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6화 (201/239)

206화. 45 – 1

“라넌 경께서 오셨습니다.”

집사의 말에 자기 방을 서성이던 올리버가 걸음을 멈췄다. 진짜로 왔다, 클레어 라넌이.

그녀가 오늘 방문하겠다고 편지를 보내기는 했다. 또박또박 쓴 글씨였다. 처음 그 편지를 받았을 때 올리버가 성격과 똑같다고 헛웃음을 지었으니까.

“어, 어디로…, 아니.”

어디로 안내했냐고 물어보려던 올리버는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어디로 안내했긴, 응접실로 안내했겠지. 그것도 평소 유제니와 어머니가 사용하던 응접실일 것이다.

지금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영지로 내려간 어머니와 어머니 대신 손님을 맞이하던 유제니도 없다. 하필 아까 전에 엘리엇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날이 추우니 안에 있는 게 좋지 않겠냐는 엘리엇을 유제니가 끌고 나갔다. 하여간 그 녀석은 중요한 순간에는 도움이 안 된다니까.

올리버는 살면서 중요한 순간에 유제니가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잊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거절한 명분이 없어서 받아들인 거긴 하지만 그는 클레어를 만나고 싶지가 않았다.

유제니가 있었다면 머리가 아프다거나 급한 일이 있다는 핑계로 손님맞이를 유제니에게 맡길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 이 집에 있는 사람은 올리버뿐이다. 올리버는 한숨을 내쉬고 내키지 않은 발걸음으로 일 층으로 내려갔다.

“비스컨 남작.”

이미 응접실로 안내를 받았는지 클레어는 올리버가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기사단에서 오는 길이 아닌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 모습에 올리버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드레스를 입은 걸 보는 건 오랜만이다. 머리를 내리고 드레스를 입은 클레어를 보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비스컨 남작?”

얼빠진 듯한 올리버의 모습에 클레어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물었다. 무슨 문제 있나? 그녀도 꽤 긴장한 채였다. 역시 기사복을 입고 올 걸 그랬나? 자신의 차림새를 살피는 클레어에게 올리버가 말했다.

“아, 아니. 앉지.”

“날이 좋은데. 산책은 어때?”

자리에 앉자는 올리버에게 클레어가 제안했다. 그녀를 안내하고 돌아서던 집사가 멈췄다. 두 사람이 나간다면 차는 돌아왔을 때 내오면 된다.

클레어의 제안에 올리버는 앉으려다 말고 다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산책? 지금? 우리 둘이? 그런 표정에 클레어가 다시 말했다.

“오는 길에 보니 날이 꽤 좋더군. 올해 안에 이렇게 날이 좋은 때가 또 언제 오겠어?”

날이 좋다는 말은 사실이다. 하지만 올리버와 산책하려는 이유는 그래서가 아니다. 클레어는 조금 민감한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고 그 이야기를 이 집 하인들이 듣지 않았으면 했다.

누군가가 엿듣지 못하게 대화를 하려면 산책이 제격이다. 클레어의 제안에 올리버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재킷을 가져오지.”

클레어의 말대로 날이 좋았다. 약간 쌀쌀하긴 했지만, 걷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고 햇빛도 강하지 않았다. 올리버는 클레어와 함께 집 밖으로 나가 공원을 향해 걸으며 물었다.

“오늘은 출근 안 했나 봐?”

“어? 아아. 응. 오늘은 비번이야.”

어제 당직을 서서 오늘은 좀 여유가 있다. 거기까지 말한 클레어는 재빨리 설명했다.

“비번이 뭐냐면….”

“괜찮아. 비번이 뭔지 알아.”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올리버의 말에 클레어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비번이 뭔지 안다고? 올리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친구 중에 기사가 있거든. 일을 하는 녀석들도 있고.”

그제야 클레어는 기사단에 올리버의 친구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군. 그렇다면 올리버는 그녀가 말하기 전에 이미 비번이나 당번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친구 중에 노동자도 있다는 말은 클레어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올리버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일을 하는데?”

“변호사도 있고. 선원도 있지.”

변호사는 같은 조정 클럽에서 만났다. 정확히 말하면 아카데미의 조정 클럽에서 만나 아직까지 친하게 지내고 있다. 선원은 술을 마시다 친해졌고.

“저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었거든. 그 녀석이 내 친구를 한 대 때려서 나도 한 대 때리고, 다음은 알지?”

킬킬거리며 하는 말에 클레어는 미간을 찡그렸다. 다음은 알긴, 아무것도 모른다. 그녀는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싸웠다는 말이잖아?”

“우정을 다졌다는 이야기지.”

“헛소리.”

진짜다. 서로 턱을 한 대씩 때린 뒤 선원은 올리버에게 술값이라며 돈을 던졌다. 여긴 너 같은 샌님이 올 곳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허.”

배짱 하나 좋은 선원이다. 상대가 귀족이라는 걸 모르고 한 짓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그녀에게 올리버가 킬킬거리며 말을 이었다.

“다음 날 찾아갔더니 도망쳤더라고. 어느 배에 있는지 수소문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지.”

“찾았다고? 왜? 때리게?”

“받은 돈 돌려줘야지.”

때리다니 무슨 소리냐는 올리버의 반응에 클레어는 입을 딱 벌렸다. 제정신인가? 자신을 때린 상대를 찾아가서 돈을 돌려준다고?

