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8화 (213/239)

218화. 48 – 1

“잡았다.”

아서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이 자신의 말을 집어 내 말을 툭 치는 게 보였다. 나는 그가 내 말을 잡아 게임판 밖으로 뺄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이렇게 하면 끝이죠.”

내가 집은 말이 아서의 말을 향해 움직였다. 이걸 못 봤던 모양이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왕이 게임판에서 끌려 나가는 것을 지켜봤다.

그리고 한참을 게임판을 들여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맙소사. 정말 잘하는구나.”

혹시라도 화를 낼까 봐 걱정했는데 그의 얼굴에 미소가 어려 있었다. 조마조마한 기분이 사라졌다. 나는 그의 칭찬에 말을 정리하며 말했다.

“어릴 때 자주 했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와 했다. 어머니와 올리버는 이런 정적인 걸 별로 안 좋아하거든. 하지만 아버지는 좋아하신다. 그러니까 날 키워 주신 아버지 말이지.

“윌리엄이 가르쳤나 보구나.”

아서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내 부모님에 대해 이야기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녀석, 아카데미 시절에 내게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는데 네가 날 이긴 걸 알면 아주 기뻐하겠구나.”

“아버지가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어요?”

그건 좀 놀랍다. 아버지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이 게임을 잘하는 사람이거든.

아서는 내 질문에 나를 들여다보며 씩 웃었다. 마치 내가 그에게 내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걸 불편해하는 걸 아는 것 같다.

“그 녀석도 꽤 잘했어. 아카데미에서 윌리엄을 이긴 사람이 손에 꼽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아서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더 잘했지. 그렇다고 우리 중에서 이 게임을 가장 잘한 건 내가 아니었어.”

“우리요?”

“나와 제네비브, 그리고 세이마리아와 윌리엄. 우리는 늘 함께 다녔거든.”

그건 몰랐다. 물론 어머니가 공주님의 말동무였다는 건 안다. 그리고 세 분이 아카데미를 같이 다녔다는 것도.

하지만 아서까지 넷이 함께 다녔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내가 놀라자 아서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아, 당연히 몰랐겠지. 우리가 친한 걸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을 테니까.”

“아카데미 안에서 친하게 지낸 게 아니었어요?”

어떻게 네 사람이 친한 걸 모를 수가 있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카데미에서 친했다는 이야기를 못 들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한 이유는 아버지에게 반한 어머니가 공주님께 아버지와의 결혼을 도와달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거든.

“주로 밤에 만났지. 그땐 여학생과 남학생이 듣는 수업이 달랐거든. 낮에는 수업을 듣고 밤에는 각자 탈출했지.”

아서는 옛날이야기를 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도 그런 적이 있다. 두 분이 결혼하기 전이나 나와 올리버가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하며 키득키득 웃곤 했다.

그래서 아서의 모습도 보기가 좋았다. 그에게 아카데미 시절이 정말 즐거웠다는 뜻이니까.

“마법부와 일반부의 수업도 달라서 낮에는 모이기가 어려웠어.”

“마법부였어요?”

“그래. 마법 장학생이었지.”

“어떻게 만났어요?”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머니가 아카데미에 다닐 때는 여자와 남자, 귀족과 평민이 듣는 수업이 달랐다고 한다.

네 사람이 어떻게 만난 걸까. 어머니와 공주님은 말동무였으니 아카데미 들어가기 전에 이미 친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서는? 그리고 네 사람은?

“윌리엄과 만난 건 이 게임 때문이었지. 아카데미에서 시합을 열었거든. 윌리엄이 이등이었어.”

“일등은 당신이군요.”

정답이었나 보다. 아서가 활짝 웃었다. 그는 게임판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비밀이라도 이야기하듯 내게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진짜 일등이 누군지 아니?”

모르겠다. 내가 고개를 흔들자 아서는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제네비브였지. 우리 중에 그녀를 이긴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아무도요?”

“뭐, 세이마리아는 아예 상대도 안 됐지만 말야.”

그건 그랬을 것 같다. 나는 아서와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니는 이런 게임을 별로 안 좋아하신다. 몸을 움직이는 건 잘하시지만 앉아서 말을 움직이거나 카드를 고르는 게임은 늘 지루해하셨다.

“제네비브 공주님이 그렇게 잘하셨을 줄은 몰랐어요.”

“오, 잘했지. 아주 잘했어. 나와 밤새 이 게임을 한 적도 있단다. 새벽이 될 때까지 나는 그녀를 고작 두 번 이겼어.”

신기하네. 나는 정리한 말을 쳐다보며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릴 때 아버지가 내게 이 게임을 가르쳐 주셨다. 그때 어머니가 제네비브 공주님도 이 게임을 좋아했다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하지만 그 정도로 잘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네비브 공주님이 보고 싶으세요?”

아서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보고 싶을까? 잘 모르겠다. 어머니는 보고 싶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서는 상황이 다르잖아.

“보고 싶지. 보고 싶어.”

아서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련한 목소리에 가슴이 좀 아파지려는데 그의 눈이 번쩍이는 게 보였다.

