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46 – 2
그제야 남자의 머릿속에 레이디 비스컨이 벌인 이상한 일들이 떠올랐다. 여름에는 배를 빌려 사람들에게 수영을 가르쳤었다. 여자들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약간 소란이 일어났었던 게 기억난다.
그리고 렌시드 경과의 파혼.
“꽤 시끌벅적했지.”
그렇게 떠올리고 보니 레이디 비스컨은 사건을 몰고 다니는 모양이다. 남자의 친구는 레이디 비스컨이 이 클럽에 들어와 렌시드 경에게 파혼 선언을 했다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여길 들어와 보니 자기도 클럽을 만들고 싶기라도 했나?”
“그게 말이 돼?”
그렇다고 클럽을 만들고 싶어 한다고? 이미 이상한 짓을 많이 한 여자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냥 태생부터 문제가 있었던 거지.”
“태생부터라니? 무슨 소리야?”
비스컨 백작가라면 부유하진 않아도 유서 깊은 가문이다. 그 가문을 두고 태생에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순 없을 텐데?
친구의 의문에 남자가 히쭉 웃었다. 그리고 다시 신문을 펼치며 말했다.
“못 들었나? 그 여자, 사생아라더군.”
“누구? 레이디 비스컨?”
“레이디는 무슨.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천한 계집일 수도 있는 거지.”
“잠깐, 그러면 비스컨 백작 부인이 불륜을? 그걸 비스컨 백작은 아는 건가?”
“알 리가 있어? 모르니까 애지중지 키….”
다음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친구의 눈앞에서 남자의 몸이 의자에서 떨어져 나갔다.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 친구는 쓰러진 의자 뒤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 비스컨 남작.”
남자를 때려 떨어트린 건 올리버 비스컨이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은 분노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찌나 화가 났던지 올리버는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쓰러진 남자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다시 말해 봐, 이 자식아.”
“그만, 그만두게.”
친구가 놀라서 올리버를 막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올리버는 남자를 잡은 채 반대편 팔을 친구를 향해 휘둘렀다.
“악!”
이번에는 남자의 친구가 올리버가 휘두른 팔에 맞아 나가떨어졌다. 어찌나 세게 휘둘렀던지 친구는 바닥을 쭉 미끄러져 다른 사람의 의자에 부딪혔다.
“그만두지 못해?”
남자와 친구를 도우러 온 다른 남자가 소리치며 올리버에게 덤벼들었다. 그러자 눈치만 살피던 사람들도 올리버에게 덤벼들었다. 남자의 멱살을 잡고 있던 올리버의 몸이 휘청했다.
그때, 낮으면서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누군가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비스컨 남작.”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올리버는 틈 사이로 가까스로 상대방을 확인했다. 번즈 백작이었다.
엇.
번즈 백작의 등장에 독서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 밖에 있던 사람들도 멈칫했다. 그 틈을 타서 올리버가 소리쳤다.
“이놈들이 유제니를 모욕했어!”
그렇지 않다. 올리버를 막고 있던 남자들은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엘리엇이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남자를 집어 던졌다.
“악!”
사람들의 눈앞에서 엘리엇과 가까이 있던 남자가 종잇장처럼 나가떨어졌다. 남들보다 작은 체격을 가진 남자도 아니었다. 다들 할 말을 잃고 얼어붙어 있는 가운데 엘리엇이 말했다.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과라니. 사과를 할 사람은 번즈 백작이다. 사람들은 엘리엇의 뻔뻔한 말에 입을 딱 벌렸다.
하지만 엘리엇이 다가오자 마치 종이가 찢어지듯 사람들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자, 잠깐. 이야기 좀 들어 보게.”
올리버를 말리기 위해 달려들었던 남자가 엘리엇을 향해 손바닥을 뻗으며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다. 그들은 레이디 비스컨을 모욕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가 말을 잇기 전에 엘리엇이 그의 멱살을 잡았다. 순식간에 남자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남자는 자신의 몸이 떠올랐다는 것에 놀랐지만 곧바로 목이 졸려 발버둥 치며 말했다.
“오, 오해….”
캑캑대느라 남자가 듣기에도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죽는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번즈 백작의 눈동자가 오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간, 지배인이 그의 목숨을 구해 줄 중요한 말을 전하기 위해 독서실에 들어왔다.
“비스컨 남작님?”
지배인은 살기에 위축된 채 올리버를 불렀다. 올리버를 막기 위해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엘리엇에게 겁을 먹고 흩어진 뒤였다.
“뭔가.”
올리버는 제일 먼저 입을 함부로 놀린 남자의 멱살을 잡은 채 물었다. 지배인은 엘리엇과 올리버를 번갈아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택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집에서 연락이 왔다는 말에 올리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지금 수도의 비스컨 저택에 있는 건 유제니뿐이다. 그녀는 오늘 약속이 있어서 나갔고.
무슨 약속이라고 했더라? 올리버가 떠올리기도 전에 ‘쿵’ 하고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이 엘리엇에게로 향했다.
