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47 – 3
날이 쌀쌀했지만, 햇빛이 강해서 그리 춥지 않았다. 두 사람은 비스컨 저택의 정원으로 나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관리가 쉽도록 하기 위해 깔아 둔 돌바닥이 햇빛을 받은 덕에 그리 차갑지는 않았다. 유제니는 벌써 나무가 울긋불긋하게 옷을 갈아입은 것을 보고 작게 감탄의 한숨을 내뱉었다.
“괜찮은 사람 같다고요?”
말없이 정원을 반 바퀴 걸은 엘리엇이 불쑥 물었다. 아서가 괜찮은 사람 같다고 말한 것에 대한 질문이다. 유제니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제게 바라는 게 없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음….”
그리고? 엘리엇은 유제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날이 쌀쌀해지면서 색색으로 물든 나뭇잎이 하나둘 나무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당신과 결혼할 거면 자신의 존재를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거라고 했고요.”
아서가 그런 말을 했을 줄은 몰랐다. 엘리엇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고 유제니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말만 들어서는 그녀의 말대로 괜찮은 사람 같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말할 때 유제니의 표정을 봤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거군요.”
엘리엇은 나직하게 말했다. 아서가 괜찮은 사람 같다고 말할 때 유제니는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그의 말에 정곡을 찔린 유제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은 사람 같다. 아서와의 대화를 떠올려 보면 그렇다.
하지만 그와 같이 있을 때는 전혀 편안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불편했어요. 객관적으로 좋은 사람 같은데도요.”
어쩌면 그건 아서의 문제가 아니라 그녀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아서의 등장으로 유제니는 더 이상 레이디 비스컨이 아니게 된 거니까.
비스컨 백작의 딸이 아니라 평민의 딸이 되는 거다. 그가 아무리 비밀로 해 주고 유제니가 말하지 않는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이 아서 브라이트라는 평민의 딸이라는 걸 안다.
“그가 당신의 약점이 될 것 같습니까?”
엘리엇이 물었다. 귀족 아가씨에게 평민 아버지가 있다는 건 확실하게 약점이다. 그녀가 결혼 전이라면 구혼자가 도망칠 만한 사건이니까.
하지만 엘리엇은 상관없었다. 그는 이미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의 이름은 상관없다고. 레이디 비스컨이 아니라 그냥 유제니여도 상관없다.
하지만 유제니가 아서의 존재를 불편해한다면 그를 처리하면 된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도록, 유제니의 눈과 귀에 들어오지 않도록.
“아닌 척했는데 저도 속물이었나 봐요.”
유제니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리고 나뭇잎이 떨어져 내린 나무에 다가가 손바닥을 댔다. 지금 나뭇잎이 다 떨어져도 내년 봄이 되면 다시 새잎이 날 거다.
그녀는 생명의 그런 점이 참 경이로웠다. 환경에 맞춰 자신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게. 그리고 뭔가를 남긴다는 게.
사람은 누구나 어느 면에서 속물인 법이다.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려다 말았다. 그는 유제니의 맞은편으로 돌아서서 그녀가 손을 짚은 나무에 자신의 손을 댔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친아버지가 부끄럽습니까?”
“그건 아니에요.”
유제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서는 열심히 살았다. 그가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그렇다. 유제니가 태어나기 전에 상아탑에 잡혀가서 거기서 연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올해 초가 되어서야 밖에 나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아서는 그게 아마 자신이 늙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유제니는 그게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그래서 아서가 부끄럽지 않다고 말한 건 아니다. 그녀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나는 아서와 아무 사연이 없는걸요. 그를 부끄러워하거나 자랑스러워할 만큼 아는 사이가 아니에요.”
누군가를 부끄러워하거나 자랑스러워하려면 함께 지낸 세월이 있어야 한다. 유제니에게 아서는 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타인을 부끄러워할 수는 없는 법이고.
“하지만 그가 우리 관계를 비밀로 하자고 했을 때 안심했어요. 사람들이 수군거릴 걸 생각하니….”
지긋지긋했다. 끔찍하기도 했고.
“죄송합니다.”
엘리엇은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유제니에게 말했다. 놀라서 고개를 든 그녀는 그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뭐가요?”
“제가 알았다면 좋았을 테니까요. 제 불찰입니다.”
“당신이 모든 걸 알 수는 없죠.”
당연한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유제니 앞에서 엘리엇은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다.
유제니의 비밀까지도. 그녀를 위해 비밀을 감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꿈에 대해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던 거다.
하지만 결국 유제니는 꿈의 대부분을 알았다. 엘리엇은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솔직하게 말했을 때의 유제니는 믿지 않았는데 정작 숨기려 한 지금은 그녀가 알게 되고 믿는다는 게.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엘리엇은 나무에 삐딱하게 어깨를 기대며 말했다. 그의 몸이 삐딱하게 기울어도 여전히 유제니는 그의 가슴팍에나 온다. 그래서 엘리엇은 고개를 숙여야 했다.
“사람들이 당신의 출생으로 수군거리는 게 싫다면 더 큰 가십을 던져 주면 되죠.”
더 큰 가십이라는 말에 유제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출생의 비밀보다 더 큰 가십이 어디 있어? 엘리엇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씩 웃었다.
