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47 – 1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며칠 뒤, 나는 응접실에서 아서를 맞이했다. 사정을 설명한 편지는 영지로 보냈다. 엘리엇이 마법 전보를 보내 주겠다고 했지만, 아버지의 영지에 그런 걸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마법 전보라는 건 받는 사람이 마법사일 필요는 없지만 그게 마법 전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과연 부모님이 엘리엇이 보낸 마법 전보를 알아보실까.
올리버와 의논 끝에 우리는 가장 빠른 특급으로 보냈다. 도착하는 데 며칠 정도 걸리겠지.
그 전에 아서가 원하는 게 뭔지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귀족으로 자란 다 큰 딸을 찾아온 사람이다. 어쩌면 그저 내가 보고 싶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죄책감에 가슴이 따끔따끔하게 아팠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특히나 지금처럼 내가 엘리엇과 약혼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 때라면 더더욱 그렇다. 입 다물어 줄 테니 돈을 달라고 할 수도 있겠지. 이 사람은 엘리엇이 내가 부모님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걸 안다는 걸 모르니까.
“아니, 초대해 줘서 내가 더 고맙지.”
아서는 친절하게 대답하고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 입었던 옷과 같은 옷이다. 나는 그의 옷이 깔끔한 것을 확인하고 찻잔을 들어 올렸다.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남자는 나를 키우지 않았다. 그런데 친부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옷차림이 내게 중요하게 여겨진다.
어딘가에 방문할 때 옷차림을 깔끔하게 할 정도의 예의를 가진 사람이라는 게 나를 조금은 안심하게 했다.
“수도에 사시나요?”
나는 여상하게 질문을 던졌다. 오는 길이 불편하진 않았는지, 어디에 살고 있고 무슨 일을 하는지.
아서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러면서 중간중간 그도 내게 질문을 던졌다. 부모님과, 그러니까 비스컨 백작 부부와 내 사이가 어떤지 같은 것들.
“마법사라고요?”
“지금은 보잘것없지만.”
무슨 일을 하냐는 질문에 아서는 마법사라고 대답했다. 마법사라니,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다. 그러고 보니 그는 왕궁에서 가끔 지나치며 본 마법사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마르고 창백한 외모. 약간 예민해 보이는 인상 같은 게.
젠장, 그건 내 인상이기도 하네.
나는 확실히 아서와 내가 닮았다는 걸 인정했다. 창백한 피부가 닮았다. 그 외에 또 뭐가 닮았을까. 조용해 보이는 인상도 닮은 것 같다.
“눈동자와 머리카락 색은 네 엄마를 닮았지.”
아서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재빨리 시선을 떼며 사과했다. 너무 뚫어져라 쳐다본 모양이다.
“실례했습니다.”
“아니, 괜찮아. 이렇게 시간이 지나서 갑자기 아버지라며 찾아왔으니 걱정도 되고 의심스럽기도 하겠지.”
내 생각을 정확히 꿰뚫는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 그대로다. 혹시 내가 생각이 잘 읽히는 편인가?
“걱정 말렴. 그저 네가 보고 싶었을 뿐이니까. 아비로서 네게 해 준 게 아무것도 없잖니. 내가 무슨 자격이 있겠니?”
이어진 아서의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정말로 내가 자라는 데 한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래도 기대하는 게 있으실 텐데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비단 돈을 요구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태어나서 처음 만난 딸과 아버지다. 묻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겠지.
아닌가?
나는 많다. 아서를 만나기 전에 묻고 싶은 게 끊임없이 떠올랐다. 내 친어머니가 제네비브 공주님이라면 어디서 어떻게 만난 건지, 내가 태어난 뒤 왜 연락이 되지 않았는지.
내가 그에게 바라는 건 그런 의문을 해소해 주는 거다.
“기대라.”
아서는 자신의 뾰족한 턱을 쓰다듬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도 나이가 있어서 말이야. 아마 내 자식은 너 하나뿐이겠지.”
머릿속에 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부양해 달라는 건 아니겠지?
“가끔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어. 아버지와 딸로서.”
응?
생각하지 못한 부탁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부양해 달라는 게 아니라 가족으로 가끔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는지 아서가 쓰게 웃으며 덧붙였다.
“아마 어색하겠지. 우리는 모르는 사이나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가끔 만나서 네 어머니 이야기도 하면 어떨까?”
어머니 이야기를 하자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제네비브 공주님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물론 어릴 때부터 어머니께 이야기를 들었다. 아주 똑똑하고 책임감 강한 분이었다고. 예의범절도 완벽하고 주변 사람을 아끼는 좋은 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친구로서의 이야기고 연인으로서는 좀 다를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쩌면.
머릿속에 어머니가 내게 내 출생의 비밀을 숨겼다는 게 떠올랐다. 왜 숨겼는지는 이해한다. 내가 비스컨 가의 사람으로 자라는 게 낫다고 생각하셨겠지.
하지만 그래서 나는 제네비브 공주님의 공주로서의 일화만 들었다. 어쩌면 아서는 날 임신했을 때 어머니로서의 일화를 이야기해 줄지도 모른다.
