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47 – 2
“유제니의 친아버지?”
번즈 저택의 응접실에 앉은 클레어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 엘리엇이 갑자기 초대를 하길래 무슨 일인가 했다. 그런데 전후 설명도 없이 유제니의 친아버지를 아느냐고 묻는다.
그녀는 엘리엇에게 예절이라는 게 혹시 유제니 앞에서만 쓰는 모자 같은 게 아닐지 고민했다. 그러자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올리버가 설명했다.
“얼마 전에 갑자기 유제니의 친아버지라는 사람이 나타났거든. 당신 꿈에서 보거나 들은 적이 없을까 해서 말야.”
유제니의 친아버지가 나타났다고? 클레어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유제니에게 친아버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제니는 비스컨 백작 부부의 친자식이 아니다. 그녀를 낳은 사람은 뉴커크의 왕비인 제네비브 공주고, 공주가 유제니를 낳았다면 남자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론상으로는 유제니에게 친아버지라는 사람이 존재한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못 한 이유는 꿈에서나 지금이나 유제니의 아버지라는 존재가 워낙 희미하기 때문이고.
“글쎄요.”
클레어는 기억을 더듬으며 올리버와 엘리엇을 쳐다봤다. 완전히 다른 인상을 가진 두 남자가 그녀의 눈앞에 앉아 있는 게 마치 다시 꿈으로 돌아온 것 같아 조금 불쾌해졌다.
“전 비스컨 백작님도 본 적이 없는데요.”
클레어의 지적에 엘리엇의 시선이 올리버를 향했다. 그러게. 그도 유제니의 아버지라는 사람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올리버는 갑자기 들어온 지적에 턱을 쓸며 말했다.
“아버지는 수도를 안 좋아하셔.”
그래서 그렇다. 비스컨 백작은 수도를 안 좋아한다. 같이 올라가자는 아들의 말에 백작이 그렇게 말했다.
수도의 뭔가를 무서워한다는 느낌이었는데. 올리버는 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수도를 안 좋아한다기보다는 무서워한다는 느낌이었다.
“너무 번잡스럽긴 하지.”
클레어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녀도 수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꿈에서 갓 깨어났을 때는 이 도시에서 싫어하는 인간들을 마주쳐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싫었다.
모든 사람이 수도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 엘리엇 역시 수도가 싫다는 비스컨 백작을 이해했다.
항간에는 연이은 사업 실패로 수줍은 많은 비스컨 백작이 사람들을 피한다고 한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고.
클레어는 유제니에게 들은 비스컨 백작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말수가 적다고 했다.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산책을 하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그렇다면 올리버의 저 사람 좋아하는 성격은 비스컨 백작 부인을 닮은 모양이군.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가 자신이 올리버를 생각했다는 사실에 반사적으로 놀라 자신의 다리를 때렸다.
“왜 그래?”
갑자기 ‘짝!’ 하는 소리에 클레어를 돌아본 올리버가 물었다. 이런. 클레어는 허둥지둥 말했다.
“어, 수도를 안 좋아하시다니,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하시나 보지?”
“별로 안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올리버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도 정확하게는 모른다. 하지만 사람을 안 좋아하냐는 질문을 들으니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진지해지자 엘리엇과 클레어도 무슨 일인가 하고 올리버에게 집중했다.
“내가 아카데미에 들어갈 때 아버지가 날 불러서 몇 가지 조심해야 할 것들을 일러 주셨거든.”
처음엔 평범한 것들이었다. 시간을 엄수하고 선생님들께 예의를 지켜라. 학비가 아깝지 않도록 공부 열심히 해라. 옷차림을 바르게 해라.
하지만 잠시 입을 다물었던 아버지가 다음에 한 말은 지금 생각해도 이상했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조심하라고 하셨어.”
생각해 보니 비스컨 백작은 누군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올리버는 그가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잠시 시선을 교환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분위기는 매우 기묘했다.
“내가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걸 반기지 않으셨고.”
“유제니는 아카데미에 들어가지 않았고.”
클레어가 말했다. 레이디 비스컨이 아카데미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사교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귀족 대부분이 자기 자식을 아카데미에 보내기 때문에 좀 특이하다는 반응이었고.
지금까지 클레어와 올리버는 그냥 비스컨 백작 부인이 고지식한 사람이라 그렇다고 생각했다. 나이 든 귀족 중에 귀족이라면 모름지기 집에서 가정 교사에게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비스컨 백작 부부에게 위협을 느낄 정도의 적이 있었다면? 그래서 비스컨 백작이 수도를 피하고 유제니를 아카데미에 보내지 않은 거라면?
클레어와 올리버는 동시에 안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때, 엘리엇이 말했다.
“그게 유제니가 태어나는 데 일조한 남자라고?”
