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4화 (219/239)

224화. 49 – 3

약간의 분노를 실어 그렇게 말하자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개운해졌다. 오, 그렇군.

그동안 내가 당황하거나 황당한 줄 알았는데 이 상황에서 좀 화가 났었던 모양이다.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거마로트 공작 부인과 패터슨 자작 부인을 쳐다봤다.

그리고 화가 난 척 말했다.

“제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기에 두 분께서 얼마 전부터 그런 헛소문을 퍼트리시는지 모르겠군요.”

화가 난 척하는 건 쉬웠다. 진짜로 화가 났으니까. 놀랍게도 패터슨 자작 부인이 나섰다.

“헛소문을 퍼트리다니. 사실이니까 하는 말이야.”

“오, 그래요? 패터슨 자작 부인,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나요?”

“그래! 건방 떨지 말아, 레이디 비스컨. 난 자네의 아버지가 누군지 아니까!”

자작 부인이 아서를 안다는 말이다. 정말 알까?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방금 전의 헛소문을 들어 보신 분이 있나요?”

있겠지. 극장에서 하몬 부인이 그런 헛소문을 퍼트리는 걸 봤다. 그렇군. 나는 하몬 부인도 거마로트 공작 부인과 한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방금 전 공작 부인과 자작 부인의 행동은 두 사람의 연극이었다. 내가 공주님의 사생아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대체 이유가 뭘까.

내 출생의 비밀을 파헤쳐서 공표하는 게 대체 그 세 사람에게 무슨 이득이 있을까. 내가 너무 미워서?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나를 보려는 게 목적인가?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적어도 공작 부인이 그런 이유로 왕족을 곤란하게 만들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녀는 공작 부인이니까. 자신의 위치에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교육받았을 것이다. 나처럼.

“그, 자작 부인의 티 파티에서 들었는데.”

다들 눈치만 보는 와중에 멀지 않은 곳에서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래? 나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패터슨 자작 부인이나 거마로트 공작 부인이 아닌 분께 이야기를 들은 분은 없나요?”

다시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러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여자가 손을 들었다.

“오, 하몬 부인에게 들은 것도 빼고요.”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여자는 손을 내렸다. 허허. 나는 나도 모르게 거마로트 공작 부인과 패터슨 자작 부인을 쳐다봤다.

“뭔가 오해를 하는 모양이야, 레이디 비스컨.”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공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내가? 그럴까? 나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는 자네를 도와주려는 걸세. 자신의 정확한 출생을 모르고 살다니, 안타깝잖나.”

“전 제 출생을 아주 잘 알아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내 출생을 잘 안다. 날 키워 준 건, 아픈 나를 간호하고 사람을 불러 교육을 시켜 주고 사랑해 준 건 내 부모님이다. 비스컨 백작 부부.

내 부모님은 그 두 분이다. 아서도, 제네비브 공주님도 아닌.

뭐, 제네비브 공주님에게 날 낳아 준 것에 대한 감사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녀가 과연 그걸 바랄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자네는 제네비브 공주님의 사생아고 공주일세.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을 누릴 자격이 있어.”

거마로트 공작 부인의 말은 달콤한 것처럼 들렸다. 거짓말이다. 전혀 달콤하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힐데자르처럼요?”

오, 그렇군.

힐데자르의 이름을 입에 담자 거마로트 공작 부인의 표정이 확 굳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그녀가 왜 나를 타겟으로 했는지 어렴풋하게 알 것 같았다.

어떻게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날 공격하는 것과 힐데자르가 어떤 관련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느낌뿐이지만.

“감히.”

공작 부인은 이를 악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나는 그녀의 화가 난 얼굴을 보고 방금 전 내 말이 그녀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히 내 아들을 입에 올리다니, 건방진 것.”

다시 주변이 조용해졌다. 과연 사람들이 거마로트 공작 부인이 분노한 이유를 알까.

나는 사과하지 않을 거다. 힐데자르가 드래곤의 알을 건드려 갇힌 건, 그의 잘못이지 내 잘못이 아니니까.

“매우 흥미로운 말씀이군요.”

그때, 엘리엇이 입을 열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잠시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기 때문에 하마터면 나는 화들짝 놀랄 뻔했다.

엘리엇은 내 뒤에 얌전히 서 있다가 내 옆으로 나오며 말을 이었다.

“분명 레이디 비스컨이 공주라고 하셨는데요.”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가 다시 거마로트 공작 부인을 향했다.

“어느 공작 부인이 공주님을 건방진 것이라고 지칭합니까?”

어, 오, 그러네.

나는 엘리엇을 따라 공작 부인을 쳐다봤다가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엘리엇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미천한 제 지식으로는 모르겠어서 말입니다. 정말 레이디 비스컨이 공주님이라면, 말조심을 하셔야 할 텐데요.”