“괜찮을 것 같네요.”
나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침착하게 말했다. 어쩌면 아서가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전에 왜 나를 부모님께 남겨 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묻자 아서는 뭐든 물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를 만난 뒤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궁금증을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왜 부모님의 편지에 연락하지 않았나요? 저를….”
“왜 네 부모님에게 남겨 두고 만나러 오지 않았냐는 거지?”
아서도 내 부모님을 부모님이라고 지칭했다. 다행이군. 그가 내 부모님이 나를 키웠다는 걸 인정한다는 뜻이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인상을 쓰며 말했다.
“누가 내 편인지 알 수가 없었거든. 제네비브 공주님은 뉴커크로 시집갈 사람이었잖니. 나는 그녀를 건드린 나쁜 놈이고.”
솔직히 말하면 나도 반쯤은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반은 과연 그게 공주님의 책임이 없겠냐는 생각이다.
제네비브 공주님은 뉴커크의 왕자와 약혼한 상태였다. 자기 행동에 책임을 졌어야 한다는 말이다. 가장 좋은 건 아서를 만나지 않는 거였겠지.
“그래서 한동안 몸을 숨겨야 했다. 너를 데리러 가고 싶었지만….”
잠시 망설인 아서는 나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데리러 가고 싶었지만? 나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가 내 편인지 알 수가 없었거든. 그리고 윌리엄과 세이마리아가 널 잘 보살펴 줄 거라 믿었고.”
“지금까지 숨어 있었던 건가요?”
제네비브 공주님이 나를 낳고 숨어 지냈다는 건 억지로 이해하자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보고 싶었다면서 지금까지 만나러 오지 않았다는 건 이해가 안 된다.
내 질문에 아서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법사의 탑에 갇혀 있었지. 올해가 돼서야 풀려났고.”
아서는 결국 잡혀서 마법사의 탑에 갇혀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카데미에서 성적이 좋아서 마법사의 탑으로 오라는 제의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제네비브 공주님과의 일로 왕궁에서 그를 잡아 마법사의 탑에 가뒀고 거기서 이런저런 연구를 도왔단다. 그리고 올해 풀려났다고.
문득, 베라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가 아는 점술가는 상아탑에 갇혔다가 풀려났다고 했다. 상아탑. 마법사의 탑을 부르는 또 다른 명칭이다.
하지만 베라가 아는 그 점술가는 몇 년 전부터 하몬 경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아서가 마법사의 탑에서 빠져나온 건 올해였고.
“마법사의 탑에 잡혀서 일하는 사람이 많나 봐요?”
“마법사의 탑이라는 곳이 자의든 타의든 연구에 몰두하는 사람이 많지.”
아서의 동의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곳이라고 들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학자, 마법사들이 갇혀서 연구를 한다고.
“말이 탑이지 작은 마을이라면서요?”
우리의 대화는 마법사의 탑으로 향했다. 아서는 내가 궁금해하는 것에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고.
“그러고 보니 소문에 어떤 남자의 구혼을 받는다던데.”
한참 대화를 나누다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며 자리에서 일어난 아서가 물었다. 슬슬 올리버가 돌아올 때가 됐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엘리엇이 나온 순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고 하던데. 내 존재를 모르지?”
그렇게 말한 아서는 잠시 말하기를 망설였다. 엘리엇에게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싶다면 대가를 달라고 하려는 걸까.
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망설이던 아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구나.”
응?
이건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의 존재를 밝히지 말라는 아서의 말에 나는 이번에도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했다.
“네가 비스컨 백작가의 양녀인 것보다 친딸인 편이 결혼할 때도 유리할 테고.”
“괜찮아요.”
가슴이 조금 아프다. 나를 생각해서 자신의 존재를 비밀로 하려 한다는 게. 나는 엘리엇이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려 했다.
지난번에 그가 왔을 때 엘리엇도 이 집에 있어서 알게 됐다고 말하면 되지 않을까.
내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아서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그러지 말자. 일단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자꾸나. 자세한 건 네 부모님과 만나서 이야기하고.”
부모님. 그제야 머릿속에 내 부모님이 생각났다. 두 분은 지금쯤 편지를 받으셨을까. 어쩌면 하루 이틀 걸릴지도 모른다.
“편지를 받고 오시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나는 혹시라도 아서가 기다릴까 봐 말했다. 아버지의 영지에 편지가 도착하고 그 편지를 받은 부모님이 짐을 꾸려 수도로 올라와야 한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열흘은 더 걸리겠지.
“그때까지 우리가 서로를 더 잘 알 수 있겠구나.”
아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역시 그를 따라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서가 내 손등을 두어 번 툭툭 두드린 뒤 떠나는 것을 배웅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그가 잡은 내 손을 들여다보았다.
“아가씨?”
현관 앞에 가만히 서 있는 게 이상했던지 빅스가 말을 걸었다. 고개를 들자 그의 뒤에 앤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게 보였다.
이상하다.
아픈 건 아니다. 하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아서가 내 손을 잡은 게 약간 불쾌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