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6화 (221/239)

226화. 50 – 2

“잘 지냈니?”

다음 날, 아서가 방문했다. 여전히 다른 손님은 거절 중이지만 아서는 지난번에 미리 약속을 잡아 뒀기 때문에 그냥 만났다.

물어볼 게 있기도 했고.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나는 아서에게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 앉았다. 동시에 하인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이번에는 먼저 찻주전자를 들더니 내 찻잔과 아서의 찻잔에 차를 따르고 나갔다.

“참, 이걸 가지고 왔는데.”

하인이 나가자 아서는 품에서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반으로 접힌 종이였다. 뭐지? 내가 가만히 쳐다보자 그는 종이를 내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기억을 더듬어서 그린 거란다. 내가 만났을 때의 제네비브 공주님이지.”

공주님이라고? 나는 반으로 접힌 종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집어 들었다. 연필로 그린 초상화였다. 내 또래로 보인다.

“너와 꽤 닮았지?”

아서가 그렇게 말했을 때에야 나는 초상화의 주인공이 나와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네. 나는 그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이게 제네비브 공주님이라고요?”

“그래. 내가 잘 그렸는지 모르겠구나.”

그가 제네비브 공주님을 잘 그린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서에게 그림 실력이 있다는 건 알겠다. 퍽 잘 그린 초상화였다.

“그림을 이렇게 잘 그리시는 줄은 몰랐어요.”

내 칭찬에 아서가 빙그레 웃었다.

“예전에 공주님께 여러 번 그려 드렸지.”

추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한 아서는 금세 어두워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직도 가지고 있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려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제네비브 공주님은 지금 뉴커크의 왕비님이다. 아서가 그려 준 초상화를 버리고 갔을 수도 있다. 그가 준 팔찌를 버리고 간 것처럼.

“괜찮아.”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아서가 입을 열었다. 뭐가? 나는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들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분을 원망하지 않거든.”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나도 모르게 물었다.

“제네비브 공주님이 뉴커크로 가는 걸 몰랐어요?”

“아니, 알았지. 그래도 우리는 서로 한눈에 반했어. 둘 다 어쩔 수 없이 빠져들었지.”

“그러면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잖아요?”

두 사람은 처음부터 이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제네비브 공주님이 공주가 아니라 귀족 아가씨였다면 어쩌면, 어쩌면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주님은 공주님이고 이미 이웃 나라의 왕자와 약혼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는 오히려 아서가 끼어든 거 아닌가?

“공주님과 같은 말을 하는구나.”

아서가 말했다. 공주님도 나처럼 아서와 그녀가 헤어질 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겠지.

나는 솔직하게 물었다.

“전 공주님이 절 낳았다는 게 신기한데요.”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다. 아예 아서를 만나지 않았겠지. 하지만 나는 제네비브 공주님을 모르고, 그녀의 상황을 모른다.

그러니 내가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아서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널 사랑해서지.”

오.

다정한 말에 나는 멈칫했다. 제네비브 공주님이 날 사랑해서 낳았단 말이지. 아서와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리고 내 부모님이 할 수 없이 날 길렀고.

나는 곧바로 아서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주님 하니까 생각났다.

“왕대비 전하를 뵙기로 했어요.”

“왕궁으로?”

“전하께서 기거하시는 곳은 철의 궁이에요.”

철의 궁도 왕궁에 속하니까 큰 차이는 없지만 나는 일부러 아서의 말을 고쳐 주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다시 물었다.

“언제 만나자고 하던?”

“내일이요.”

내일 점심 식사 후에 조용히 보자고 하셨다. 이야기할 것이 있다고.

나는 아서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왕대비 전하와 만나서 아서를 용서해 달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최근 도는 소문 때문인 것 같아요.”

아서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는 뭔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어떤 소문?”

“어떤 귀족 부인이 당신을 안다더군요.”

응접실 안에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아서는 인상을 쓰더니 물었다.

“누가?”

“자작 부인이요. 패터슨 자작가라고, 아세요?”

“글쎄.”

아서는 손을 들어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쩌면 알지도 모르겠구나. 이런저런 일을 해야 했거든. 그중에 귀족가의 일도 있었고.”

“무슨 일을 했는데요?”

물론 아서는 내게 마법사라고 했다. 하지만 마법사의 탑에서 번 돈으로 생활이 가능해서 돈 때문에 일을 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일을 해야 했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나는 다시 물었다.

“돈이 필요하지는 않다고 하셨잖아요?”

이어진 내 질문에 아서는 인상을 썼다. 그리고 부끄럽다는 듯 말했다.

“널 찾느라 귀족들에게 접근해야 했거든. 그들에게 여흥을 제공했지.”

