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50 – 3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연 아서는 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확인하듯 물었다.
“내일 언제 만나기로 했지?”
“점심 식사 이후에요.”
딱 오후 티 타임 시간일 거다.
“혼자 가는 거지? 내가 같이 가면 어떨까?”
아서의 제안에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실에서 아서에게 화나 있다면서요.”
과연 왕대비 전하께서 아서를 만나려 하실까?
“그건….”
잠시 당황한 듯하던 아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면 이걸 가져가렴.”
잠시 생각하던 아서가 품에서 팔찌를 꺼냈다. 익숙한 디자인이다.
“공주님의 팔찌와 함께 가져가서 보여 드리렴.”
왜?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아서를 쳐다봤다. 이 팔찌를 공주님의 팔찌와 함께 가져가서 왕대비 전하께 보여 드려야 할 필요가 있나?
다행히 아서는 내 의문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래야 진짜 나라는 걸 아실 테니까. 말로만 전하면 내가 널 속이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잖니.”
음. 그것도 그렇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서의 팔찌를 받아들었다. 나와 올리버도 그가 편지를 가져오지 않았다면 사기꾼이라고 쫓아냈겠지.
“이거예요.”
다음 날, 나는 엘리엇과 걸으며 아서와 나눈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가져온 아서의 팔찌도 그에게 보여 주었다.
“비슷하군요.”
엘리엇은 내가 착용한 팔찌를 힐끔 보더니 아서의 팔찌를 받아 들며 말했다. 원래는 똑같았다. 내가 팔찌의 보석을 왕비님이 준 보석으로 바꿨기 때문에 달라진 거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기본적인 디자인은 같다. 중앙에 있는 마력석과 그 주변에 있는 보석.
최근 이런 디자인의 팔찌가 유행했다. 하지만 유행하는 건 마력석을 구하기 어려워서 검은 진주나 흑요석으로 대신한다고 들었다.
“확실히 마력석이군요.”
엘리엇은 마력석을 들여다보고 말했다. 내가 제일 먼저 확인한 것도 그거였다. 진짜 마력석인지.
“이걸 가져가라고 했다고요?”
“제 팔찌와 함께 왕대비 전하께 보여 드리라고 하더군요.”
“증거로 말이죠.”
그렇게 말한 엘리엇이 먼저 도로로 내려가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마차가 지나지 않는 도로를 가로질렀다.
맞은편 공원에 사람들이 많았다. 날이 괜찮아서 다들 공원으로 산책을 나온 모양이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공원을 피해 길을 걸었다. 공원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인사를 건단 말이지. 나와 엘리엇이 과연 약혼을 했는지 궁금해하면서.
“더 멀리 갈까요?”
내가 공원에 있는 사람들을 의식하는 걸 알았는지 엘리엇이 물었다. 이런. 나는 스스로가 별로 좋은 산책 동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가끔 좀 짜증 날 때가 있어요. 사람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질 때요.”
남이 약혼을 하든 파혼을 하든 무슨 상관일까.
하지만 나는 내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걸 안다. 커런트의 속삭임이 발매되는 날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신문을 찾으니까.
모든 사람은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다. 어느 철학자가 그랬다. 나와 타인을 구분하고 비교하는 게 자아가 있다는 증거라고.
그렇다면 타인에게 과도한 관심을 갖는 게 자아가 강한 걸까 약한 걸까. 철학자에게 편지를 보내 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엘리엇이 물었다.
“우리가 약혼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거둘까요?”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내가 두 번째 파혼을 할지 관심을 갖겠죠.”
옆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남자가? 고개를 돌려 보니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었다. 웃기니?
“죄송합니다.”
다행히 엘리엇은 웃은 게 실례라는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그는 크흠 하고 목을 가누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결혼해도 사람들은 또 다른 관심을 가질 겁니다.”
“내가 첫 아이를 아들을 낳을지 딸을 낳을지 같은 거 말이죠.”
엘리엇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그는 생각도 안 해 봤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렇죠.”
좀 이상한가? 결혼은커녕 약혼도 안 했는데 아이 이야기를 하는 게? 생각해 보면 나도 어닝과 아이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아주 잠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하지만 곧바로 엘리엇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서 약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당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걸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전에도 그랬다. 남들의 이럴 것이다라는 기대에 떠밀려서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엘리엇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곁에 있는 게 엘리엇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감사의 의미를 담아 그의 팔을 가볍게 다독인 뒤 자세를 바로 하고 물었다.
“추천해 줄 마법사가 있나요?”
오늘 만나기 전에 엘리엇에게 미리 편지를 보냈었다. 아서에게 받은 팔찌를 감정할 마법사를 추천해 달라고.
