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50 – 1
엘리엇이 떠나고 난 뒤, 나는 그대로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폭풍 같은 하루를 빨리 흘려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잠을 쉬이 들 수가 없었고 한번은 심지어 배가 고파서 잠에서 깼다.
리사가 방문한 건, 앤이 가져다준 따듯한 차와 스콘을 먹고 서재의 긴 의자에 누워 있을 때였다. 책상 위에는 아침부터 날아 들어온 편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소문 한번 빠르지. 어제 내가 겪은 일이 벌써 사교계에 퍼진 모양이다. 대체 다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듣는 걸까.
예전의 나였다면 소문이 사교계를 한 바퀴 돌고 커런트의 속삭임에 실렸을 때나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이번 소문의 주인공은 나였고 다들 자신이 들은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몇몇 편지는 정말 거마로트 공작 부인이 미쳤는지 궁금해했고.
“괜찮아요?”
손님이 도착했다는 말에 응접실에 들어서자 리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악몽이 되살아났다. 다들 나를 ‘레이디 괜찮아요.’로 부르는 악몽이다.
아니, 악몽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이지, 참.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거죠? 괜찮아요. 좀 놀라긴 했지만요.”
나는 괜찮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리사에게 앉으라고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차를 가져온 하인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찻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제가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하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응? 내가 쳐다보자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집사님이 저한테 따르고 나오라고 하셨거든요. 아가씨께서….”
어제저녁부터 지금까지 먹은 거라곤 스콘 하나뿐이라는 걸 말하려는 거겠지. 나는 걱정 말라고 말하려다 리사까지 걱정할 것 같아서 찻주전자를 하인에게 내밀었다.
다들 날 너무 과하게 걱정하는 것 같다. 난 깨지기 쉬운 유리 같은 게 아니란 말이지.
“고마워.”
하인은 찻잔을 정중하게 나와 리사 앞에 내려놓고 나갔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찻잔을 들어 올렸다. 아직도 입맛이 없다. 하인은 내 찻잔에 심지어 크림을 넣으려 했는데 내가 막았다. 이것도 집사가 시킨 거겠지.
“어제 일 때문에 온 게 맞긴 해요.”
나와 함께 찻잔을 든 리사는 그렇게 말하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겠지. 줄리아도 와도 되냐고 물었는데 내가 거절했다.
줄리아가 날 걱정한다는 뜻이다. 그녀는 한 번도 내게 방문 허락을 구한 적이 없으니까.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버릇처럼 엘리엇이 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엘리엇의 걱정과 달리 나는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보다 먼저 사과해야 할 일이 있어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마음을 달래는데 리사가 말했다. 사과? 무슨 사과?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그녀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패터슨 자작 부인이 당신의 아버지를 안다고 했다면서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제 있었던 일 중 가장 덜 충격스러운 이야기니까.
사람들은 지금 거마로트 공작 부인이 정말 미친 건지, 내가 제네비브 공주님의 사생아라는 말을 왜 한 건지 이야기할 거다. 내 아버지가 평민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 그 이야기를 예전에 이미 들었거든요. 패터슨 자작 부인의 티 파티에서요.”
패터슨 자작가의 티 파티가 언제였더라. 당연하지만 나는 초대받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나 화려하고 멋졌는지는 기사에서 봤다. 삽화로 인형의 집까지 그려 놨었지. 그게 그냥 인형의 집이 아니라 빵으로 만든 거라는 설명과 함께.
“듣자마자 당신한테 말했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생각하지 못한 사과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그걸 사과하는 거야?
내가 부모님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소문은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이 퍼진 모양이었다. 책상 위에 쌓여 있는 편지가 그 증거다.
하지만 나는 나보다 먼저 그 소문을 알고 있던 친구들에게 왜 내게 말하지 않았냐고 따질 생각은 없다. 원래 자기에 대한 소문은 본인이 가장 늦게 알기 마련이니까.
“저한테 물어보기 어려운 소문이었잖아요.”
이해한다. 그런 내 위로에 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손으로 감싼 찻잔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물어볼 생각이었어요. 사실이냐고.”
음, 뭐. 그것도 가능한 일이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리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전에 확인해 보고 싶었거든요. 그 소문이 사실인지.”
이건 좀 기분이 이상하다. 내가 내 부모님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내가 여전히 말이 없자 고개를 든 리사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서 말했다.
“아니, 당신의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어떻게요?”
그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해서 내게 무슨 도움을 준다는 건지 모르겠다. 리사는 빠르게 말했다.
“패터슨 자작 부인이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지 알아내면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요.”
“어떻게 해결해요?”