이상하다.

다시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서가 다르게 보였다.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심정을 감추기 위해 물었다.

“공주님과 만날 생각은 안 해 보셨어요?”

“어떻게 만나겠니?”

아서는 툭 내뱉더니 곧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만나면 사과하고 싶어. 그녀가 날 찾을 때 가지 않았던 걸.”

가지 않았던 게 아니다. 아서가 말했다. 제네비브 공주님과 내 부모님이 그를 찾았을 때 그는 이미 마법사의 탑에 끌려간 뒤였다고.

“하지만 그건 당신 탓이 아니었잖아요.”

나는 아서를 위로하기 위해 말했다. 아서는 일부러 나를 데리러 오지 않은 게 아니었다. 마법사의 탑에 끌려가서 연락할 수가 없었던 거지.

그는 내 위로에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제네비브는 내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겠지.”

“편지를 쓰면 어때요?”

제네비브 공주님 아니, 뉴커크의 왕비님께 편지를 보내면 어떨까. 어머니는 제네비브 왕비님께 편지를 보낸다. 얼마나 자주 보내는지는 모르겠지만 신년이면 늘 새해 인사를 위해 편지를 보내시는 걸로 알고 있다.

물론 제네비브 왕비님이 그 편지에 항상 답장을 하지는 않는다. 바쁜 분이니까.

하지만 가끔 답장 대신 작은 선물 같은 게 올 때가 있어서 그분이 어머니의 편지를 본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니, 안 될 거야.”

아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편지도 안 된다고? 물론 왕비님이니까 위험한 마법 같은 게 걸려 있지는 않았는지 확인할 수는 있다. 하지만 편지 자체를 막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내용도 좀 두루뭉술하게 쓰면 되지 않을까? 저쪽은 아서가 누군지 모를 테니까.

하지만 아서가 말하는 건 뉴커크가 아니었다. 그는 입술을 비틀며 말을 이었다.

“아직도 왕궁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거든.”

“어, 어떻게 알아요?”

왕궁에서 아서를 지켜보고 있다고? 정말?

나는 생각하지 못한 사실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왕궁에서 아서를 지켜보고 있다면 나와 아서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말일 텐데?

“다들 이상한 이유로 날 고용하기를 거부하더구나.”

이게 무슨 소리야? 아서의 말은 꼭 직업을 구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

잠시 뒤, 나는 그의 말 그대로라는 것을 깨달았다. 직업을 구할 수 없구나. 생각해 보면 나와 달리 아서는 평민이라 일을 해야 한다. 귀족처럼 영지에서 나오는 돈이 있지 않은 것이다.

“오, 죄송해요.”

나는 당황해서 허둥지둥 사과했다. 일이라니 생각도 안 해 봤다. 심지어 나도 일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누군가를 고용하는 입장이었지 고용되는 입장이었던 적이 없다. 클럽에 아서를 고용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금세 그 생각을 철회했다.

우리 클럽에 마법사는 필요 없다. 게다가 처음 시작한 배와 같은 규칙으로 운영되고 있다. 드나드는 사람은 모두 여자일 것.

“직장이 필요하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추천장을 써 드릴게요.”

“아냐, 아냐.”

아서는 손을 흔들며 나를 안정시켰다. 그는 당장 펜과 종이를 가져오려 일어난 내게 앉으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돈이 필요해서 일을 하려는 게 아냐. 이래 봬도 이 한 몸 건사할 정도의 돈은 있단다. 마법사의 탑에선 돈 쓸 일이 없어서 말야.”

나는 반사적으로 아서의 단출한 의상을 쳐다봤다. 지난번에 왔을 때와는 다른 옷이다. 하지만 고급스럽거나 한 건 아니다.

내 시선을 느낀 아서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검소하게 살면 평생 먹고살 걱정은 없단다.”

그건 다행이다. 나는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아서 역시 나처럼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다시 상아탑으로 들어가는 게 나을 수도 있겠어.”

“상아탑으로요?”

나는 그가 다시 상아탑으로 들어갔다가 못 나올까 봐 걱정돼서 물었다. 상아탑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감금돼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상아탑에는 자기 의지로 나오지 않는 사람과 허가받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너를 자주 못 보는 건 아쉽지만 여기서는 내가 너무….”

아서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단어를 떠올리는 것처럼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무력하게 느껴지거든. 걱정 말거라. 이번엔 지난번과 다르니까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나올 수 있겠지.”

맙소사. 우리는 만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 아직 묻고 싶은 것도 많고 아서를 좀 더 알고 싶다. 나는 조급한 마음에 물었다.

“다른 데서 일하면 안 되나요? 제가, 제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엘리엇에게 부탁하면 어떨까? 그는 여러 개의 사업을 가지고 있다. 그중 용병단도 활동 중이라고 들었다. 용병단이라면 마법사가 필요할 테고 위험하지 않은 일을 부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가 아는 사람이 왕궁에 미움받을 수도 있단다. 네게 그런 피해를 끼칠 수야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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