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49 – 2
엘리엇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왜 마음에 드는지 모르겠네.
“왕비님께서 패터슨 자작가를 그냥 도와주기만 하실 거라 생각한 거예요?”
내 질문에 엘리엇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정면으로 향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때때로 친분 앞에서 공정함을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거든요.”
그렇긴 하다. 하지만 나는 왕비님이 공정할 거라 생각한다. 적어도 겉으로는 말이지.
“맞아요. 하지만 표면적으로나마 그렇지 않으면 다른 귀족들의 불만이 높아질 거예요.”
엘리엇은 깜빡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다른 귀족들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왕족과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지켜보는 눈이 많다. 그러니 오히려 왕비님은 패터슨 자작가를 더 심하게 혼낼 수도 있다.
“패터슨 자작이 저지른 불법이 뭔데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잘못일까. 가벼운 문제라면 외교적인 문제까지 커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엘리엇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엘리엇?”
그는 한 번도 나와 함께 걸을 때 이렇게 급하게 걸은 적이 없다. 왜 그러는 거냐고 물어보려는데 내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패터슨 자작 부인이었다.
맙소사.
나는 엘리엇에게 힐끔 시선을 던졌다. 그는 내가 알아차리기 전부터 패터슨 자작 부인이 우리 뒤에 있다는 걸 알았던 모양이다.
내 말을 들었을까? 자작 부인의 말을 무시하고 걸어가려는데 그녀가 다시 말했다.
“레이디 비스컨, 내 이야기를 한 게 아니에요?”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올해 사용할 욕의 허용치가 넘었지만 상관없다. 허용치 같은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내가 몇 번이나 욕을 생각했는지 떠올리며 걸음을 멈췄다.
못 들은 척하고 싶지만 소용없을 거라는 걸 안다.
“패터슨 자작 부인.”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마리온 패터슨 자작 부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여기 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어쩌면 남편의 일로 후작님께 도움을 요청하려고 왔을지도 모른다. 왕비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무마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으니까.
“오랜만이네요.”
웃는 낯으로 주제를 돌리려 했지만 패터슨 자작 부인은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다시 물었다.
“방금 내 이름을 들은 것 같은데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잘못….”
나는 잘못 들었다고 말하려 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말한 건 패터슨 자작 부인이 아니라 패터슨 자작이니까. 그게 먹힐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내가 입을 열자마자 엘리엇이 말했다.
“제가 사업에 대한 조언을 구하던 중이었습니다.”
패터슨 자작 부인의 시선이 엘리엇에게 향했다. 그녀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작위 하나 받았다고 자신이 정말 우리와 같아졌다고 생각하나 보지?”
자작 부인의 비난은 화가 난 것보다는 당황스러웠다. 지금? 이 자리에서?
패터슨 자작 부인은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타인의 출신 성분을 문제 삼는 게 예의에 어긋나는 걸 아는 사람이다. 나는 엘리엇을 힐끔 쳐다봤고 그는 내게 한쪽 눈썹을 들어 보였다.
“말해 보게, 번즈 백작. 자네가 그 같잖은 작위 하나 얻었다고 우리와 어울려 사업이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이어진 자작 부인의 비난에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하기 시작했다. 으음. 나는 어느 쪽을 보호해야 할지 몰라 패터슨 자작 부인과 엘리엇을 번갈아 쳐다봤다.
분명 패터슨 자작 부인이 비난하는 건 엘리엇이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면 엘리엇이 그녀에게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거나.
혹시 후자를 노린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엘리엇이 입을 열었다.
“안 좋은 일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침착한 목소리였다. 듣고 있던 패터슨 자작 부인의 얼굴에 당황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갈 정도로.
덕분에 빠르게 돌던 내 머릿속도 가라앉았다. 나는 패터슨 자작 부인이 대체 뭘 노리고 이러는 건지 생각하며 말했다.
“후작님과는 인사 나누셨나요?”
이 저택은 사일록 후작의 저택이다. 그러니 초대자에게 피해가 갈 만한 짓을 하지 말자는 신호였다. 하지만 패터슨 자작 부인은 내 신호를 무시했다.
“레이디 비스컨, 아니, 뭐라고 불러야 하지? 사생아라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허.
이번에도 화가 난다기보다는 황당한 기분이 먼저 들었다. 이 사람, 왜 이러는 거지? 나는 패터슨 자작 부인이 마치 연극이라도 하듯 우리를 구경하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을 인상을 쓰고 쳐다봤다.