가능한 빨리 확인해 보고 싶지만 왕대비 전하를 만나기 전까지는 어려울 거다. 두 시간 뒤에 만나기로 했거든.
아무 전조도 없이 주제가 바뀌었지만 엘리엇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도로를 건널 수 있도록 마차가 오는지 살피며 말했다.
“네. 제 집으로 오기로 했습니다. 만나 보시겠습니까?”
“만날 수 있어요?”
내 질문에 엘리엇이 품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는 다시 시계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슬슬 도착할 때가 됐군요.”
만나 보고 싶다. 마법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거든. 마법사들이 다 아서 같은지도 궁금했다. 나는 엘리엇과 함께 그의 집으로 향했다.
“어떤 사람이에요?”
“저도 만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찾았어요?”
“더그와 로지가 추천했습니다. 몇 번 일을 맡긴 적이 있고요.”
더그라는 사람은 한번 본 적 있다. 엘리엇의 저택에서. 그리고 로지는 자주 ‘응접실’에 온다. 가끔 사람들에게 수업을 해 주기도 한다. 내가 요청한 건 호신술인데 가끔 욕을 알려 주기도 한다.
세상엔 정말 다양한 욕이 있다니까. 나는 로지에게 들은 기상천외한 욕을 떠올리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두 사람이 추천했다면 믿을 수 있겠네요.”
“마법사의 탑에서 추천서도 보내 줬고요.”
번즈 저택 앞에 도착하자 저 멀리서 마차 한 대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저건가? 나와 엘리엇 앞에서 마차가 멈추더니 마부가 내렸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레이디 비스컨과 번즈 백작님이신가요?”
맞다. 엘리엇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말했다.
“닐다 어트리입니다. 마력석을 감정할 수 있는 마법사가 필요하다고 들었는데요.”
“맞아요. 마법사님이 마차에서 내릴 때 사람이 필요한가요?”
마법사가 나이가 많은가? 나는 여전히 굳게 닫혀 있는 마차를 힐끔 쳐다봤다. 그러자 닐다가 말했다.
“네? 아, 제가 마법사의 탑에서 나온 마법사예요.”
오, 젠장.
내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나는 그녀의 외모를 보고 마법사가 아니라고 생각한 게 아니다. 마차를 끌고 왔기 때문에 마부라고 생각했다.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어머, 미안해요. 마차를 끌고 와서 안에 누가 타고 있는 줄 알았어요.”
다행히 닐다는 이게 그냥 재미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킬킬대며 말했다.
“남은 마차 중에 제가 쓸 수 있는 게 이것뿐이었거든요.”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기분 상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마차를 가져가게.”
마차 소리를 듣고 나온 하인에게 엘리엇이 닐다의 마차를 옮기라고 지시하는 게 들렸다. 그는 하인이 마차를 몰고 떠나자 내게 돌아서며 말했다.
“잠깐 들어가시죠.”
그래도 되나?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엘리엇과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시간이 좀 있다. 마력석 안에 마법이 있는지 확인하는 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그 과정을 볼 수는 있겠지.
“마법사의 탑에서 사는 거죠?”
엘리엇의 집사가 미리 준비한 응접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산책하며 대화를 나눈 탓에 목이 말랐던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닐다에게 물었다.
“네. 마법 장학생이었거든요.”
그런데? 나는 마법사의 탑에 사는 것과 마법 장학생이 무슨 상관인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닐다는 나보다 몇 살 더 나이 든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차를 홀짝 마시더니 내 표정을 보고 덧붙였다.
“아, 마법 장학생은 졸업하자마자 마법사의 탑에 들어가는 게 조건이에요. 보통 십 년 정도 머물게 되죠.”
뭐라고? 나는 깜짝 놀라서 닐다를 쳐다봤다. 그때, 옆에서 엘리엇이 말했다.
“마법 장학생이라면, 아카데미 출신인가?”
“맞아요. 아카데미를 졸업하자마자 들어갔어요.”
잠깐, 잠깐.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멈추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닐다에게 물었다.
“졸업하자마자 마법사의 탑에 들어가야 해요? 그러니까, 마법 장학생이면 무조건?”
닐다는 내가 왜 그렇게 당황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 그 조건으로 장학금을 받는 거니까요.”
“장학금을 돌려준다면?”
엘리엇이 끼어들었다. 그는 내가 왜 당황하는지 아는 표정이었다. 나는 부끄러움 반, 분노 반으로 콧잔등을 찡그렸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고 들었지만 쉽지 않아요. 장학금의 몇 배를 돌려줘야 하거든요.”
엘리엇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 표정이 나를 더 속상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