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48 – 2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다음 날, 클럽을 찾은 올리버에게 지배인이 물었다. 흥미 반, 시비 반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지배인의 태도는 꽤 딱딱했다.
다행히 올리버는 최근 그에게 딱딱하게 구는 사람이 한 명 늘어나서 익숙해져 있었다.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레이디 비스컨에게 전해 줄 게 있는데.”
이럴 때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는 게 먼저다. 지배인은 네 놈이 누군데 레이디 비스컨을 찾냐고 물어보려다 멈칫했다.
자신의 얼굴을 모를 리가 없다는 자신감. 군중 속에 있어도 확 들어오는 잘생긴 얼굴. 그리고 화려한 금발. 그녀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비스컨 남작님이시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럴 줄 알았다. 올리버는 자신을 문 앞에 내버려 두고 안으로 들어가는 지배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시안 유일의 여성 클럽, ‘응접실’이다.
물론 유제니는 클럽이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소문에 의하면 여성용 클럽이나 다름이 없다. 식사와 차는 물론 독서실과 체력 단련장까지 갖추고 있다고 하니까.
있다고 한다는 이유는 올리버도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게 섭섭하지 않은 이유는 엘리엇도 들어가 본 적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유제니가 자신의 부유한 친구들과 함께 진행했다. 대외적으로 클럽의 소유주는 유제니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의 뒤에 몇 명의 동업자와 후원자가 있다.
“뭐야, 잘 되는 모양인데?”
지배인이 들어가는 문틈으로 안에 사람이 꽤 있는 것을 본 올리버가 중얼거렸다. 항간에는 이용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망하기 직전이라더니 문틈으로 보이는 장면은 전혀 달랐다.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는 거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올리버 앞에 다시 클럽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지 못한 얼굴이 나타났다.
“유제니는 지금 자리를 잠시 비웠는데. 무슨 일이지?”
클레어는 재빨리 밖으로 나와 문을 닫으며 물었다. 조금이라도 안을 들여다보겠다고 기웃거리는 남자들이 많았다. 지난번 ‘배’ 때처럼 여자들이 홀딱 벗고 있다는 소문이라도 들은 모양이다.
그녀는 경계 어린 표정으로 올리버를 쳐다봤다. 한 번도 안 오더니 갑자기 왜 온 걸까.
“어, 뭐야?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바보 같은 질문에 클레어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녀는 여기가 어딘지 모르고 온 거냐고 쏴붙이려다 마음을 바꿔 설명했다.
“여기서 검술을 가르치고 있거든.”
“아직도?”
클레어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올리버는 재빨리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변명했다.
“아니, 장소가 바뀌었으니까. 이제 그만 할 줄 알았지.”
그럴 리가 없다. 클레어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아직 있어.”
오히려 비스컨 저택에서 가르칠 때보다 더 늘었다. 장소가 바뀌면 사람들의 접근이 더 쉬워질지도 모른다던 유제니의 판단이 옳았다.
차와 식사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 차를 마시러 왔던 사람들이 클레어의 수업을 보고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덕분에 클레어는 거의 매일 수업을 하고 있다. 수입이 괜찮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그제야 올리버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품에서 봉투를 꺼내 클레어에게 내밀며 물었다.
“이거, 유제니가 가고 싶어 하던 전시회인데 어렵게 초대장을 구했거든. 오늘 저녁이야.”
전시회? 클레어는 올리버가 내민 봉투를 받아들며 말했다.
“극장이 아니고?”
오늘 아침에 클럽 아니, ‘응접실’에서 회의할 때 말했다. 저녁때 극장에 가야 해서 좀 일찍 퇴근하겠다고.
클레어의 말에 올리버는 아차 하고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오늘 아침에 식사를 할 때 그렇게 말했었다.
그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어렵게 구한 건데.”
개방일은 이틀 뒤지만 집주인이 가까운 사람에게만 좀 일찍 개방했다. 그걸 올리버가 어렵게 초대받은 거고.
그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나 혼자 가야지, 뭐.”
아쉽다는 태도에 클레어는 초대장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몇 명만 들어갈 수 있는 전시회 초대장이라.
“맞다. 라넌 경, 그림 좋아하지 않아?”
“뭐? 아니, 난….”
갑작스러운 올리버의 질문에 당황한 클레어의 말문이 막혔다.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좋아하나? 잠시 고민하는 사이, 올리버가 다시 말했다.
“그럼 같이 가지 않겠어? 나 혼자 가기 좀 그렇거든.”
어렵게 구한 초대장이다. 혼자 가기 좀 아깝다는 말에 클레어는 인상을 썼다.
전시회를 올리버 비스컨과? 내가 미쳤어? 하지만 그녀가 거절하기 전에 올리버가 다시 말했다.
“유제니가 좋아하는 그림이 있거든. 나도 좋아하는 거고.”
