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2화 (207/239)

212화. 46 – 3

“유제니, 유제니.”

자신이 유제니의 아버지라고 주장한 아서가 떠나자 올리버는 재빨리 유제니를 불렀다. 아서는 자신이 유제니의 아버지라는 확실한 증거를 가져왔다.

바로 비스컨 백작 부부의 편지였다.

“유제니, 정신 차려.”

멍하니 앉아 있던 유제니의 눈동자에 조금씩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생각하지 못한 상황에 멍해졌던 정신이 돌아왔다.

그녀는 천천히 올리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 꿈을 꾼 게 아닌지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아서가 준 편지가 올리버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아서는 이런 편지가 몇 통 더 있다고 했다. 유제니가 태어났을 때 비스컨 백작 부부가 아서에게 몇 번이나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거, 아버지 필체 맞아?”

그녀의 눈으로 확인하고도 유제니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안타깝게도 아서가 가져온 편지는 아버지가 보낸 편지가 맞았다.

물론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지는 않았다. 편지는 누가 봐도 비스컨 백작이 자신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였다. 아서의 딸을 그와 세이마리아가 데리고 있으며 왜 아서가 나타나지 않는지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유제니.”

올리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동생을 불렀다. 그는 알고 있었다. 유제니가 부모님의 친딸이 아니라는 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아서의 등장에 충격을 받았다.

친동생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도 유제니는 올리버의 동생이었다. 동생의 친부모가 나타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유제니는 이대로 유제니 비스컨으로 살다가 누군가와 결혼해 비스컨 백작가를 친정으로 둔 귀족 부인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유제니의 친아버지가 나타나다니.

올리버도 이렇게 충격을 받았는데 유제니가 충격받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는 하얗게 질린 유제니의 얼굴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정해.”

우선 유제니를 진정시켜야겠다. 의사를 불러야 하나? 아니면 부모님을? 비스컨 백작 부부는 영지에 있으니 지금 사람을 보내도 며칠 뒤에나 도착할 것이다.

그때, 고민하는 올리버를 멍하니 바라보던 유제니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타난 건 그녀의 친아버지라는 사람이다. 확실한 증거까지 가져온.

그런데 왜 올리버가 이렇게 침착하지?

“올리버.”

유제니는 침착하게 말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가볍게 떨리는 것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집사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연 올리버는 자신을 부르는 동생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유제니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혹시 알고 있었어?”

올리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얼굴에 어린 표정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은 아니었다.

유제니는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구나.

그녀의 오라버니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비스컨 백작 부부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아니,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비스컨 백작 부부가 올리버에게는 알려 줬던 건가? 유제니는 무슨 질문을 해야 할지,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부모님이 말한 거 아니야.”

그때, 올리버가 말했다. 그는 유제니를 안정시키기 위해 두 손을 들어 보이고 있었다. 마치 위험한 짐승을 안정시키려는 것 같은 태도에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동시에 섭섭하고 서글펐다. 유제니는 자신이 부모님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걸 올리버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가씨.”

그때, 빅스가 문밖에서 말을 걸었다. 문을 쳐다본 두 사람이 입을 열기 전에 엘리엇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제니, 괜찮습니까?”

그제야 유제니는 엘리엇이 방문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올리버를 쳐다보자 그 역시 엘리엇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하지? 당황하는 올리버 대신 유제니가 말했다.

“괜찮아요.”

생각보다 훨씬 냉정한 목소리가 유제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녀는 깊게 심호흡을 한 뒤 응접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 앞에 버티고 선 두 남자를 향해 말했다.

“피곤해서 쉬어야겠어요.”

아무 생각도 안 든다. 유제니는 엘리엇뿐 아니라 저택의 다른 사람들도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 혼자 있고 싶었다. 그녀가 응접실 밖으로 나오자 빅스와 엘리엇이 재빨리 물러났다. 유제니는 그대로 엘리엇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이 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유제니.”

그때, 엘리엇이 다시 유제니를 불렀다. 피곤하다니까.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녀의 일로 다른 사람에게 짜증을 부려서는 안 된다. 게다가 엘리엇은 유제니의 구혼자가 아니던가.

그에게 자신이 비스컨 백작 부부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걸 알려야 할 것이다. 엘리엇이 아직도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면.

“제가 드린 반지, 가지고 계십니까?”

유제니에게 다가온 엘리엇은 느닷없는 질문을 던졌다. 반지? 유제니는 그의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 아주 예전에 인장 반지를 받았다. 정확하게는 엘리엇이 억지로 안겨 준 거였지만.

“네. 가지고 있어요.”

그 뒤로 몇 번 돌려주려고 했는데 엘리엇이 받지 않았다. 그래서 유제니는 그걸 그녀의 보석함에 넣어 뒀다. 번즈 백작가의 인장 반지다. 잃어버릴까 봐 무서웠다.

그거면 됐다. 엘리엇은 유제니의 대답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가지고 계십시오.”

