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4화 (209/239)

214화. 46 – 5

“그래서 클레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고요?”

유제니는 쉽게 믿지 않았다. 그녀가 믿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말하지 않았다는 건 이해된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클레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엘리엇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쉽게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런 유제니가 좋다.

“또 하나는.”

엘리엇의 시선이 살짝 열린 문으로 향했다. 유제니의 시선도 그를 따라 문을 향했지만, 그는 그저 밖에 누가 있는지 확인했을 뿐이다.

아무도 없다. 유제니가 내려왔을 때부터 문밖을 지키던 집사는 그만 가서 쉬라는 올리버의 말에 떠났다. 유제니에게 문을 열어 두라고 말한 것 치고는 엘리엇은 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유제니뿐이라는 걸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당신이 원하지 않을 테니까요.”

어떤 걸? 유제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출생의 비밀과 출생의 비밀을 아는 것. 둘 중 어느 쪽을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는 걸까.

“출생의 비밀 말입니다.”

엘리엇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유제니라면 출생의 비밀 따위를 원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비스컨 백작가에서 태어나서 자란 걸 좋아했으니까.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고요?”

믿을 수 없다는 유제니의 말에 엘리엇은 말없이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녀가 원하지 않는 거라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일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했으면 한다. 그렇지 않아도 유제니는 오늘 충격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니까. 이렇게 서서 이야기하는 건 피곤할 거다.

엘리엇의 권유에 유제니는 어쩔 수 없이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언제든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도록 구두는 벗지 않았다.

“나는 당신이 고귀한 레이디가 되지 않길 바랐습니다.”

그는 맞은편 테이블에 걸터앉으며 입을 열었다.

“꿈에서 내가 불행했으니까요?”

정확한 지적에 엘리엇의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 꿈에서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는 동안 끊임없이 고통스러웠고 괴로워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고통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런 자리였으니까.

어쩌면 그녀의 죽음은 그녀가 바라 마지않던 일일지도 모른다. 그 생각은 지금까지도 그의 머릿속 한구석에 달라붙어 그를 괴롭히고 있다.

“그래서 나를 만나자마자 반지를 준 거죠?”

이어진 유제니의 질문에 엘리엇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라면 언젠가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릴 줄 알았다.

유제니는 엘리엇의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콧잔등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의 의도가 다정하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녀는 차를 마시고 싶다고 생각하며 다시 말했다.

“나는 당신 꿈에 나온 그 여자와 달라요.”

잠시 엘리엇이 멈칫했다. 어쩐지 그게 한 방 먹인 느낌이 들어서 유제니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무릎 위에 자신의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가족이 날 속였다거나 배제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유제니는 엘리엇이 자신의 반지를 준 의도를 이해했다. 그의 꿈에서 유제니는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와 혼자 왕족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반지를 준 건, 그녀의 곁에 그도 있다는 걸 기억해 달라는 뜻이었겠지.

“아마 꿈에서 나와 올리버가 반목한 모양이죠? 그래서 내가 외로워했고요?”

유제니의 질문에 엘리엇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제니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모르겠어요. 그런 상황이 오면 내가 올리버와 반목할지도요.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아니에요. 나는 가족들이 나를 진짜 비스컨으로 대했다는 걸 알아요.”

이건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엘리엇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떻게 압니까?”

다시 유제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확고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 미소에 엘리엇은 얼떨떨해졌다.

“전에 했던 이야기, 기억나요? 후계자 수업.”

기억난다. 엘리엇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비스컨 백작이 어린 올리버를 데리고 후계자 교육을 하자 어린 유제니가 따졌다고 했지.

올리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녀가 영지를 다스려야 하니까 당연히 그녀도 배워야 한다고 했다고 했다.

그건 단편적인 사건이지만 유제니에게는 비스컨 백작 부부에게 그녀가 친자식이었다는 증거였다.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매런 경도요.”

잠깐 엘리엇은 매런 경이 누군가 하고 생각했다. 그가 떠올리기 전에 유제니가 먼저 말을 이었다.

“올리버는 그자의 얼굴을 말 그대로 엉망으로 만들어 놨죠.”

기억난다. 클럽에서 감히 유제니에 대한 험담을 하다가 올리버에게 맞은 남자. 그 뒤로 파혼도 당했다. 엘리엇은 매런 경이 아직 살아 있을지 궁금증이 생겼지만, 재빨리 거뒀다.

소문이 잠잠해졌을 때 조용히 나라 밖에 버리고 왔다. 그의 능력이 그의 혓바닥만큼이라도 길다면 아직 살아 있겠지.

“당신도 그렇습니다.”

엘리엇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유제니가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안다. 그녀는 올리버를 구하기 위해 몇 명의 기사가 있는 저택에 혼자 침입했다.

“가족을 사랑하죠.”

약간은 씁쓸한 말투에 유제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말투네요?”

그렇다. 엘리엇은 유제니의 질문에 가만히 그녀를 쳐다봤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에게 가장 중요한 건 가족과 나라였다. 그 외의 사람들은 두 번째였고.

“제가 당신에게 반지를 드린 건.”