내 출생의 비밀을 어떻게 해결하지?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리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문이 거짓이라면 사기꾼을 잡으면 되죠. 진실이라면….”
리사의 표정이 단호해졌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들의 정보를 캐 올게요. 유제니, 당신은 그들의 약점을 가질 수 있어요.”
잠시 뒤에야 나는 리사가 말하는 ‘그들’이 내 친부모를 말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오.
오, 맙소사.
리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 그녀는 내 친부모의 약점을 잡아 내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 주겠다는 말이다. 어쩌면 내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하거나.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머릿속에 엘리엇의 말이 떠올랐다. 스스로를 보호하라고 했다. 그가 방패가 되어 준다고 했지.
세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는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아주 사악한 계획이네요.”
내 말에 리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 충격이 번지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농담이에요. 다정한 제안이군요. 정말 고마워요, 리사.”
내가 행운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까. 심지어 날 위해 내 친부모의 약점까지 캐 오겠다는 좋은 친구도 있다.
리사의 굳은 얼굴이 풀어졌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진심이에요. 말만 해요. 그 점술가에 대해 사람들이 아는 모든 걸 알아 올게요.”
“말만으로도 고마워요.”
충분히 고맙다. 날 도와주겠다는 말만으로도.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리사의 말을 다시 떠올리고 인상을 썼다.
“점술가요?”
리사의 얼굴에 자신이 말을 안 했냐는 표정이 떠올랐다. 안 했다. 내가 고개를 젓자 리사의 얼굴에 익히 아는 표정이 떠올랐다.
수많은 사람과 돈을 부리는 그런트 가에서 태어나 배우고 자란 부잣집 아가씨의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점술가인 것 같아요. 내 조사에 따르면요.”
리사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작은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떻게 조사를 했는지. 그리고 어떤 정보가 있는지.
“아가씨.”
빅스가 응접실 문을 노크한 건 리사의 이야기가 끝나 갈 때쯤이었다. 내 생각대로 패터슨 자작 부인과 거마로트 공작 부인은 한편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하몬 부인도.
“잠시만요.”
나는 빅스에게 기다려 달라고 한 뒤 리사에게 계속 이야기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정보를 들은 게 언제였는지 이야기한 뒤 덧붙였다.
“사람들에게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있다면 뭐든 사겠다고 했어요. 그러니 또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되면 알려 줄게요.”
나를 위해 계속해서 정보를 수집하고 공유해 주겠다는 말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리사의 손을 잡으며 진심으로 말했다.
“고마워요. 당신 같은 친구가 있어서 난 참 운이 좋아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녀를 현관까지 배웅하며 와 줘서 고맙다고 거듭 인사했다.
패터슨 자작 부인이 한 이야기나 그녀가 조사한 걸 알려 주러 온 것보다 날 걱정해서 와 줬다는 게 더 고맙다.
“무슨 일이에요?”
리사를 배웅한 뒤, 나는 기다리고 있던 빅스에게 물었다. 오늘 아침에 미리 손님은 거절해 달라고 말해 뒀다. 리사나 클레어만 제외였다.
가십이 재미있긴 하지만 내가 그 가십의 주인공이 되는 건 사양하고 싶거든.
“편지입니다.”
빅스는 굳은 표정으로 내게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두께가 얇은 게 초대장 같다. 지금 이 시기에 오는 초대장이라면 거절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기 전에 빅스가 다시 말했다.
“철의 궁에서 왔습니다.”
왕대비 전하께서 보낸 초대장이라는 말이다. 나는 물끄러미 편지 봉투를 쳐다보다가 받아 들었다. 나를 철의 궁으로 초대하시는 거겠지.
“아가씨.”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나는 서재 안에 들어와 있었다. 나는 내 손에 들린 편지와 봉투 칼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내 옆에 서 있던 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으세요?”
“어? 어, 어어. 괜찮아.”
“안색이 안 좋아요.”
그럴 것 같다. 지금 좀 어지러우니까. 나는 다시 봉투로 시선을 돌렸다. 앤의 뒤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앤, 아가씨를 침실로 모시거라.”
“아가씨.”
나를 재촉하는 앤의 목소리에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왕대비 전하는 전부터 종종 나를 초대하셨다. 나에 대한 소문을 들으면 항상 불러서 무슨 일인지 물어보곤 하셨다.
그러니 이번에도 어제 일을 들으신 거겠지.
나를 종종 불렀던 게 어머니가 공주님의 말동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게 떠올랐다. 참 바보 같았군.
“침실에 가요. 네?”
걱정스러운 앤의 부탁에 나는 그녀를 돌아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앤의 말이 맞다. 하지만 이걸 침실에 두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봉투를 뜯어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