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50 – 4
“어서 오세요, 전하.”
두 시간 뒤, 나는 우리 집 응접실에서 왕대비 전하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표식도 없는 마차를 타고 조용히 찾아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만나고 싶다는 의미다. 내가 철의 궁을 찾으면 사람들의 눈에 띌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녀가 왜 나를 찾아왔는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줄리아가 차를 내올 때까지도 우리는 날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낙엽이 아주 예쁘게 물들었더구나. 지기 전에 보러 오려무나.”
이게 무슨 의미일까. 나는 대답 대신 줄리아를 빤히 쳐다봤다.
그만 나가 보렴.
줄리아의 얼굴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나와 왕대비 전하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실까요?”
다행히 왕대비 전하는 미소를 지으며 줄리아를 쳐다봤고 나는 줄리아가 방문했을 때 돌려보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줄리아는 원래 우리 집에 허락 없이 방문한다. 오히려 최근 며칠간 오지 말라는 내 말을 들었다는 게 그녀가 내 눈치를 살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정작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거마로트 공작 부인의 발언을 모르는 척해 주었다. 평소처럼 안부와 유행하는 것들에 대해 편지를 써서 보내 줬고 때때로 차를 마시러 오라고 초대하기도 했다.
전부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없단다. 그만 가서 쉬렴.”
다정한 왕대비 전하의 말에 줄리아의 어깨가 늘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에스컬레 경의 딸답게 예의 바르게 물러났다.
“저 아이의 어머니가 지금 저 아이를 본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줄리아가 응접실을 나가자 왕대비 전하가 말했다. 나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아는 좋은 사람이다. 명예와 책임감을 안다.
“너도 마찬가지란다. 유제니.”
이어진 말에 나는 차를 마시려다 멈칫했다. 그녀가 말하는 어머니가 과연 누굴 말하는 걸까. 비스컨 백작 부인? 아니면 뉴커크의 왕비님?
나는 왕대비 전하를 보고 그녀가 말한 내 어머니가 후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 역시 지난번 사건을 알고 있다는 것도.
“소문을 들으셨나 보군요.”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거마로트 공작 부인은 사람들 앞에서 내가 제네비브 공주님의 사생아라고 말했다. 그 덕에 매일매일 도착하는 편지가 서재를 가득 채우고 있고.
과장 좀 하자면 올해 겨울 땔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어머니께서 좋아하시겠군. 아니, 싫어하시려나?
나는 내 어머니인 비스컨 백작 부인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쌓여 있는 편지를 보면 어이없어하시면서 빅스에게 땔감으로 쓰라고 하실 거다.
“유제니.”
전하의 부름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 하지만 필요 없다.
“헛소문이에요.”
헛소문이다. 아서에게도 말했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편이 제네비브 공주님께도 좋을 거다.
“유제니.”
다시 한번 왕대비 전하는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걱정스러움과 죄책감이 뒤섞인 표정에 나는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듣기로는 거마로트 공작가에 안 좋은 일이 있다더군요. 그래서 잠시 혼란스러웠던 거예요.”
공작 부인이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망상을 한 거다. 나는 그렇게 밀고 나가기로 했다. 왕대비 전하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그리하길 원하니?”
부디 문밖에서 줄리아가 귀를 대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까. 나는 줄리아가 서재에 가만히 앉아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고 있기를 기도하며 입을 열었다.
“일은 이미 제가 원하는 것과 상관없이 이뤄지지 않았나요?”
이미 제네비브 공주님은 나를 내 어머니께 맡기기로 했다. 어머니는 나를 친딸로 키워 주셨고. 이 일은 내가 태어났을 때 일어났다.
그러니 이 일은 내가 원하는 것과 상관없이 일어났다. 아, 물론 나는 제네비브 공주님과 내 어머니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네가 제네비브를 원망하는 걸 이해해.”
그때, 왕대비 전하가 말했다. 내가 제네비브 공주님을 원망한다고? 나는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아서?”
분명히 줄리아일 거라고 생각하고 돌아본 곳에는 아서가 서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서가 여기는 무슨 일이지?
제일 먼저 내 머릿속에 그와 언제 만나기로 했는지가 떠올랐다. 이틀 뒤에 보기로 했다. 이 집에서.
약속하지 않은 날에 방문한다면 집사가 내게 알렸을 것이다. 잠깐. 빅스는 어디에 있는 거지?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구나.”
아서는 그렇게 말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게 무슨.
