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0화 (215/239)

220화. 48 – 3

“조심하세요.”

마차에서 먼저 내린 엘리엇이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그의 커다란 손에 내 손을 얹으며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렸다.

이제 괜찮을 것 같은데. 계단 아래로 내려와서 엘리엇의 손에서 내 손을 빼려고 했지만 엘리엇이 그렇게 두지 않았다. 그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어두우니까 잡고 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럴 리가. 극장은 낮처럼 환했다. 계단을 올라가다가 누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 날 테니까. 하지만 엘리엇의 손은 크고 따듯해서 잡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나는 그래야겠다고 말하려다가 내 옆에서 따라오는 줄리아와 로렌을 보고 멈칫했다.

두 사람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교환하고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니? 좀 부끄럽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엘리엇과 함께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번즈 백작님, 이쪽입니다.”

“안내는 됐네.”

엘리엇의 얼굴을 알아본 직원이 안내를 하겠다며 다가왔지만 엘리엇이 거절했다. 로렌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극장에 자주 오시나 봐요? 직원이 백작님 얼굴을 알고 있네요?”

엘리엇이 공연을 좋아하나? 그가 많은 공연을 알고 있긴 하다. 사실, 공연 외에도 엘리엇이 아는 건 많다. 그와 이야기하다 보면 다른 나라의 문화도 상당히 잘 알고 있거든.

하지만 그가 박학다식한 것과 상관없이 극장 직원이라면 박스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외우고 있을 거다. 빅스가 한번 온 손님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는 것과 같은 이유로.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운 얼굴이잖아.”

그때, 줄리아가 툭 끼어들었다. 그러자 로렌이 엘리엇의 얼굴을 한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아, 그렇네.”

이 애들에게 다른 사람의 외모를 두고 이야기하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고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정작 엘리엇은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들렸겠지. 나한테도 들렸는데 그에게 들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우리가 뒤에 앉을까요?”

엘리엇이 박스석에 들어가며 물었다. 그게 괜찮을 것 같다. 이 공연은 줄리아와 로렌이 오고 싶어 한 거니까.

유명한 가수의 올해 마지막 공연이라고 한다. 꼭 오고 싶다고 했는데 당연하게도 에스컬레 경은 허락하지 않았다.

“일 막이 끝나면 나갔다가 오는 거야.”

나는 정신없이 무대를 살피는 줄리아와 로렌에게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에스컬레 경이 허락하지 않은 이유는 이 공연이 복수 치정극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막 초반에 나오는 부분은 가사와 가수의 연기가 매우 잔인하다고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은 나와 약속을 했다.

일 막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나와 함께 지하에 내려가서 이 막이 시작하고 조금 더 있다가 올라오기로.

“번즈 백작님도 우리와 함께 나갔다가 오시나요?”

줄리아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럴 리가 없다. 나는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우리를 초대해 주셨는데 그런 피해까지 드릴 순 없지.”

“전 같이 나가도 괜찮은데요.”

진짜? 애들 앞에서 이렇게 나오기야? 나는 그런 표정으로 엘리엇을 쳐다봤고 그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하지만 자리를 지키는 게 좋겠군요.”

그래야지. 로렌과 줄리아는 이 공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특권을 누리고 있다. 우리는 1막이 끝나면 내려가서 여성 휴게실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올라올 거다.

“왜 에스컬레 경이 못 보게 했는지 알 것 같네요.”

공연이 시작되자 나는 엘리엇에게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복수 치정극이라더니 처음부터 남녀가 바람피우는 장면이 나온다.

엘리엇은 내 말에 아무 말 없이 씩 웃었다. 자극적이네. 나는 약혼녀의 친구와 바람을 피운 남자가 약혼녀에게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장면을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엘리엇이 물었다. 마음에 안 드는 정도가 아니다. 무대 위에는 자신의 약혼자가 바람을 피우는 줄 모르는 피해자 두 명이 나와 노래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결국 두 피해자는 약혼자의 부정을 발견하고 고통스러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마음이 불편하다. 치정 복수극이라고 했을 때 알아차려야 했는데.

나와 달리 로렌과 줄리아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무대를 보고 있었다. 이래서야 일 막이 끝날 때까지 참는 수밖에 없다.

“죄송합니다.”

그때, 엘리엇이 내 손을 잡으며 나지막하게 사과했다. 엄마야. 나는 내 손에 닿는 따듯한 느낌에 깜짝 놀랐다가 그를 쳐다봤다. 엘리엇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소재가 좋지 않았군요. 괜히 안 좋은 기억만 나게 해 드렸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멍하니 엘리엇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안 좋은 기억이요?”

무슨 안 좋은 기억?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엘리엇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아니, 댁이 먼저 안 좋은 기억 나게 해서 미안하다며? 치정 복수극과 내 기억에 무슨 상관이, 오.

그제야 나는 엘리엇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깨달았다. 이 남자는 그러니까 지금 내가 어닝을 떠올리는 줄 알았던 거다. 어닝이 나와 약혼한 채로 바람피웠던 것을 떠올리는 줄 알았던 거구나.

젠장, 그렇군.

