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7화 (202/239)

207화. 45 – 2

둘 다 완벽하게 해낼 수 없다. 올리버는 자신이 둘 중 하나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 걸 알았다. 그의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였고 좋은 백작이 되려 했지만 둘 다 성공하지는 못했다.

한 가정의 가장이라면 가족을 부족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비스컨 백작은 사업에는 영 소질이 없었고 그나마 부인이 가져온 재산도 까먹기 일쑤였다.

어찌나 돈 버는 재능이 없는지, 비스컨 가의 재산은 오히려 비스컨 백작이 사업에 손을 떼자 아주 약간이지만 늘어날 정도였다.

지금도 비스컨 가의 재정은 올리버의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가 관리하고 있다.

“괜히 두 가지 다 하다가 둘 다 제대로 하지 못하느니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편이 낫잖아.”

올리버는 그렇게 말을 하고 씩 웃었다. 클레어는 그의 미소에 홀려 멍하니 올리버를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하지만 노력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거잖아.”

둘 다 제대로 못 할 것 같으니 애초에 시작도 안 한다는 말은 노력하지도 않고 포기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클레어의 지적에 올리버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하지만 다시 금세 미소가 돌아왔다. 올리버는 웃으며 말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클레어 라넌 경.”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던 클레어는 올리버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걸 말하는 거다. 기사가 되기 위해 결혼을 포기한 것.

“그것과는 좀 달라.”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며 올리버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뺐다. 그녀가 결혼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건 꿈에서 해 봤기 때문이다. 그리 좋지 않은 결혼 생활이었고 그 끝은 끔찍했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아니었다면 그 끔찍한 결혼 생활이 그녀의 목숨을 앗아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올리버는 클레어가 어떤 꿈을 꿨는지 모른다. 물론 알았다 해도 그는 같은 말을 했겠지만.

“게다가 누가 부인이 기사인 걸 좋아하겠어?”

좋아할 수도 있지. 클레어의 말에 올리버가 그렇게 대꾸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클레어가 말을 이었다.

“설령 참아 준다 해도 결혼하면 그만두길 바랄걸?”

언젠가 그만둘 거다. 하지만 결혼한다는 이유로 그만둘 생각은 없다.

물론 클레어가 기사가 된 건 유제니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처음엔 기사가 된다면 기사들을 설득해 유제니를 보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게 어렵다는 걸 알게 된 지금까지 기사단에 남아 있는 이유는 기사단이 생각보다 소문이 빠르기 때문이고.

기사단에서 나오는 봉급이 쏠쏠하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결혼해도 기사 생활을 해도 된다고 하면 결혼할 거야?”

올리버의 질문에 클레어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건 아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어야지.”

“그것 외에 다른 조건은 없어?”

클레어가 좋아하고 그녀가 기사인 걸 받아들여 주는 남자면 되나? 올리버의 질문에 클레어는 다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 외에 또 무슨 조건이 필요할까.

솔직히 말하면 클레어는 그 두 가지가 가장 어려운 조건일 거라 생각했다. 자기 부인이 기사인 걸 인정하고 받아들일 남자는 세상에 없다. 거기에 클레어가 좋아하기까지 해야 하다니, 차라리 유니콘을 찾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당신은? 왜 아직도 결혼을 안 했어? 항간에 무슨 소문이 도는지 알아?”

유제니에 대한 소문이 최근에 늘어났다면 올리버에 대한 소문은 예전부터 무성했다. 이렇게 잘생긴 남자라면 이런저런 소문이 돌 수밖에 없다. 지난번에 그와 결혼 약속을 했다는 여자들이 나타나기 전에도 올리버와 만난다는 여자들은 있었다.

그때 사건이 커지지 않은 건 다들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약혼의 증표로 받은 반지까지 보여 줘서 난리가 난 거고.

올리버는 클레어의 질문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자에 관심이 없다는 소문? 아니면, 특이한 걸 좋아한다는 소문?”

앞의 소문은 들어 봤지만, 뒤의 소문은 못 들어 봤다. 클레어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특이한 걸 좋아한다고?”

최근 돌고 있는 소문이다. 올리버의 친구들이 킬킬거리며 알려 줬다. 그가 특이한 걸 좋아한다는 소문이 돈다고.

올리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둘 다 헛소문이야. 아, 내가 공주님을 잊지 못한다는 소문도 헛소문이지.”

“공주님? 제네비브 공주님?”

지금은 뉴커크의 왕비님이 된 분을 말하는 건가? 어리둥절해하는 클레어에게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제네비브 공주님이 뉴커크로 떠나셨을 때 당신은 두, 세 살 아니었어?”

정확하다. 올리버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지으며 물었다.

“내게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클레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걸로 그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녀는 올리버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당신이 아니라 유제니 때문이야.”

“그거랑 유제니가 무슨 상관인데?”

