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1화 (216/239)

221화. 48 – 4

너무 놀라면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모양이다. 내가 정신을 차린 건 줄리아의 고함 소리 때문이었다.

“뭐라는 거야?”

안에 앉아 있던 한 무리의 여자들이 고함에 놀라 돌아봤다가 우리를 발견했다. 그들도 내가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는지 화들짝 놀라는 게 보였다.

“가십지에나 나오는 헛소문을 대체 누가 떠들고 다니나 궁금했는데 당신 같은 사람들이었네!”

“줄리아.”

나는 깜짝 놀라서 줄리아를 불렀다. 하지만 줄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여자들에게 다가가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말조심해. 무슨 그런 거지 같은 소리를 잘났다고 하고 다녀?”

“아, 아니….”

당황한 사람들 중에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는 하몬 부인을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불렀다.

“하몬 부인?”

아까 우리가 들어올 때 큰 소리로 이야기하던 게 하몬 부인의 목소리였다는 게 그제야 생각났다. 세상에. 그녀를 부르고도 나는 깜짝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놀란 건 하몬 부인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내 부름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하몬 부인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 말했다.

“어, 어머, 레이디 비스컨.”

“웃기는 사람이네.”

줄리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어, 그러게. 아까 분명 레이디 비스컨은 무슨. 사생아 주제에, 라고 했지.

“오랜만이네요.”

나는 가까스로 침착하게 하몬 부인에게 인사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야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따지거나 헛소문 퍼트리지 말라고 화내고 싶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소란을 피워 봤자 하몬 부인의 말만 더 퍼질 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줄리아에게 말했다.

“가자, 줄리아.”

꽤 화가 났는지 하몬 부인을 노려보던 줄리아는 내가 두 번이나 부르자 그제야 물러났다. 그녀는 나와 함께 휴게실 밖으로 나와 이 층으로 올라가며 물었다.

“그 자리에서 사과를 받았어야죠.”

“아, 그러네.”

너무 당황해서 생각도 못 했다. 머릿속에 하몬 부인이 아서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을지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이야기한 걸까. 엘리엇과 클레어는 내게도 비밀로 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니겠지.

“로렌.”

그제야 머릿속에 로렌도 꿈을 꿨다는 게 생각났다. 나는 복도에 서서 로렌에게 물었다.

“알고 있었어?”

로렌의 얼굴에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 떠올랐다. 모르나? 나는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꿈에서 내가 왕, 아니, 섭정이었다며. 왜 섭정이 됐는지 몰라?”

꿈에서 내가 왕이 된 건 제네비브 공주님의 사생아였기 때문이다. 즉, 내가 왕족이라는 걸 왕궁에서 인정했기 때문이겠지. 왕궁에서 그랬다는 건 모든 왕족이 죽었기 때문이고.

왕자님만 빼고.

“어, 잘 몰라요.”

당황하는 로렌을 보니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왕이었다고 했잖아. 왜 왕이 됐는지 몰라?”

로렌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부끄러워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집 안에서만 있었거든요. 밖의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하인들뿐이라….”

그래서 내가 어떻게, 왜 왕이 됐는지는 모른다는 말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지민들도 자신들의 영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이름이 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영주님은 그냥 영주님인 거지.

어쩌면 다른 꿈을 꾼 사람들도 그런지 모른다. 클레어나 엘리엇처럼 나와 가까웠던 사람들 외에는 내가 왜 왕이 아니, 섭정이 됐는지 정확하게 모를 수도 있겠지.

“아, 그런데.”

로렌은 뭔가가 생각난 것처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인상을 쓰며 말했다.

“꿈에서 유제니가 이상한 소리를 했어요. 그래서 어, 음….”

“이상한 소리?”

줄리아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우리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음에 이야기해 줄게. 나는 줄리아에게 그렇게 말하고 로렌을 쳐다봤다. 그래서?

“그래서 유제니가 마녀라는 소문이 났거든요.”

“내가 뭐라고 했는데?”

대체 뭐라고 했길래 마녀라는 소문이 나는 거지? 로렌은 나와 줄리아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자기는 남자 없이 태어났다고요.”

그 비슷한 이야기를 이미 클레어에게 들었다. 그러니 그건 헛소문이 아니었겠지.

“남자 없이? 어머니만 있다는 말이야? 그게 말이 돼?”

가만히 듣고 있던 줄리아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마녀라는 소문이 났는데 그게….”

로렌은 나와 줄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덧붙였다.

“점점 더 커지더라고. 진짜 이상한 일들도 있었고. 아, 그것도 헛소문일 테지만요.”