하지만 올리버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랑 다퉜다고 숨어 다닐 필요 없다는 말도 해 줘야 하고.”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클레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올리버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몸 앞으로 팔을 내밀었다.

뭐야?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두 사람 앞으로 마차가 지나갔다.

“어, 고마워.”

클레어의 감사에 올리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그는 마차가 지나간 뒤 길을 건너며 입을 열었다.

“커런트에서 귀족을 때리면 수배당하는 줄 아는 사람들도 있거든. 그렇지 않다는 걸 알려 주려고.”

실제로 선원은 배에 숨어 있었다. 귀족을 때리고 돈까지 던졌으니 당연하다. 올리버는 선원에게 그때 받은 돈을 돌려주고 이번에는 자신이 술을 사겠다고 말했다.

“술을 마셨어?”

말도 안 된다는 클레어의 말에 올리버는 소리 내어 웃었다. 마셨다. 새벽까지 코가 삐뚤어지도록.

“눈을 뜨니까 그 녀석 집이더군.”

“맙소사.”

클레어는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올리버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잠든 자신을 집으로 데려와 준 선원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전날 술을 마신 술집에 돌아가 술값을 지불한 뒤 선원과 악수를 하고 돌아왔다.

“그 뒤로 가끔 술을 마셔. 카드 게임을 하면서. 아, 물론 돈은 안 걸고.”

“돈은 안 건다는 게 무슨 소리야?”

“처음에 싸운 게 돈 때문에 싸운 거였거든.”

올리버의 친구는 선원이 사기를 쳤다고 소리 질렀고 선원은 자신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소리쳤다. 그러다 싸움이 시작됐다.

“맙소사. 당신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멍청이야!”

클레어는 그렇게 외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 멍청한 남자 같으니.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밤새 술을 마시고 내기 카드를 치지만 선원과 친구가 될 줄 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네 꿈에서는 내가 똑똑했나 보지?”

올리버가 킬킬대며 빈정대자 클레어는 웃음을 멈췄다. 꿈에서도 올리버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멍청이였다. 그리고 여전히 선원과 친구가 될 줄 알았다.

그녀는 꿈에서 올리버를 따랐던 무리를 떠올리며 걸음을 멈췄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에 대항해 귀족들의 앞잡이처럼 굴었지만, 그의 주변에는 귀족만 있지 않았다. 선원과 변호사뿐 아니라 용병이나 굴뚝 청소부나 세탁소의 직원들과도 어울렸다.

“공원으로 들어갈까?”

올리버가 물었다. 클레어가 공원 앞에서 멈췄기 때문이다. 그녀는 올리버의 질문을 듣고 고개를 들어 공원을 쳐다봤다.

사교 시즌이 끝나 갈 때라 산책하는 남녀는 대부분 이미 약혼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외에는 친구이거나 가족이고.

저길 들어간다면 사람들은 두 사람이 무슨 관계인지 수군거릴 게 분명하다. 클레어는 고개를 저으며 방향을 바꿨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는 올리버가 그녀가 아는 것보다 훨씬 눈치가 빠르다는 걸 깨달았다. 아까 마차가 지나갈 때 그녀를 막았던 것도 그렇고 공원에 들어가기 전에 공원을 걸을 거냐고 묻는 것도 그렇다.

생각해 보면 그는 예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전문 조정 선수로 활동하지 않는 이유가 그가 다른 사람의 자리를 빼앗을 것 같아서 그렇다고 말했지.

클레어는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걷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올리버를 쳐다봤다. 마차가 다니는 바깥쪽은 올리버가 걷고 있다.

“전에 전문 조정 선수가 되고 싶었다고 했잖아.”

클레어의 질문에 올리버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모자를 벗어 고개를 까딱한 뒤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하지만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기 싫다고 했지.”

내가 그런 말도 했나? 올리버는 그런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면서 내심으로는 클레어에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다. 그의 어머니나 유제니에게도. 하기야 두 사람은 그가 진짜로 뭘 하고 싶어 하는지는 생각하지 않겠지만.

“하지만 당신도 조정 선수가 되고 싶어 하잖아.”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두 사람이 향하는 방향에서 마차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클레어는 반사적으로 올리버를 잡아당겼다. 덕분에 두 사람의 사이가 가까워졌다.

올리버가 놀라는 것과 동시에 그의 뒤로 마차가 지나갔다. 클레어는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둘 다 해 보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비스컨 백작과 조정 선수 말야.”

아주 잠깐, 클레어는 커진 올리버의 눈동자를 보며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올리버의 얼굴을 몇 번이나 노려봤지만, 그의 눈동자 색을 이렇게 자세하게 본 건 처음이다.

“나는 그렇게 똑똑하지 않아.”

올리버는 자신의 옷깃을 잡은 클레어의 손을 힐끔 쳐다보고 말했다. 그는 똑똑하지 않다. 자신이 유제니보다 눈치가 빠르지 않다는 건 열두 살 때 알아차렸다.

공부도 검술도 유제니보다 못하다. 그가 유제니보다 나은 건 튼튼한 몸뿐일 거다. 그리고 아버지를 닮은 외모.

올리버는 그걸 아주 잘 알았다. 누가 말했던가. 너 자신을 알라고. 자신을 알고 나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자신의 옷깃을 잡은 클레어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둘 다 완벽하게 해낼 수 없다는 걸 알 정도로는 똑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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