엘리엇은 거기까지 말하고 시선을 떨어트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유제니가 이해한 것처럼 그녀의 곁에 그가 언제나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기도 했다.

“당신에게 첫 번째가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고백에 유제니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귀여운 고백이기도 했다. 그녀의 첫 번째가 되고 싶다니.

하지만 그건 반지 하나로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유제니가 그렇게 말하려 했을 때 엘리엇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전에 당신이 말했잖습니까. 가문 외에 가진 게 하나도 없다고요.”

그랬다. 자연스럽게 유제니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엘리엇을 구하기 위해 들어간 저택의 지하실에서 그녀가 말했다. 가문 외에 그녀가 가진 게 하나도 없다고.

엘리엇은 붉어진 유제니의 얼굴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사람은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자신이 이룬 게, 가진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

그는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아니라고, 그가 그녀의 곁에 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녀의 것이 아니라 해도 그와 그가 가진 것은 유제니의 것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저와 제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의 출생은 아무 상관 없이요.”

유제니가 공주의 딸이 아니라 촌부의 딸이라 해도 상관없다. 그는 유제니가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당신 이름 앞에 무엇이 붙는지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유제니는 그냥 유제니면 됐다. 아니, 이름이 달라도 상관없다. 엘리엇은 유제니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는 유제니의 어떤 모습도 좋았다. 그녀가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되고 싶다면 그렇게 해 줬을 거다.

“내가.”

천천히 유제니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의문 반 심술 반으로 물었다.

“내가 만약 레이디 비스컨이 좋다고 하면요?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레이디 비스컨으로 살고 싶다면요?”

아무와도 결혼하지 않도 레이디 비스컨으로 살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에 엘리엇은 미소를 지었다. 상관없다. 그는 손을 내밀어 유제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자신 손에 잡힌 작은 손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당신이 번즈 백작 부인이 아니라면 레이디 비스컨인 쪽이 좋겠죠.”

그렇군. 유제니는 그녀의 손을 잡은 엘리엇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주 크고 굳은살이 박인 손이었다. 마디가 불거진 게 조금 거칠어 보이기도 했다.

그는 꿈에서도 이런 손이었을까. 문득 유제니의 머릿속에 호기심이 들었다. 그는 그녀에 대해 잘 아는데 그녀는 그렇지 않다는 억울한 생각이 다시 들었다.

“나는 좀 화가 나요.”

유제니의 느닷없는 선언에 엘리엇이 멈칫했다. 그는 몸을 숙여 유제니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하며 물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

그녀에 대한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것 때문에 화가 난다는 걸 이해한다. 화풀이를 하고 싶다면 엘리엇은 밤새도록 그녀에게 맞을 수 있었다. 모진 말을 해도 된다.

유제니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당장 나가서 드래곤의 심장을 가져오라면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당신은 나에 대해 잘 아는데 나는 당신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잖아요.”

유제니의 말에 엘리엇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비밀을 숨겨서가 아니라 그래서 화가 난다고? 다시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당신과 클레어가….”

거기까지 말한 유제니의 얼굴이 다시 달아올랐다. 엘리엇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싶은 것을 참으며 유제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유치하다. 유제니는 자기 생각이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클레어는 좋은 사람이고 좋은 친구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와 라넌 경이요?”

재촉하는 엘리엇에게 유제니는 분홍색으로 달아오른 얼굴로 내뱉듯이 말했다.

“같은 꿈을 꾼 것도 마음에 안 들어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엘리엇은 클레어가 왜 꿈을 꿨는지 모르니까. 하지만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마법사를 고용해서 둘 중 한 명의 기억을 지우겠습니다.”

“아, 아니, 내 말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들어줄 줄은 몰랐다. 유제니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엘리엇이 빙그레 웃었다. 그 표정에 그녀가 미간을 찡그렸다.

“진심입니다. 지금 당장 사람을 시켜 마법사를 알아보죠.”

“내가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잖아요.”

“하지만 저와 라넌 경이 같은 꿈을 꾼 게 싫다고 하셨잖습니까.”

엘리엇의 지적에 유제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게 싫은 건 아니다. 가끔 두 사람이 같은 꿈을 꿨다는 걸 생각하면 소외감이 든다.

물론 그녀는 이런 걸로 소외감을 느끼는 게 옳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두 사람이 어떤 꿈을 꾼지는 몰라도 유제니에 대한 어떤 트라우마가 있다는 건 아니까.

유제니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까 당신이 클레어를 두둔해서 조금 기분이 상했어요.”

엘리엇의 눈이 놀람으로 동그래졌다. 그는 유제니를 바라보다가 쥐고 있던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건 라넌 경을 두둔한 게 아닙니다. 당신을 위한 거죠.”

“라넌 경을 두둔한 게요?”

두둔한 게 아니라니까.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유제니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라넌 경이 당신의 편이라는 걸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저는 당신을 속였지만, 당신을 속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걸요.”

결국 유제니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었다는 거다. 그녀는 물끄러미 엘리엇을 바라보다가 몸을 내밀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깜짝 놀란 엘리엇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금세 그의 입술이 유제니의 입술을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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