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46 – 4
“올리버, 엘리엇.”
엘리엇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제니가 응접실에 나타났다. 어떻게 안 거지? 유제니의 발소리는 작아서 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엘리엇에게 묻기 전에 유제니가 물었다.
“어머니께 편지 썼어?”
“뭐?”
“편지 말야. 내 친부가 나타났으니 어머니께 알려야지.”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올리버는 멈칫하고 유제니의 안색을 살폈다. 평소보다 좀 더 창백하긴 하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이 어두운 장소에서 봤다면 유령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써야 내일 아침에 특급으로 보낼 것 같은데.”
어서 가서 어머니께 편지를 쓰라는 유제니의 독촉에 올리버는 눈을 깜빡였다. 이 녀석, 제정신인가?
하지만 그는 금세 유제니가 자신을 응접실에서 내보내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엘리엇과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은 모양이다.
올리버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유제니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직 번즈 백작에게 말할 필요는….”
“그는 알아.”
단호한 목소리가 유제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녀는 똑바로 서서 엘리엇을 바라보고 있었다. 올리버의 눈에 오히려 엘리엇이 유제니의 눈을 피하는 게 보였다.
“그는 다 알아. 그렇죠?”
다 안다. 유제니가 비스컨 백작 부부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걸. 그녀가 뉴커크의 왕비가 된 제네비브 공주의 사생아라는 걸.
엘리엇은 알았다. 모든 걸 알았다. 이런 순간이 오리라는 것도.
“안다고? 어떻게?”
올리버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물었다. 유제니가 비스컨 백작 부부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은 한 손에 꼽는다. 오늘 아서가 오기 전까지 올리버는 그와 부모님, 단 세 명만 아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올리버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엘리엇이 꿈을 꾼 자라는 것. 누가 왜 꾸는지 모르는 그 꿈은 지금 이 현실의 최악의 버전이었다.
“클레어도 아는 거죠?”
유제니의 질문에 엘리엇보다 올리버가 먼저 반응했다.
“클레어? 라넌 경도 안다고?”
그렇다. 엘리엇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클레어도 안다. 그녀도 꿈을 꿨으니까.
“꿈에서 내가 왕이었다고 했죠. 내 위로 왕위 계승자가 모두 죽었다고요.”
이번에도 엘리엇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올리버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이상한 꿈을 꾼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안다. 클레어가 그런 꿈을 꾼 사람 중 하나라는 것도 안다. 그 꿈의 내용이 아주 안 좋다는 것도 알았다. 드래곤의 침략으로 발시간이 멸망하기 직전이라고 했으니까.
꿈에서 발시간의 왕이 여자라는 소문도 들었다. 어떤 사람은 그 여자가 마녀라고 말하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유제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꿈이고 올리버는 말도 안 되는 개꿈이라고 생각했다.
그 꿈은 아주 잠깐 사람들 사이에 떠돌았지만 정작 그런 꿈을 꿨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가라앉았으니까.
“전부터 이상했어요. 내가 왕이 되려면 올리버도 없었어야 하니까요.”
유제니와 올리버도 왕위 계승권이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이야기다. 그녀가 왕이 되려면 국내의 귀족이 몇백 명쯤 죽고 국외의 귀족 몇 명까지 죽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클레어는 올리버를 싫어했고요.”
“어, 맞아. 꿈에서 내가….”
거기까지 말한 올리버가 입을 다물었다. 클레어는 그를 싫어한다고 했다. 그가 유제니의 죽음에 책임이 있기 때문에.
내가? 엘리엇은 올리버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제니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말은 꿈에서 내가 왕이 되고 나서도 올리버가 살아 있었다는 말이죠.”
유제니는 그게 계속 이상했다. 하지만 그건 꿈이고 그녀가 왕이 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국내외 귀족 몇백 명이 죽는다는 이야기니까.
그래서 깊게 물어보지 않았다.
“날 속였어요.”
유제니의 말에 처음으로 엘리엇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유제니가 먼저 말을 이었다.
“속인 게 아니라 말을 안 했을 뿐이라고요?”
“아닙니다.”
다행히 엘리엇은 그렇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유제니를 속이고 있었다는 걸 인정했다. 그녀가 공주의 사생아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애초에 꿈에서 유제니가 섭정이 된 이유가 그거였으니까.
유제니는 물끄러미 엘리엇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그가 자신을 속였다는 걸 인정했다는 게 마음이 놓였다.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면 더 실망했을 거다.
“라넌 경이 말하지 않은 건 제가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엘리엇은 클레어가 말하지 않은 이유도 설명했다. 모든 잘못은 그에게 있다. 그가 클레어를 설득했다. 정확하게는 협박에 가까웠지만.
엘리엇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제가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이야기하고 싶어 했습니다.”
혼란스러운 기분 속에서도 유제니는 엘리엇이 다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금 클레어의 편을 들고 있다. 이 상황에서 클레어는 아무 죄가 없다고.