남자 없이 태어났다라. 로렌이 나를 위로하려는 듯 뭐라고 더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만 있다는 줄리아의 말이 귀에 꽂혔기 때문이다.

꿈에서 나는 아서의 존재를 부인했다.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떠올리자 나는 그대로 몸이 굳었다. 그렇군. 왜 이 생각을 그동안 못 했을까.

나는 아서를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해서는 안 된다.

다행인 건 그가 내 아버지라는 것을 먼저 숨기자고 말했다는 거다.

부디 그 생각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제 공연은 재미있었니?”

다음 날, 조용히 찾아온 아서가 물었다. 내가 그에게 공연을 보러 극장에 간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어제 공연이 어땠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냐는 엘리엇에게는 그냥 공연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다고 둘러댔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지만 엘리엇이 납득한 것으로 보아 내 취향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참, 일은 어떻게 됐어요?”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지난번에 일을 구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잘 구해지지 않아서 마법사의 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고도 말했지.

그가 마법사의 탑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서가 해 주는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거든. 그와 게임도 하고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친아버지지만 알게 됐으니 오래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아서가 마법사의 탑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도 분명 존재한다. 그게 내 죄책감을 찌르고 있고.

“구하긴 했는데.”

아서의 말에 나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좋겠다. 나처럼.

“너도 알다시피 나는 꽤 오래 마법사의 탑에 있었잖니.”

무슨 말인지 이해한다. 신원이 확실하지 않다는 말이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추천서를 써 드릴게요.”

“오, 아니, 내 말을 오해했구나.”

응? 여기서 내가 오해할 만한 게 뭐가 있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기울였다. 아서는 나를 보고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밝힐 수 있어야 해. 너도 알잖니? 마법사로 일을 하고 싶어도 경력을 밝힐 수가 없어.”

아서의 이야기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느 방향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그는 마법사의 탑에 갇혀 있었다. 당연히 그동안의 경력이랄 게 없다.

무슨 경력을 밝힌다는 거지?

“최근에 알았는데, 네가 왕대비 전하와 매우 가까운 사이라더구나.”

왕대비 전하. 꽤 엄하지만 이상하게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분. 그녀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를 이제는 어렴풋하게 알 것 같다.

어쩌면.

그분은 내가 제네비브 공주님의 사생아라는 걸 아는 거겠지.

“가깝진 않아요.”

나는 방어적으로 말했다. 그분이 나를 아끼던 게 그런 이유라면 거리감이 느껴진다. 무슨 생각으로 나를 대했던 걸까.

“아, 그래?”

아서가 실망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말했다.

“하지만 알현을 요청할 수는 있어요. 무슨 일이신데요?”

다시 아서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는 손에 쥔 찻잔을 내려다보며 망설이다가 말했다.

“왕대비 전하께 내 이야기를 전해 드려 볼 수는 없을까?”

“아서의 이야기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혼란스러워하는 내게 아서는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마법사의 탑에 갇혔던 것도, 이렇게 사는 것도 그분이 내게 화가 났기 때문이잖니.”

“그….”

그렇지 않다. 아니, 그런가?

왕대비 전하가 그럴 리 없다고 딱 잘라서 말할 수는 없다. 나는 그분이 얼마나 엄한지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게 내 출생 때문이라면, 그 화가 과연 정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 네가 왕대비 전하와 내 사이를 중재해 줄 수 있을까?”

“중재요?”

“그러니까, 그분께 내가 네 아버지라는 걸 인정받으면 우리가 좀 더 자유롭게 만날 수 있지 않겠니?”

왕대비 전하께 아서를 내 아버지로 인정해 달라고 한다고? 나는 인상을 쓰며 물었다.

“용서받는 게 아니고요?”

“오, 용서는 무슨. 그런 건 감히 바라지도 않아. 나는 그저, 왕대비 전하께서 너와 내 관계를 용인해 주셨으면 해.”

그러니까 왕대비 전하께 내 아버지가 아서라는 걸 인정받고 싶다는 말이다. 그 말이 맞나?

“말씀은 드려볼 수 있어요. 하지만 아서.”

왕대비 전하께 말씀드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단 한 가지만 빼면.

그 부분을 확실히 해야 한다.

나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나를 낳은 분이 제네비브 공주님이라는 건 인정받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널 낳은 분이잖니. 네 친어머니인데, 인정받고 싶지 않아?”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레이디 비스컨으로 만족한다. 괜한 분란을 만들 생각은 없다.

“전혀요.”

내 대답에 아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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