올리버는 엘리엇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클레어는 인상을 썼다. 친아버지라는 말을 어렵게도 한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잘 모르겠다. 비스컨 백작 부부가 수도에서 누군가를 무서워한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왜 유제니의 친아버지를 무서워한 걸까.
“아, 우리 부모님이 무서워한 사람이 유제니의 친아버지라는 거지?”
한 박자 늦게 이해한 올리버가 입을 열었다. 그는 인상을 쓰며 덧붙였다.
“친아버지라고 하면 되지. 왜 그렇게 어렵게 말해?”
딱 클레어가 한 생각이다. 클레어는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돌렸고 올리버는 인상을 쓰며 물었다.
“유제니의 친아버지를 왜 무서워해?”
그래 봤자 평민이다. 유제니가 태어났을 때 연락도 안 된. 그건 아서도 인정했다고 들었다. 오히려 비스컨 백작 부부에게 고마워해야 하지 않나?
하지만 엘리엇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유제니를 빼앗길 거라 생각했을 수도 있지.”
생각하지 못한 지적에 올리버와 클레어의 눈이 커졌다. 아서가 유제니를 데려가겠다고 주장하면 보내 줘야 하는 건가? 올리버는 당황해서 말했다.
“데려갈 거면 왜 이제 와서 연락한 건데?”
유제니가 태어났을 때 비스컨 백작 부부의 연락을 무시한 자다. 설령 당시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무시했다 해도 그 뒤는?
성인이 되고도 한참 지난 딸을 이제야 데리러 왔다고? 말도 안 된다.
올리버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엘리엇과 클레어는 그게 맞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키우는 데는 돈이 든다. 많은 책임도 필요하다.
“더 이상 손이 안 가니까.”
클레어의 지적에 올리버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몇 가지 반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유제니는 어릴 때도 손이 많이 안 가는 아이였다. 물론 잔병치레가 있었지만 자기 할 일을 똑 부러지게 해냈다.
그래서 올리버는 유제니가 자랑스러웠다. 가끔 짜증 났지만.
“틀렸어.”
잠시 생각하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손이 안 간다는 두 사람의 말은 일부만 맞다. 그 손이라는 게 어떤 거냐에 따라서.
“유제니는 아직 레이디 비스컨이지. 그 말은 그 애가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말이고.”
귀족 아가씨라면 결혼할 때 지참금을 가져가야 하는 법이다. 아서가 유제니를 데려가겠다고 주장한다면 그녀의 지참금도 그가 지불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올리버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엇을 쳐다봤다. 유제니가 비스컨 백작 부부의 딸이 아니라 평민 마법사의 딸이라는 건 신분 하락을 의미한다.
그녀가 레이디 비스컨이기 때문에 결혼하려는 사람이라면 결혼하지 않으려 하겠지.
놀랍게도 그는 유제니가 한 생각과 같은 생각을 하며 말을 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감추는 대신 돈을 요구할 수도 있고.”
글쎄. 엘리엇은 올리버의 추측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 추측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만약 아서가 정말 그럴 요량으로 유제니를 찾았다면 비스컨 저택으로 오지 않았겠지.
“괜찮은 사람 같아.”
그날 저녁, 다시 비스컨 저택에 모인 세 사람은 올리버의 추측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그들이 없을 때 아서를 만난 유제니가 괜찮은 사람 같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냥 대화만 하자고 했다고?”
믿을 수 없어 하는 올리버를 향해 유제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라 했다. 태어나고 한 번도 보지 않은 딸에게 뭔가를 바라는 건 염치없는 짓이라고.
어쩌면 정말 좋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클레어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꿈에서 아서의 존재를 몰랐다는 게 신경 쓰였다.
“꿈에서는 어땠어요?”
그때, 유제니가 클레어에게 물었다. 이미 엘리엇에게는 물어봤다. 꿈에서 아서를 본 적이 있는지.
“당신의 친아버지 말이죠? 글쎄요.”
클레어는 입술을 늘리며 생각했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친아버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한 번은 농담처럼 여자 혼자 낳았다고 말한 적은 있어요.”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말했다. 자신은 여자 혼자 낳은 존재라고.
“여자 혼자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유제니의 눈이 동그래졌지만 엘리엇은 아니었다. 그 역시 비슷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신이, 음….”
거기까지 말하던 클레어가 입을 다물었다. 여자 혼자 낳았다는 말 때문에 진짜로 유제니가 마녀가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었다.
“왜요?”
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아서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유제니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산책 좀 할까요?”
가만히 자리를 지키던 엘리엇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는 신호에 유제니는 클레어를 쳐다봤다.
“라넌 경은 나와 이야기하지.”
재빨리 올리버가 나섰다. 오라버니가 클레어와 대화를 한다고? 유제니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의 오라버니가 드디어 철이 들어 손님 접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