완전히 잊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 이 순간까지 나는 어닝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한숨을 내쉬자 엘리엇이 다시 말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나는 엘리엇의 손을 맞잡으며 속삭였다. 정말로 괜찮다. 오히려 지금까지 내가 어닝을 잊고 있었다는 걸 알게 돼서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더 이상 어닝이 나한테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거든요.”

이제는 어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아무 기분도 안 들 것 같다. 아, 물론 안타깝긴 하겠지. 그는 아직 젊으니까. 그리고 죽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어닝에 대한 어떤 소문이 들려도, 그게 설령 그가 어떤 남자와 행복한 가정을 이뤘다는 소문이라 해도 축하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 정도로 어닝은 내게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되었다.

엘리엇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잡고 있던 내 손을 들어 입을 맞췄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다행입니다.”

엘리엇이 웃는 것을 보자 그와 키스를 하고 싶어졌다. 예전에는 극장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다행인지 아닌지 내가 엘리엇에게 입을 맞춰도 될지 고민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일 막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자, 얘들아.”

이제 나가야 한다. 나는 줄리아와 로렌이 나와 엘리엇의 대화를 듣지 못했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다행히 두 사람은 무대에 빠져 있어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던 모양이다.

“내려가서 뭘 좀 마시자.”

“좋아요.”

내 말에 대답한 건 로렌이었다. 나는 아직도 눈이 반짝이는 줄리아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로렌 역시 줄리아를 보고 미소 지었다.

“차가 있을까요?”

“차는 있을걸?”

좋은 차가 아니어서 그렇지. 우리는 일 층으로 내려와 차를 마셨다. 땅콩도 좀 먹고. 그렇게 휴식 시간이 반쯤 지나갔을 때였다.

“잠깐 여기 있어.”

“어디 가시게요?”

“엘리엇에게 차 좀 가져다주게.”

우리를 초대해 줬는데 우리만 이렇게 먹고 마시기 좀 미안하다. 나는 차와 땅콩을 조금 사서 다시 이 층으로 올라갔다.

엘리엇은 우리가 나갔던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대체 언제 들어왔는지 그의 부하가 서 있었다는 점이고.

“어머, 미안해요.”

이름이 뭐였더라? 나는 몇 번 만난 적 있는 남자의 이름을 재빨리 떠올렸다. 데이빗.

“데이빗이 온 줄 몰랐어요.”

“괜찮습니다. 데이빗은 곧 갈 겁니다.”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고 데이빗을 쳐다봤다. 하지만 데이빗은 대답 대신 나와 엘리엇을 번갈아 쳐다보기 시작했다.

“땅콩 좋아해요?”

나는 차를 엘리엇에게 건넨 뒤 땅콩을 데이빗에게 내밀며 물었다. 그는 허둥지둥 땅콩 봉투를 받아들며 말했다.

“어, 네. 좋아합니다.”

“미안해요. 있는 줄 알았으면 차도 한 잔 더 가져왔을 텐데.”

“괜찮습니다.”

다시 엘리엇이 말했다. 그리고 데이빗에게 눈짓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데이빗은 엘리엇이 왜 눈짓하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는 잠시 뒤에야 퍼뜩 깨달은 표정으로 말했다.

“네, 괜찮습니다. 금방 갈 거라서요.”

하하. 당연히 그렇겠지. 내가 아이들과 조금 늦게 올라온다고 했으니 짬을 내서 일을 하는 모양이다.

좀 미안한데. 이렇게 바쁜데 우리를 위해 시간을 내준 거잖아. 나는 하던 일 하라는 말과 함께 복도로 나왔다. 그러자 엘리엇이 재빨리 나를 따라 나와서 말했다.

“사람을 시키셨어도 됐을 텐데요.”

그건 그렇다. 보통은 몇 번 좌석으로 가져다 달라고 주문하거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얼굴 보고 싶어서요.”

엘리엇만 빼놓고 차를 마시는 게 미안하기도 했고. 물론 여기서 파는 차는 떫은맛이 나서 별로였지만.

내 대답에 엘리엇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내게 몸을 기울이다가 멈칫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저 녀석을 내보낸 뒤….”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겠다. 나는 발뒤꿈치를 들어 엘리엇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는 깜짝 놀란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만.

엘리엇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번에는 그가 내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이마를 댄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런 곳에서 이러는 걸 싫어하실 줄 알았는데요.”

“저런, 날 잘 모르는군요. 저 안에서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거든요.”

우리는 마주 보고 킥킥대며 웃었다. 덕분에 엘리엇의 배웅을 받으며 일 층으로 내려올 때까지 내 기분은 아주 좋았다.

로렌과 줄리아는 여전히 극장의 카페테리아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이 나를 보자 다시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모르는 척하고 말했다.

“휴게실에 갔다 올까?”

카페테리아보다는 그쪽이 좀 더 편하게 쉴 수 있다. 구두를 벗거나 다리를 쭉 펼 수 있으니까.

휴게실은 좀 더 안쪽에 있다. 나는 줄리아와 로렌을 데리고 휴게실로 다가갔다. 벌써 이 막이 시작됐는지 바깥쪽에는 사람이 없었다.

“잘난 척은 다 하더니 사생아라는 거죠.”

휴게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응? 내가 멈칫하는 것과 동시에 그 누군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레이디 비스컨은 무슨. 사생아인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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