“오.”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귀족들은 파티를 열면 손님들을 즐겁게 해 줘야 한다. 볼거리를 많이 마련해 놓는다는 말이다.

극단이나 악단을 고용하기도 하고 사탕을 만들거나 광대를 고용하기도 한다. 이번 사교계에서 유행한 건 점을 보는 거였고.

“혹시 점을 보셨어요?”

내 질문에 아서는 멈칫하더니 말했다.

“나는 마법사란다.”

“점은 안 보셨다는 말인가요?”

아서의 얼굴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비슷한 흉내를 낸 적이 있긴 하지.”

그리고 곧바로 농담이라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나 역시 아서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그는 킬킬거리며 말했다.

“보통 귀족의 상담과 해결 방안을 제공했단다. 너무 사적인 이야기라 어떤 상담이었는지 말해 주기는 어렵구나.”

“아니에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테이블에 놓인 초대장으로 시선을 던졌다.

“제가 제네비브 공주님의 사생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아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부인했고요.”

“하지만….”

아서가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제네비브 공주님과 상관없어요.”

“유제니.”

“그분은 뉴커크의 왕비님이에요. 만약, 왕비가 되기 전에, 그리고 약혼 중에 사생아를 낳았다는 게 밝혀지면 아주 곤란해지겠죠.”

아서의 얼굴에 안타까운 표정과 화가 난 표정이 섞였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제네비브 공주님이 곤란해질까 봐 부인했다는 말이니?”

“아니요.”

오, 물론 그런 이유도 있다. 나는 제네비브 공주님이 곤란해지길 바라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녀는 나를 낳아 준 사람이고, 뉴커크의 왕비님이니까.

다른 집안으로 시집가서 그 집안의 안주인이 되는 게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지 나는 안다. 공주님은 집안이 아니라 아예 다른 나라로 시집을 갔다. 그리고 자란 것과 전혀 다른 환경과 문화 속에서 왕비가 됐지.

만약 이 스캔들이 터진다면 그녀는 아주, 아주 곤란해질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내 출생을 부인한 건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나는 아서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게 좋은 게 없어요.”

“공주가 되는 게 좋을 게 없다고?”

이해하지 못하는 아서의 앞에서 나는 한숨을 내쉬지 않기 위해 콧잔등을 찡그렸다. 이 나이에 공주가 돼서 좋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뭐든 권리가 있다면 의무가 있기 마련이다. 공주가 되는 순간 나는 누린 권리도 없이 의무가 늘어난다. 그것도 그리 환영받지 못할 골칫덩어리 공주가 되겠지.

어느 나라에서 사생아 공주를 좋아하겠어?

“존재해선 안 될 공주니까요.”

놀라는 아서의 태도에서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다는 게 드러났다. 뭐, 그렇겠지. 그는 귀족이 아니니까. 귀족가의 자식이 어떤 존재인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첫아들은 후계자. 둘째 아들은 첫째의 예비가 된다. 셋째와 딸은? 거기부터 문제다. 자식이니 당연히 살길을 마련해 줘야 하지만 집안에 충분한 돈이 없다면 골치가 아파진다.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적어도 외교적으로 써먹을 순 있겠네요. 최대한 어딘가로 빨리 시집보내려 하겠죠.”

당연하다. 갑자기 생긴 사생아 공주? 왕실에 먹칠을 했으니 빨리 처리하고 싶을 거다. 운이 아주 좋으면 가까운 나라로 시집가겠지만 그것도 어렵다.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인 뉴커크에는 제네비브 공주님이 왕비님이니까. 게다가 사생아잖아. 어느 왕실에서 받아들이려 하겠어?

운이 적당히 좋다면 공국으로 가겠지. 공국에서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왕대비 전하가 네 할머니인데,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그렇게까지라고? 나는 아서가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깨닫고 말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한 건 가장 잘 풀렸을 때를 가정한 거예요.”

운이 나쁘다면 왕실에서 날 죽이려 들 수도 있다. 나라에 먹칠을 하는 존재니까. 물론 왕대비 전하가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잠깐, 혹시 날 죽이려고 만나자는 건 아니겠지. 나는 내 침실에 둔 편지를 떠올렸다. 그러지 않길 빈다. 하지만 그녀가 날 죽이려 한다면 막을 방법이 없다.

“원하신다면 제 친아버지가 당신이라는 걸 밝힐 수는 있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서에게 다시 말했다. 그가 내 아버지라고 인정받고 싶다면 세상에 알릴 수 있다. 친절한 비스컨 백작 부부가 평민의 딸을 입양해서 자신의 딸로 키웠다고.

하지만 제네비브 공주님의 사생아라는 것만은 밝힐 생각이 없다. 나라와 제네비브 공주님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내 인생을 위해서.

“네가 그렇게 말하니 좀 걱정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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