클레어의 마음이 흔들렸다. 유제니가 좋아하는 그림이라. 어떤 그림인지 궁금하다. 그녀가 어떻게 할지 갈등하기 시작하자 올리버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아, 나랑 가기 싫으면 혼자 가도 되고.”
그가 그렇게 말하자 오히려 클레어의 마음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그림인지 궁금하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만 먼저 보여 준다니.
그 정도로 유명한 그림인 모양이다. 클레어는 잠시 고민하다가 초대장을 올리버에게 다시 내밀며 말했다.
“아니, 같이 가지.”
초대장을 받은 건 올리버인데 클레어 혼자 가는 건 모양새가 이상하다. 그녀의 말에 올리버가 씩 웃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전시회가 열리는 저택으로 향했다.
“오늘 근무였어?”
기사복을 입고 있어서 묻는 거다. 올리버의 이상하다는 질문에 클레어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응.”
거짓말이다. 물론 근무하긴 했다. 하지만 오전 근무였고 그 뒤에 클럽에 가서 검술 수업을 진행했으니 전시회에 가기 위해 일부러 기사복으로 갈아입은 거다.
이유는 간단하다. 올리버나 다른 사람의 눈에 이게 데이트로 보이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다. 클레어는 몇 사람만 초대했다던 올리버의 말대로 한가한 저택 안으로 들어가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거야?”
홀의 한쪽 벽에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사람들 앞에는 그림이 한 점 걸려 있고.
어찌나 큰 그림인지 한쪽 벽을 전부 차지하고 있다. 클레어의 질문에 올리버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니.”
그리고 집주인에게 다가가 초대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집주인은 클레어와 올리버라는 조합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모르는 척하고 걸음을 옮겼다.
“저거야.”
올리버가 가리킨 그림은 구석에 걸려 있는 작은 그림이었다. 남자의 손바닥 두 개로 가려질 만한 크기다. 클레어는 그림 앞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물었다.
“저걸 유제니가 좋아한다고?”
“응. 나도 그렇고.”
대체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 클레어는 호수와 보트를 그린 그림을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이상하게도 그림 속의 보트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다.
“이거, 유제니가 아니라 당신이 좋아하는 거 아냐?”
호수와 보트라니, 올리버가 좋아하는 조합이다. 클레어가 단번에 올리버의 거짓말을 간파하자 그는 인상을 썼다. 이렇게 눈치가 빠를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올리버는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아냐, 유제니도 좋아해. 원래 어머니 소유였거든.”
어릴 때 유제니와 올리버는 이 그림을 보며 저 보트의 주인은 어디로 갔는지 이야기를 하곤 했다. 올리버가 배에 관심을 가지게 된 원인이기도 하고.
“그런데 왜….”
“흔한 이야기지. 아버지의 사업 실패.”
올리버가 어렸을 때 비스컨 백작은 몇 번이나 사업에 실패했다. 부유한 집이었다면 타격이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스컨 백작가는 가난한 편이고 백작의 빚을 갚기 위해 백작 부인은 값어치 있는 것들을 몇 번이나 팔아야 했다.
올리버는 그게 아주 싫었다. 빚을 갚기 위해 덜 중요한 순으로 팔아치우는 삶이란 아무리 좋게 말해도 비참하다.
“전에 이야기했잖아. 조정을 포기한 이유.”
둘 다 완벽하게 할 수 없으니 포기했다고 했다. 클레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올리버는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다가 돈을 날리는 게 싫어.”
올리버 혼자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 비스컨 백작이 될 테고 그가 쓸데없는 짓을 하면 고생하는 건 그의 가족들이다.
그래서 조정을 포기했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걸까 봐.
클레어는 물끄러미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 남자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이 생각한다는 게 놀랍다.
그녀는 올리버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데려온 건가?”
올리버의 시선도 클레어에게 향했다. 그의 입술이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보여 주고 싶기도 했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클레어는 저도 모르게 올리버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뭘까, 이 기분은.
그녀는 다시 가만히 그림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무능력함 때문에 인생의 일부분을 포기한다는 게 두 사람의 공통점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 클레어의 머릿속에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유제니의 아버지 말인데.”
“응?”
지금 여기서 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거야? 올리버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클레어는 다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꿈에서 유제니를 만나러 온 적이 있어.”
“있다고? 꿈에서?”
“정확하진 않지만.”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꿈에서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을 만나고 싶어 하는 남자가 있었다. 나이가 좀 있는 마법사라는 것까지 들었다.
하지만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다. 특별히 기억할 만한 사건이 없다면 잊어버릴 수밖에 없다.
“만났어?”
올리버의 질문에 클레어는 미간을 찡그렸다. 안 만났다. 그녀의 기억에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남자의 알현 요청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녀가 마녀라는 소문을 강화할 말을 내뱉었다.
“자신은 아버지 없이 여자 혼자 낳았다고 말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