“제 출생의 비밀은 어떨까요.”
유제니는 엘리엇의 제안에 놀라 그대로 굳었다. 지금 그녀를 위해 자신의 비밀을 사람들 앞에 내놓겠다는 건가?
확실히 나라를 구한 영웅이 사실은 후작의 사생아라고 하면 시끄럽긴 할 거다. 엘리엇을 향한 관심은 극에 달하겠지.
다정한 제안에 유제니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다정하지만 큰 문제가 있다.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사람들은 누군가의 신분 상승보다 추락을 더 재미있어하거든요.”
엘리엇의 가십은 유제니의 가십에 묻혀 버릴 거다. 그는 그녀의 말이 맞다는 걸 알았다. 늘 그렇다. 사람들은 미담보다 추문을 더 좋아한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도 있다. 유제니의 가십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녀를 보호할 수는 있다. 엘리엇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번즈 백작 부인이 되시는 건 어떻습니까?”
유제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물었다.
“지금 청혼하는 건가요?”
“아닙니다.”
단호한 말이 재빨리 흘러나왔다. 절대로 아니다. 엘리엇은 이런 곳에서 어영부영 청혼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자세를 고치며 말했다.
“그런 방법도 있다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청혼은 당신이 준비됐을 때 할 겁니다.”
그리고 좀 더 완벽한 곳에서 할 것이다. 비스컨 저택의 정원도 그런대로 괜찮지만 엘리엇은 좀 더 완벽한 곳이길 원했다.
유제니는 엘리엇의 진지한 말에 눈을 깜빡였다. 그가 청혼에 대해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유제니의 상황을 생각해서 결혼하자는 말은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는 사람에게 매번 거절하기란 미안한 일이다. 유제니는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뭐라고 대답할지 알겠지요?”
“아니요.”
알고 있다. 하지만 엘리엇은 모른다고 답했다. 그가 아는 유제니는 거절할 것이다. 그와의 결혼으로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다고 하겠지.
하지만 그는 그런 식으로 유제니의 행동을 제한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일을 하려 했을 때 자신의 원래 성격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하지 않았으면 했다.
“전투에 패해서 물러날 때 그걸 도망치는 거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다음 전투를 위해 후퇴하는 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고마워요.”
유제니는 엘리엇의 다정한 설득에 한숨을 내쉬었다.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무엇을 하건 지지해 주겠다는 사람이 곁에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입을 다물진 않을 거예요. 괜히 당신만 휘말리겠죠.”
이미 그가 그녀에게 구혼한다는 사실만으로 사람들은 엘리엇에 대해 떠들어 댈 거다. 유제니는 그 사실을 깨닫고 콧잔등을 찡그렸다.
엘리엇은 사람들이 감히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걸 어떻게 완곡하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감히 유제니의 출생에 대해 떠드는 놈들은 커센 가처럼 처리하면 된다.
하지만 커센 가의 처리는 물론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다는 건 유제니에게 비밀이다. 그가 좀 더 그럴듯한 거짓말을 떠올리는 사이, 유제니가 말했다.
“그러니 한동안 나와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생각에 잠겨 있던 엘리엇의 눈동자가 유제니를 향했다. 그는 뚫어져라 그녀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소풍 준비는 잘되고 있습니까?”
소풍? 유제니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엘리엇이 다시 말했다.
“더 추워지기 전에 소풍을 가자고 하셨잖습니까. 간단하게 음식을 준비해서요.”
그랬다. 유제니는 얼마 전에 가까운 사람들을 모아 소풍을 가야겠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뒤로 많은 일이 있어서 잊어버렸다.
소풍이라니.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런 여유로운 생각을 했었다는 게 아주 먼일처럼 느껴진다. 유제니는 과연 소풍을 갈 수 있겠냐고 말하려다가 정신을 차렸다.
지금 엘리엇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겠다.
“말 돌리지 말아요.”
엘리엇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 돌린 게 아니라 못 들은 척한 거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먹히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일시적인 절교 선언을 먼저 해 본 사람으로서, 효과가 없었다는 걸 알려 드리죠.”
유제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예전에 그도 그녀에게 한동안 만나지 않겠다고 한 적이 있다. 그걸 유제니가 보란 듯이 무시했었고.
엘리엇은 말을 잃은 그녀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 귀엽다. 그는 그녀가 설득당하길 바라며 다시 말했다.
“전 휘말리지 않습니다. 당신을 보호할 수 있고요. 그러니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엘리엇과의 결혼을 생각해 보라는 말에 유제니의 콧잔등에 주름이 생겼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고마워요. 하지만 도망치지 않을래요.”
“도망치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방어하는 겁니다. 유제니, 저는 당신의 방패입니다. 당신이 사용하지 않을 뿐이죠.”
방패처럼 사용해 달라는 말에 유제니는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엘리엇의 뺨을 잡아당겨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방패는 키스할 수 없잖아요.”
장난스러운 말에 엘리엇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그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그가 방패가 아니라 사람이라 다행이다. 가만히 서서 그녀가 사용하길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까.
엘리엇은 유제니의 뺨과 목을 감쌌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