“으으….”
어느새 엘리엇의 발밑에 그가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던 남자가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엘리엇은 남자를 무시하고 지배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뭐라고 왔지?”
이걸 번즈 백작에게 말해도 되는 건가? 지배인은 엘리엇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올리버를 쳐다봤다. 다행히 올리버가 허락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빨리 돌아와 달라고 합니다.”
지배인은 그렇게 말하고 저도 모르게 엘리엇의 눈치를 살폈다.
“누가 연락했지?”
올리버는 독서실을 빠져나가며 물었다. 집사가 연락했겠지. 그의 예상대로 지배인은 올리버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
“집사입니다. 레이디 비스컨에게 아주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올리버가 지체할까 봐 덧붙인 모양이다. 당연히 유제니에게 일이 생겼겠지. 그의 부모님은 지금 영지에 계시니까.
하지만 올리버가 알았다고 말하기 전에 누군가가 그를 지나쳐 독서실을 빠져나갔다. 올리버는 입을 연 채로 빠르게 떠나는 엘리엇의 등을 바라봤다.
“도련님.”
두 사람이 저택에 도착하자 빅스가 서둘러 문밖으로 나왔다. 심상치 않다. 엘리엇과 올리버는 빅스가 문밖까지 나왔다는 상황에서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번즈 백작님도 함께 오신 겁니까?”
빅스는 두 사람을 저택에 들이기 전에 물었다. 평소라면 엘리엇에게 인사를 하고 문을 열어 줬을 것이다. 그는 유제니의 구혼자니까.
하지만 엘리엇의 방문이 곤란한 듯한 태도에 올리버는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엘리엇 역시 빅스의 태도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미리 약속은 하신 건 아니시지요?”
이어진 빅스의 질문에 올리버는 엘리엇을 한 번 쳐다봤다가 다시 빅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에게 몸을 내밀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난처한 질문이다. 이 상황을 번즈 백작이 알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빅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올리버를 한 번 쳐다봤다가 엘리엇에게 다시 말했다.
“지금 손님이 계셔서 다음에 다시 와 주시겠습니까?”
유제니가 손님을 맞이하고 있어서 다른 손님은 거절한다는 말이다. 이런 적도 처음이라 올리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엘리엇은 유제니의 거의 유일한 구혼자다. 그녀에게 구혼하던 남자 둘이 어느 순간 더 이상 비스컨 저택을 찾지 않고 있다.
꼭 레이디 비스컨을 만나러 가기 전날이면 불운한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다가 취객과 싸움이 붙기도 하고 귀갓길에 넘어진 적도 있다. 심지어 산책하다가 지나가던 사람이 자신의 지갑을 훔쳤다는 오해를 해서 온종일 실랑이를 한 적도 있다.
이상한 일이지.
올리버는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엇을 돌아보았다. 설마 다른 구혼자들이 와 있는 건 아니겠지.
“어, 미안하지만 번즈 백작….”
“기다리죠.”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올리버가 말하려는데 엘리엇이 불쑥 말했다. 뭐?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어리둥절해하는 빅스와 올리버에게 엘리엇이 다시 말했다.
“기다리겠습니다. 레이디 비스컨에게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거든요.”
어떻게 하냐는 표정으로 빅스가 올리버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런 표정을 지어도 올리버는 무슨 상황인지 모른다.
이럴 때 하필이면 어머니도 자리에 안 계시고.
올리버는 망설이다가 빅스에게 물었다.
“유제니가 위험한 건가?”
“그건, 아닐 겁니다.”
아닐 거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말에 올리버와 엘리엇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빅스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결국 올리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번즈 백작을 응접실로 안내해 주게. 어, 유제니가 지금 어디에 있지?”
“큰 응접실입니다.”
보통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이다. 손님이 있다는 말이 진짜인 모양이다. 올리버는 엘리엇을 작은 응접실로 안내해 주라고 말하고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유제니.”
대체 무슨 일인 걸까. 엘리엇을 집사에게 맡기고 큰 응접실로 향한 올리버는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놀랍게도 응접실에는 한 남자와 유제니가 마주 앉아 있었다. 남자와 단둘이 있는데 문을 닫아 놨다는 건 유제니의 성격상 말이 안 된다.
올리버는 서둘러 유제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남자에게 보란 듯이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무슨 일이야?”
“올리버.”
유제니는 약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더듬더듬 올리버의 손을 잡았다. 동생이 먼저 자신의 손을 잡은 건 처음이라 올리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유제니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말했다.
“비스컨 남작?”
남자는 나름대로 잘 차려입고 있었지만, 귀족은 아니었다. 그는 올리버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서 브라이트일세. 자네 아버지와 아카데미 시절 친구였지.”
올리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아버지는 지금 영지에 있다. 혹시 아버지를 만나러 온 거라면 만나기 어려울 거다.
하지만 올리버가 그렇게 말하기 전에 아서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유제니의 아버지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