미쳤나?
“항간에 글쎄, 레이디 비스컨이 어느 촌부의 사생아라던데.”
“패터슨 자작 부인.”
엘리엇이 나직하게 그녀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패터슨 자작 부인이 움찔하는 게 보였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천한 용병 주제에. 감히 어느 이름을 불러?”
날카로운 패터슨 자작 부인의 말에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느 쪽이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엘리엇뿐 아니라 패터슨 자작가에도 좋은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누군가 패터슨 자작 부인을 말려 주길 기대하며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동행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자작 부인의 몸이 안 좋은 모양이네요. 거기, 휴게실로 자작 부인을 안내해 주겠어?”
나는 저 멀리 보이는 하인을 부르며 말했다. 내가 데려가려고 해 봤자 패터슨 자작 부인이 순순히 따라갈 리가 없다. 오히려 더 흥분하겠지.
“건방진 것! 어디 천한 사생아 주제에 명령을 해?”
이어진 패터슨 자작 부인의 고함에 나는 그녀가 술에 취한 게 아닌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술에 취한 거였으면 좋겠다. 아니면 패터슨 자작 부인은 미친 거니까.
“자작 부인, 적당히 하시죠.”
침착한 목소리로 엘리엇이 말했을 때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거마로트 공작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엄하군, 패터슨 자작 부인.”
생각하지 못한 사람의 등장에 나는 엘리엇을 쳐다봤다. 그 역시 나를 쳐다보더니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엘리엇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다. 거마로트 공작 부인이 우리를 도와주려고 나선 건 아닐 거라는 거.
“레이디 비스컨에게 사생아라니, 어서 사과하게.”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우리 앞에 멈춰 서자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그때, 사일록 후작이 나타났다.
“패터슨 자작 부인, 이게 무슨 짓인가.”
다행이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집주인이 나타났으니 아무리 패터슨 자작 부인이 제정신이 아니라 해도 이 촌극을 멈추겠지.
거마로트 공작 부인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공작 부인은 이 촌극을 멈출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걱정 마세요, 사일록 후작님. 패터슨 자작 부인이 뭔가 큰 오해를 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 소란이 오해 때문에 일어났다는 말입니까?”
사일록 후작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의 못마땅하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공작 부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패터슨 자작 부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작 부인, 어서 사과하게.”
이건 또 무슨 짓일까. 이상하게도 안 좋은 기분이 들었다. 등허리를 타고 벌레가 기어오르는 느낌.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처럼 발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내가 도망치기 전에 패터슨 자작 부인이 말했다.
“제가 확실히 알아요. 저 계집은 레이디 비스컨 같은 게 아니라 미천한 사내의 딸일 뿐이에요.”
“오, 아니라네, 자작 부인. 비스컨 백작 부인이 불륜 같은 짓을 저지를 리가 없지 않은가.”
그건 맞다. 하마터면 거마로트 공작 부인의 말에 맞장구를 칠 뻔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멈출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사일록 후작을 향해 저 두 사람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이디 비스컨은 아주 고귀한 분이야.”
이어진 거마로트 공작 부인의 말은 마치 연극 하는 것처럼 들렸다. 잠깐. 그 순간, 나는 그녀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건 엘리엇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두 분, 그만하시죠.”
엘리엇이 입을 열었지만 거마로트 공작 부인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아니, 듣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알기로 레이디 비스컨의 생모는 제네비브 공주님이거든.”
젠장.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기절하면 안 돼, 기절하면 안 돼.
나는 주문을 외듯이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절하면 안 된다.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하니까.
머릿속만큼이나 눈앞이 어지러워서 나도 모르게 내 손이 내 이마를 짚었다.
“유제니.”
재빨리 엘리엇이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려는 것처럼 몸을 숙였다. 아니, 안 되지.
나는 어지러운 게 아니라 피곤해서 머리에 손을 댄 것처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에 수많은 걱정과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무엇 하나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내 입은 내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내뱉었다.
“맙소사, 두 분. 정말 너무 하시는군요!”
웅성거리던 주변이 조용해지는 게 느껴졌다. 머리가 아파서 착각한 게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이 웅성거렸던 모양이다.
나는 사람들이 입을 멈추고 내 말을 기다리는 것을 깨달았다. 기절하면 안 돼. 기절하면 안 돼.
“말도 안 되는 헛소문 좀 그만 퍼트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