슨 후작 부인이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그가 아직 줄리아의 존재를 모를 수도 있다.
부정적으로 보자면 이미 줄리아도 아서에게 당했을 수도 있고.
“아직 살아 있다는 게 기절했다는 건가요?”
나는 재빨리 물었다. 우리 집 사람들이 어떻게 된 건지 확실하게 알아야겠다. 그러자 아서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높은 곳을 볼 줄 알아야지. 네가 그렇게 현 상황에 만족하게 된 건 다 그 여자 때문이야.”
그 여자? 잠시 뒤에야 나는 아서가 어머니를 욕한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기 위해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어머니 욕은 하지 마시죠.”
“어머니라니!”
아서가 벌컥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왕대비 전하를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당신이 키웠어야지! 애를 이런 집구석에 나 몰라라 버려둬?”
그 순간, 아서가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처음부터 그가 원한 건 단 하나였다.
“내가 고귀한 레이디 사운더키즈이길 바라는 거군요.”
응접실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왕대비 전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고 아서의 입술은 비틀렸다.
젠장.
나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내가 멍청했다.
나는 아서가 내가 정말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뭐, 온전히 그것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는 했지. 부유한 귀족의 구혼을 받고 있는 딸의 덕을 좀 보고 싶어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정도였다. 딸이 부유한 귀족의 부인이 되면 그 덕을 보는, 딱 그 정도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서의 계획은 그게 아니었던 거다.
나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백작 부인의 아버지보다는 공주의 아버지인 쪽이 손에 쥐는 게 많겠죠.”
“뭐라고?”
그제야 왕대비 전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는 반응이었다. 그녀도 생각하지 못했겠지. 지금까지 한 번도 찾아온 적 없는 자가 갑자기 딸을 찾아온 이유가 그거일 줄은.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공주가 될 생각이 없어요.”
돼 봤자 피곤하기만 한 자리다.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도 안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아서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아니, 너는 공주가 될 거야.”
문득, 로렌과 줄리아의 친구가 생각났다. 그 애의 아버지는 그 애의 의견과 상관없이 결혼시키려 했지. 나름대로 괜찮은 남자를 골라서.
줄리아 말로는 괜찮은 남자 같다고 했다. 좋은 집안이고 남자도 젊고 괜찮게 생겼다고.
하지만 줄리아의 친구는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이미 부모님이 정해 준 약혼자와 파혼했다. 날 키우지도 않은 남자가 찾아와서 내 인생을 흔들게 둘 생각은 없다.
“날 억지로 공주로 만들 수는 없을 텐데요.”
날 죽이겠다는 협박을 할 수는 없을 거다. 내가 공주가 되려면 일단 내가 살아 있어야 할 테니까. 나는 아서가 말하기 전에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나와 왕대비 전하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는 것도 안 통할 거예요. 당신이 원하는 걸 이루려면 우리가 살아 있어야 할 테니까요.”
아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여유로운 척 말했다.
“저 늙은이를 죽여도 왕과 왕비가 있지.”
“본 적도 없는 조카가 갑자기 나타나면 그냥 귀족도 아닌 왕족이 과연 반길 거라고 생각해요?”
현 국왕에게는 아들이 하나뿐이고 그 아들은 아직 어리다. 만약 그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다음 후계자는 내가 낳은 아들이 된다.
오, 젠장.
그 순간, 하필이면 그 순간 나는 엘리엇과 클레어의 꿈에 나온 내가 어떤 끝을 맞이했는지 알아차렸다.
“내가 왕이라면 나와 당신을 제일 먼저 없애 버릴 거예요.”
내가 절대 공주가 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군. 나는 약간 허세를 부리며 말했다. 물론 국왕 폐하가 날 죽일지 안 죽일지는 모른다. 왕대비 전하의 표정을 보자 안 죽일 수도 있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하지만 적어도 날 외국에 시집보내려 하겠지. 아서는 그것까진 알 바 아닐 테고.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목숨을 쥐면 되는 거군.”