나는 그를 막기 위해 물었다.
“어떻게 들어왔어요? 빅스!”
집사가 어디로 간 거지?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 집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이 빅스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빅스가 허가했다면 내게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조용히 하거라.”
다시 한번 빅스를 부르려는 순간, 아서가 내게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턱하고 내 말문이 막혔다.
이게 뭐지?
나는 당황해서 아서를 쳐다봤다. 그리고 재빨리 왕대비 전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아서가 누군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다.”
다시 한번 아서가 말했다. 이 사람이 내가 알던 아서가 맞나?
나는 내가 만났을 때와 표정도 말투도 전혀 다른 아서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 갑자기 남의 집에 쳐들어와 놓고 걱정할 필요 없다고?
“빅스는요?”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 들어왔는데 아직도 빅스가 내게 사과하러 오지 않았다. 이건 아주, 아주 나쁜 상황이다.
“아, 그 노인네.”
아서는 천천히 우리 쪽으로 걸어오더니 비어 있는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걱정 말거라. 잠들었을 뿐이니까.”
“잠, 잠들어요?”
빅스가?
잠깐, 잠들었다는 게 무슨 비유나 뭐 그런 게 아니겠지? 영원히 잠들었다거나, 그런 거.
그렇게 생각하자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빅스는 우리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더듬더듬 물었다.
“사, 살아 있는 거죠?”
그러자 아서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대단한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한참을 웃더니 말했다.
“그래. 그 늙은이와 여섯 명의 하인 모두 살아 있어. 너와 저 늙은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들이 계속 살아 있을 수 있지.”
아서가 두 번째 말한 늙은이는 왕대비 전하였다. 이 사람, 미쳤나? 나는 입을 딱 벌렸고 왕대비 전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내게 그렇게 말해선 안 될 텐데.”
아서의 고개가 왕대비 전하를 향했다. 그 얼굴에 떠오른 표정에 나는 일이 단단히 틀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 틀어졌다는 건 맞지 않다. 지금 이건 오해나 실수 같은 게 아니다. 아서는 지금 여기에 왕대비 전하가 와 있다는 걸 알고 찾아왔다.
어떻게?
“날 감시했어요?”
나는 믿을 수 없어서 물었다. 그에게 오늘 왕대비 전하를 만날 거라고 말했다. 일부러 어디서 만나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왕궁에서 만난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런데 아서는 지금 여기, 우리 집 응접실에 있다. 내가 나가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지. 아니, 어쩌면.
내가 엘리엇과 만나는 것까지 봤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엘리엇에게 부탁한 팔찌가 떠올랐다. 그게 함정 같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거기 있는 마력석에 어떤 마법 같은 게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반만 맞았던 거다.
마력석에 무슨 마법이 들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팔찌는 나와 엘리엇을 떨어트리기 위한 함정이었을 뿐이다.
“감시라니.”
아서는 빙그레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평소와 같은 말투에 목덜미가 선득해졌다.
부드러운데 부드럽지 않았다. 그는 왕대비 전하의 앞에 높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
“평생 보지 못한 딸을 지켜보는 게 뭐가 문제지?”
“딸?”
왕대비 전하의 얼굴에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차, 그녀는 아직 아서가 누군지 모르는구나.
나는 아서를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전하, 이쪽은 아서 브라이트입니다.”
여전히 왕대비 전하는 그게 누군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말했다.
“제 친아버지입니다.”
아주 잠깐, 왕대비 전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이해했고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히 여길 오다니!”
왕대비 전하의 일갈에도 아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가 노리는 게 대체 뭘까. 왕실과의 화해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게 알겠다.
이런 상황에서 왕대비 전하의 용서를 바랄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니까.
그는 왕대비 전하가 자신을 알아보자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사이, 왕대비 전하는 그녀와 함께 온 핸더슨 후작 부인을 불렀다.
“마샤! 마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핸더슨 후작 부인은 건너편 응접실에 앉아 있을 텐데.
나는 아서가 살아 있다고 말한 사람이 집사와 하인 여섯 명뿐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설마.
“마샤를 어떻게 한 거지?”
왕대비 전하의 고함에 아서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양손을 펼치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앉으라는 듯 소파를 톡톡 치며 말했다.
“그 여자가 살아 있길 바란다면 앉는 게 좋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사와 하인들은 살아 있다고 했다. 나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재빨리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손잡이를 잡아당기는 순간 다시 탕! 하고 문이 닫혔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