계속 가지고 있으라고 말할 거면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는 이유가 뭘까. 유제니는 천천히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엘리엇을 쳐다봤다. 그가 그녀를 쳐다보며 입을 맞췄기 때문에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피곤해서.”

엘리엇의 입술이 떨어지자 유제니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계단을 올랐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엘리엇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냐는 하녀들을 모두 뿌리치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온갖 잡다한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뿌옇게 떠올랐다. 오히려 그래서 한 가지 생각을 낚아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부모님의 친자식이 아니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호흡이 곤란해질 정도로 무서워졌다. 그리고 그걸 올리버가 알고 있었다.

올리버는 부모님이 말한 건 아니라고 했다. 언제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입을 다물고 있었고.

유제니는 오라버니가 왜 입을 다물었는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그녀도 마찬가지로 행동했을 테니까.

부모님도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비스컨 가의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유제니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모르는 건 비스컨 가 밖의 사람들이고 그중에서도 엘리엇이 가장 문제였다. 그에게 알려야 하니까.

엘리엇을 생각하자 유제니는 침실로 오기 전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가 억지로 떠맡긴 반지는 그녀의 화장대 위에 놓인 보석함 안에 들어 있다.

혹시나 싶어서 확인해 보니 인장 반지는 그녀가 넣어 둔 그대로 들어 있었다.

“젠장.”

유제니는 반지를 집어 들며 한숨처럼 욕을 내뱉었다. 입 밖으로 욕을 내뱉어 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욕이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을 가다듬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유제니는 화장대 앞에 앉아 그녀의 손가락에 걸린 큰 반지를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엘리엇의 손은 당연하게도 유제니의 손보다 훨씬 커서 이 반지는 그녀의 엄지에도 헐렁거린다. 이걸 사용하라고 준 건 아니겠지.

유제니는 멍하니 반지를 돌리며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이 집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는 많았다.

생긴 것도 부모님 중 어느 쪽도 닮지 않았다. 오히려 창백하다 싶은 피부가 아서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유제니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미친 듯이 외로워졌다. 이 세상에 마치 그녀 혼자만 덩그러니 떨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그녀의 손안이 따듯한 느낌이 들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유제니는 자신이 쥐고 있는 반지를 쳐다봤다.

번즈 백작가의 인장이 새겨진 인장 반지는 아무 변화도 없이 그녀의 손안에 들어 있었다.

- 언제가 레이디 비스컨. 당신 곁에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낄 때가 올 수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유제니의 귓가에 엘리엇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깜짝 놀란 유제니는 고개를 들어 자신이 방 안에 혼자 있다는 걸 확인했다.

아무도 없다. 그녀의 침실에는 유제니 혼자 있었다. 유제니는 반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맞은편에 있는 거울로 시선을 던졌다.

엘리엇이 그렇게 말했다. 언젠가 그녀의 곁에 아무것도 없다고 느낄 때가 올 수 있다고.

그때 엘리엇의 표정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는 유제니의 손을 잡고 있었고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쳐다보는 푸른색 눈동자만은 봄날처럼 따뜻했다.

아까 계단 아래에서 엘리엇이 유제니의 손등에 입을 맞출 때처럼.

- 그때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반지를요.

다시 유제니의 머릿속에 엘리엇의 말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는 이 반지가 그녀의 것이라고 했다. 유제니는 그게 무슨 의민지 어렴풋하게 알 것 같았다.

“아이, 씨. 올라가 봐야 하는 거 아냐?”

일 층 응접실에서 서성거리던 올리버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큰 남자가 서성거리니까 번잡스럽다.

하지만 엘리엇은 신경 쓰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번즈 백작.”

올라가 봐야 하지 않겠냐는 올리버의 질문에 엘리엇이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가 시공을 헤매는 것처럼 천천히 흔들리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니, 유제니는 지금 엄청나게 충격일 거 아냐? 벌써 시간이 몇 시야?”

저녁 식사 시간은 이미 지났다. 유제니가 들어간 침실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올리버는 다시 소파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엘리엇을 힐끔 쳐다봤다.

이 자식은 뭔데 이렇게 태평할까. 그만 돌아가 봐야 하지 않겠냐고 몇 번이나 물어봤는데 어찌나 예의 바르게 거절하던지 이 집이 비스컨 저택이 아니라 번즈 저택 같을 정도였다.

게다가 유제니가 이 층으로 올라간 뒤 몇 시간이나 지났지만,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저렇게 꼿꼿하게 앉아 있다.

“네가 안 가면 나라도 가 봐야겠어.”

결국, 참다못한 올리버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그러자 엘리엇이 입을 열었다.

“내려올 겁니다.”

“안 내려오면?”

“내려올 겁니다.”

확고한 엘리엇의 목소리는 올리버보다 훨씬 더 유제니를 믿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엘리엇이 유제니를 만난 건 고작해야 이번 여름이다.

올리버는 그건 어떻게 확신하냐고 따지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엘리엇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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