공작 부인은 이제 엘리엇을 노려보고 있었다. 방금 나를 쳐다보던 표정은 화난 표정이 아니었다. 공작 부인은 표정만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엘리엇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을 돌아보더니 다시 거마로트 공작 부인을 향해 물었다.

“공작 부인께선 본인도 믿지 않는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내가 공주라는 게 아니라 공작 부인이 헛소문을 퍼트리는 이유로 옮겨 간 모양이다.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엘리엇을 노려보던 공작 부인이 휙 몸을 돌리더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혹시라도 엘리엇이 또 공격할까 봐 재빨리 그의 손을 잡았다.

“괜찮습니까?”

다행히 엘리엇은 거마로트 공작 부인을 공격할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재빨리 나를 부축하며 물었다. 맙소사. 그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레이디 비스컨.”

사일록 후작이 다가왔다. 솔직히 말하면 안 왔으면 좋겠다. 지금은 세상이 날 내버려 뒀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여기는 후작의 저택이고 그는 또 다른 피해자다.

“괜찮은가?”

괜찮지 않다. 하지만 나는 해야 할 말을 했다.

“안 좋은 모습을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후작님의 음악회에 누를 끼쳤네요.”

“무슨 소리야.”

사일록 후작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손짓으로 사람을 부르더니 말했다.

“공작 부인이 요새 제정신이 아니라더군.”

“그런데 초대하셨군요?”

엘리엇의 말에 나는 재빨리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어허. 그만두지 못해?

사일록 후작은 엘리엇을 한번 쳐다보고 내게 말했다.

“아들에게 일이 생긴 모양이야. 기분 전환을 하라고 초대했는데 이런 짓을 벌일 줄 몰랐네.”

그랬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요, 후작님.”

설령 공작 부인의 상황이 안 좋다는 걸 알았다 해도 내게 이런 짓을 벌일 줄은 후작도 몰랐겠지. 나는 그의 짐을 덜어 주기 위해 말을 이었다.

“후작님도 놀라셨잖아요. 다른 손님들도요.”

그러니 다른 손님들을 달래러 가도 된다. 그런 말에 사일록 후작의 얼굴에 그려진 주름이 깊어졌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고 나와 엘리엇에게 말했다.

“방을 준비하라고 하지. 쉬고 싶다면 이용하게.”

“괜찮습니다.”

나는 후작의 도움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지금은 쉬는 게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안전한 내 방으로.

그리고 거마로트 공작 부인이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생각도 좀 하고.

다행히 사일록 후작은 내 거절을 받아들여 엘리엇의 마차를 꺼내주었다.

“괜찮습니까?”

마차 안에서 엘리엇이 물었다. 내 얼굴이 괜찮지 않아 보이나? 나는 손바닥으로 뺨을 문지르며 물었다.

“그렇게 안 좋아 보여요?”

그렇지 않아도 핏기 없는 얼굴인데 시체처럼 보이면 곤란하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제일 먼저 빅스와 앤이 기절할지도 모른다.

뺨을 문지르는 내게 엘리엇이 조용하게 말했다.

“당신은 언제나 완벽하죠. 하지만 방금 전 일은 충격적인 일이었으니까요.”

언제나 완벽하다는 말에 손이 멈췄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엘리엇을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이럴 때조차도 농담을 할 수 있다니, 대단하다.

“공작 부인이 날 공격한 이유가 뭘까요?”

내 질문에 엘리엇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내게 몸을 내밀며 진지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오, 당신 때문이라는 말이 아니에요. 당신을 공격하기 위해 날 공격한 거라면 좀 이상하잖아요?”

엘리엇을 공격하고 싶다면 나와 그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런데 공작 부인은 내가 제네비브 공주님의 사생아라는 걸 밝히는 쪽을 선택했다.

“그게 당신을 공격하는 방향이 되진 않을 것 같거든요.”

게다가 날 공격하는 게 엘리엇을 향한 복수라기보다는 힐데자르와 더 연관 있게 느껴졌다. 그냥 내 감이라 누군가에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대체 내가 왜 그렇게 느꼈는지 생각하다가 포기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어떻게 알았을까요?”

엘리엇 역시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이 비스컨 백작 부부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뿐 아니라 낳아준 사람이 제네비브 공주님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었죠.”

그래, 그거.

이상하다. 그걸 대체 어떻게 안 걸까. 나조차도 고작 며칠, 몇 주 전에 알게 된 사실인데.

“패터슨 자작 부인이 당신의 아버지를 안다고 했죠.”

엘리엇의 말에 나 역시 기억이 떠올랐다. 그랬다. 내 아버지가 누군지 안다고 했다.

“아서를 만난 걸까요?”

“두 사람은 그렇게 닮지 않았습니다. 안다면 그가 말한 거겠죠.”

그런가. 나는 나처럼 창백하고 호리호리한 아서를 떠올렸다. 내게는 자신의 존재를 비밀로 하자고 했다. 그런데 패터슨 자작 부인에게는 말을 했다고?

그건 좀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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