“소문 말야.”

올리버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을 지었고 클레어는 긴장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번 휴스턴 저택에서 들은 소문 말야. 그걸 이야기하러 왔어.”

“헛소문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

“비스컨 남작.”

올리버는 더 이상 이야기할 가치가 없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빠르고 넓은 걸음걸이에 클레어는 가까스로 그를 따라잡으며 말을 걸었다.

“당신도 들었잖아. 유제니가 사생아라는 소문.”

“말할 것도 없어.”

이래서야 이야기할 수가 없다. 클레어는 올리버의 소매를 잡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난 알아. 유제니가 당신 친동생이 아닌 거.”

올리버는 시선만으로 주위를 살폈다. 클레어가 원해서 그런 거긴 하지만 공원에 들어가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툭 내뱉듯 말했다.

“거짓말이야.”

안 믿는 게 당연하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니까.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올리버가 성큼성큼 걷는 탓에 그를 따라가는 게 힘들었기 때문이다.

“비스컨 백작 부인은 임신을 했다며 수도로 올라왔지. 보통 임신하면 영지로 내려가는 것과 반대로 말이야.”

그제야 올리버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클레어의 말에 반박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그보다 먼저 클레어가 말을 이었다.

“유제니라는 이름은 왕대비 전하께서 지어 주신 이름이야. 수도에서 출산했기 때문에 왕대비 전하께서 지어 주셨다고 알려져 있지.”

여기까지는 다들 알고 있다. 올리버는 무슨 말을 하고 싶냐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클레어가 빠르게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공주님이 지어 준 이름이지. 그분은 백작 부인이 보낸 편지에 답장으로 딸 이름을 유제니라고 지으라고 하셨어. 그 편지는 아직….”

젠장. 올리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클레어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봤다.

그걸 이 여자가 어떻게 알지? 놀랍게도 방금 전 클레어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다. 비스컨 백작 부인은 유제니라는 이름이 왕대비 전하께서 지어 주신 이름이라고 이야기했다.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유제니는 아직도 그녀의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이 왕대비 전하인 줄 알 것이다. 하지만 올리버는 유제니라는 이름을 제네비브 공주가 지어 준 이름이라는 걸 알았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어? 아니, 그보다….”

클레어의 입을 막은 채 낮은 목소리로 윽박지른 올리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이 아직도 클레어의 입을 막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손을 떼려다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리 안 지를 거지?”

클레어는 어이가 없어서 눈동자를 한 바퀴 굴렸다. 이런 대낮에 길거리에서 여자의 입을 막고 있으면 다들 쳐다볼 것이다. 그런 걸 묻기 전에 손을 떼는 게 더 났다는 말이다.

하지만 올리버는 클레어가 대답하기 전에는 손을 뗄 생각이 없어 보였고 클레어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올리버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뗐다. 그리고 재빨리 사과했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었다 해도 입을 막은 건 그의 잘못이다. 그는 자신의 사과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클레어를 향해 말했다.

“그 이야기,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닐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괜한 소리 했다간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에 클레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자신이 남자였다면 이 자리에서 올리버가 주먹을 날렸을 거라 생각하며 말했다.

“떠들고 다닐 거라면 당신한테 먼저 와서 이야기하지도 않겠지.”

“날 협박하려는 걸 수도 있지.”

비스컨 백작 부부는 영지에 가 있으니 유제니에 대한 헛소문으로 협박을 하려면 올리버를 찾아오는 게 맞다. 아니면 유제니에게 가거나.

올리버의 지극히 타당한 지적에 클레어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는 정말로 이야기할 생각이 없다. 그런 소문이 돌지 않았다면 이 사실은 죽을 때까지 묻어 줬을 것이다.

그렇게 하자고 엘리엇과 합의했다.

“그럴 생각도 없어. 내가 걱정하는 건 오히려….”

맞은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클레어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듣지 않길 원했기 때문에 산책을 하자고 한 거다.

저택 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저택 안의 하인들이 몰래 엿들을 수도 있으니까.

“네가 걱정하는 건 뭔데?”

올리버가 보기에 이번 일은 클레어만 입을 다물면 되는 것처럼 보였다. 유제니가 사생아라는 헛소문은 금세 잠잠해질 거다.

잠잠해지지 않는다면 그가 잠재우면 된다. 그런 헛소문을 떠들고 다니는 녀석들의 앞니를 한두 개 부러트리면 잠잠해질 테니까.

하지만 클레어가 걱정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생각해 봐, 비스컨 남작. 사교계에 소문이 돌고 있어. 하나는 유제니가 사생아라는 소문이고 하나는 비스컨 백작 부인이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문이지.”

올리버도 안다. 그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상관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 소문을 잠재울 자신이 있었다. 그 태도에 클레어는 다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올리버에게 몸을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어머니는 명예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지. 특히 가문의 명예를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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