놀랍게도 유제니는 그게 화가 났다. 내 앞에서 클레어를 두둔해? 당신이? 그녀는 엘리엇의 다정함이 화가 났고 눈치채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똑같이 말하지 않았는데 부모님과 올리버를 향한 분노보다 엘리엇을 향한 분노가 더 거세게 타올랐다. 유제니는 꼴도 보기 싫으니 썩 꺼지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가라앉히느라 입을 다물었다.
“유제니와 결혼하기 위해서 아냐?”
그때, 올리버가 물었다. 엘리엇과 유제니 둘 다, 그가 이 자리에 같이 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엘리엇이 고개를 돌리자 올리버가 다시 물었다.
“유제니가 왕족이 되면….”
거기까지 말한 올리버는 어깨를 으쓱하며 설명했다. 제네비브 공주님이 유제니의 친어머니라며? 그럼 유제니가 공주가 되는 거 아냐?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은 유제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엘리엇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올리버가 말을 이었다.
“네가 유제니와 결혼하기 힘들 테니까. 그래서 숨긴 거 아냐?”
유제니가 왕족이라는 게 밝혀지면 그녀가 공주가 될 테니 엘리엇과 결혼하기 힘들 거라는 말이다. 그래서 숨긴 거 아니냐는 올리버의 지적에 유제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공주라면 엘리엇은 훨씬 더 빨리 나와 결혼했겠지.”
어떻게? 올리버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유제니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나라를 구한 영웅이 대가로 공주와의 결혼을 요구하는 이야기, 몰라?”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다. 올리버는 “아!”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꽤 흔한 이야기다. 나라를 구한 영웅에게 왕이 상으로 공주와 결혼을 시키는 이야기. 동화 속 이야기 같지만,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나라를 지킨 평민 영웅과 귀족의 힘을 견제해야 하는 왕. 공주와 영웅을 결혼시키면 영웅으로 향하는 민심을 왕이 흡수할 수 있다.
꽤 괜찮은 거래인 것이다.
만약 엘리엇이 유제니의 출생의 비밀을 밝혔다면 이야기는 그렇게 진행됐을 게 뻔했다.
왕궁에서는 갑자기 생긴 공주를 처리해야 할 테고, 영웅에게 공주를 상으로 주는 건 고금을 아울러 통하는 방법이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왕과 영웅에게 괜찮은 거래지 공주의 의견 따위는 무시된 이야기다. 그 거래에 유제니의 의견이 들어갈 틈이 있을 리가 없다.
“어, 그럼 왜 말을 안 한 거야?”
어리둥절해하는 올리버를 쳐다본 엘리엇은 유제니 역시 그를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제가 유제니와 결혼하는 방법이지 유제니가 저와 결혼하고 싶어질 방법이 아니잖습니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유제니는 이해했고 올리버는 이해하지 못했다. 두 개가 뭐가 달라? 인상을 쓰는 올리버에게 엘리엇이 다시 말했다.
“제가 원하는 건 유제니의 사….”
다음 순간, 유제니는 손을 뻗어 엘리엇의 입을 막았다. 이 남자, 부끄러움도 없나?
“사?”
올리버가 물었다. 유제니는 입 다물고 있으라는 표정으로 엘리엇을 쳐다본 뒤 올리버를 돌아보며 말했다.
“편지 써야 하지 않아?”
“편지?”
그제야 올리버의 머릿속에 유제니가 쓰라던 편지가 떠올랐다. 유제니의 친아버지가 찾아왔으니 부모님께 알려야 한다.
그는 과연 응접실에 유제니와 엘리엇만 두고 떠나는 게 옳은 일인지 잠시 생각했다. 금세 올리버의 눈에 엘리엇이 유제니가 자신의 입을 막을 수 있도록 무릎을 굽힌 게 보였다.
“문 열어 두는 거 잊지 마라.”
두 사람은 아직 약혼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한밤중이고. 올리버는 그 사실을 지적하며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진짜로 내 마음을 얻기 위해서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죠?”
올리버가 나가자 유제니는 엘리엇을 노려보며 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그녀의 출생을 숨겼다는 이야기만큼이나.
엘리엇 역시 그렇게 말할 생각은 없다. 그는 웃으며 그의 입을 막은 유제니의 손을 가리켰다.
“오, 미안해요.”
여전히 그녀의 손이 엘리엇의 입을 막고 있었다. 너무 당황해서 반사적으로 손이 나가 버린 탓이다. 유제니가 사과를 하며 물러나자 엘리엇은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물론 아닙니다.”
유제니의 마음을 얻는 데 백작의 딸이냐 공주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니 그런 이유로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비밀로 한 건 아니었다.
그가 말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말해도 믿지 않으실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죠.”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사람에게 사실은 네가 사생아라고 말하면 누가 믿을까. 그것도 이미 외국으로 시집간 공주의 사생아라면?
유제니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엘리엇을 멀리하는 이유가 됐겠지. 물론 자신을 멀리할까 봐 말하지 않은 것 역시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