그때까지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서가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의 목숨. 우리 집 사람들과 핸더슨 후작 부인을 말하는 걸 거다. 그리고 나는 그걸 노렸다.
“목숨을 쥐려면 살아 있어야죠.”
아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으려는 것처럼 나를 응시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뭔가 기대를 하는 것 같은데. 그게 이 집에 숨어 있던 여자애는 아니겠지?”
여자애? 제일 먼저 줄리아가 떠올랐다. 이 집에 아서가 여자애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줄리아밖에 없으니까.
젠장. 그렇다면 줄리아가 아서에게 들켰다는 말이다. 괜찮은 걸까. 제일 먼저 줄리아의 안전이 걱정됐다.
“줄리아는 살아 있는 거죠?”
나는 당황하지 않은 척 물었다. 하지만 사실은 줄리아가 걱정돼서 미칠 것 같았다. 안전한 거겠지? 설마 아서가 줄리아를 해친 건 아니겠지?
“네가 어떻게 구냐에 달렸지.”
아서는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이 빌어먹을 인간. 내 손에 검이 있다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향해 거리낌 없이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내 친아버지라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무슨 냄새 나지 않아?”
그때, 왕대비 전하가 응접실 안을 빠르게 걸으며 말했다. 무슨 냄새?
“머리를 쓰는군.”
아서가 말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나도 왕대비 전하가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를 지나쳐 문 쪽으로 다가가는 왕대비 전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나 역시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쓸데없는 짓….”
“쉿.”
나는 쓸데없이 떠드는 아서를 향해 입 좀 다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왕대비 전하를 따라 문 쪽으로 다가가며 냄새를 맡았다.
“그렇게 해 봤자 문을 열어 줄 생각은 없어.”
“열어야 할걸요?”
왕대비 전하와 시선을 부딪치며 그렇게 말한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아서를 쳐다봤다. 그는 이 문을 열어야 한다.
“불에 타 죽고 싶지 않다면요.”
“뭐?”
아서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리고 나와 왕대비 전하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꿍꿍이를 꾸밀 필요도 없다. 나는 문 쪽으로 물러나며 말했다.
“이리 와서 냄새 맡아 봐요.”
내 말을 따라 문으로 다가온 아서의 표정이 변했다. 진짜로 탄 냄새가 난다. 이 집에서 탄 냄새가 날 일이 뭐가 있을까?
쨍그랑!
그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그 여자애!”
아서는 그렇게 말하며 문을 벌컥 열었다. 어, 진짜 마법이었나 보네. 내가 열려고 했을 땐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아서를 따라 달려갔다. 냄새는 가까운 쪽에서 나고 있었다.
아서가 작은 응접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연기와 타는 냄새가 훅 하고 밀려왔다. 맙소사. 나는 문 앞에서 멈춘 아서를 밀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줄리아!”
연기 때문에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안에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기침 소리가 줄리아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줄리아, 거기 있니?”
응접실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발치에 뭔가가 걸렸다. 휘청하고 넘어질 뻔했지만 뭔가 부드러운 것을 짚은 덕에 다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곧바로 나는 내 발에 걸린 게 쓰러진 핸더슨 후작 부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핸더슨 후작 부인!”
내가 걸려 넘어질 뻔했는데도 후작 부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놀라서 그녀의 뺨을 더듬는데 뒤에서 왕대비 전하가 뛰어 들어왔다.
“마샤? 마샤는 괜찮은가?”
잘 모르겠다. 엎드린 채 더듬거리던 나는 핸더슨 후작 부인에게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쓰러져 있는 앤을 발견했다.
맙소사.
두 사람 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숨은 쉬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앤의 어깨를 잡고 응접실 밖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줄리아! 줄리아!”
그러면서도 줄리아를 찾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분명히 누군가의 기침 소리를 들었다. 적어도 한 명은 정신을 차렸다는 뜻이다.
“후작 부인은 괜찮아요?”
내가 앤을 끌고 나오자 이번에는 왕대비 전하가 핸더슨 후작 부인을 끌고 나오는 게 보였다. 내 질문에 그녀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여기, 여기요. 여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