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4화 (199/239)

204화. 44 – 2

찻집이라고 생각하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 좋은 생각은 아니지. 나는 로렌과 줄리아를 쳐다본 뒤 클레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냥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있었으면 한다는 거지? 아무나 들어와서 차도 마시고 대화도 하고?”

“네.”

로렌은 바로 그거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어디서 많이 듣던 거 아냐?

나는 줄리아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줄리아, 에스컬레 경이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어디야? 아무나 들어가서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시잖아.”

“네? 그런 곳이, 어?”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던 줄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우리는 딱 그런 곳을 안다. 지금 올리버가 시간을 때우고 있을 곳.

엘리엇도 가끔 출입한다는 곳.

“클럽 말하는 거예요, 지금?”

남자들에게 커피 하우스가 있다면 여자들에게 찻집이 있다. 그리고 남자들에게 클럽이 있다면 여자들에게는 살롱이 있다.

하지만 살롱은 부유한 집안의 안주인이 자기 집에 초대하는 거고 안주인과 친분이 있어야 초대를 받을 수 있다.

“클럽?”

클레어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아마 클럽은 어려울 거다. 그건 남자들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으니까.

하지만 다른 장소에 시간을 보낼 만한 공간을 만든다는 생각 자체는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런 생각을 하던 터였다.

지금은 조금 늘어났지만, 여전히 훈련장은 수영장보다 방문하는 사람이 적다. 그냥 적은 게 아니라 현저하게 적다.

호기심에 남의 집에 방문한다는 게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겠지. 게다가 나와 친해지고 싶은 게 아니라 훈련장 자체가 궁금한 거라면 방문하는 게 무례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클럽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거야. 클럽과 비슷하긴 하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도 로렌처럼 훈련장이 조금 아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훈련장은 수영장처럼 여유 있게 대화를 하고 시간을 보내기가 어려운 분위기니까.

“차도 마시고 간단한 식사도 할 수 있으면 좋겠지.”

올리버가 다니는 클럽은 게임 룸이 따로 있다고 들었다. 카드 게임도 하고 다트 게임 같은 것도 한다고. 간단한 식사와 차, 술도 판다고 한다.

그런 걸 해 보면 어떨까.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쪽이 방문하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할 테고.”

우리 집으로 오는 건 결국 우리 집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나와 친분이 없다면 그게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남의 집에 가서 대접을 받았다면 나도 초대하는 게 예의니까.

“클럽으로 부르지 않는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클레어가 물었다. 나는 좀 더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사실 훈련장을 옮길까 하는 생각은 계속했거든요.”

응접실 안이 조용해졌다. 클레어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훈련장을 운영하는 게 불편하신 거라면….”

“오, 그건 아니에요.”

다행히 아직 재미있다. 어떤 상황을 상정한다는 것도 재미있고 그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지도 재미있다.

최근에 이야기한 건 무도회장에서 외간 남자와 단둘이 남게 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런 상황에 놓이지 않는 게 좋지만 바람을 쐬겠다고 테라스로 나갔다가 남자가 쫓아올 수도 있으니까.

리사는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겠다고 말했고 줄리아는 혹시 모르니 작은 검을 품에 지니고 다닐 거라고 말했다. 물론 줄리아의 의견은 기각했다. 평소에 무기를 들고 다니는 건 위험하니까.

“집에서 하는 건 나와 친분이 없는 사람들은 방문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수영장 때 친분을 만들었으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수영장 때도 나와 딱히 대화하지 않고 수영장만 즐기다 가는 사람이 많았지.

내 설명에 클레어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제 친구도 오고 싶어 했는데 허락을 못 받아서 못 온다고 하더라고요.”

“허락?”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우리 집에 와서 훈련해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으면 다 초대한다.

하지만 줄리아의 친구가 말하는 허락은 내 허락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검술을 배운다고 소문이 났잖아요. 걔 부모님이 여자애는 그런 거 배우는 거 아니라고 허락을 안 해 줬대요.”

“오.”

이번 신음은 내가 아니라 클레어의 입에서 나온 소리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고 줄리아는 재빨리 사과했다.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아버지도 여자애들도 검을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게 나쁘지 않다고 하셨고요.”

에스컬레 경은 그랬을 거다. 그가 내 검술 선생님이니까.

나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클레어에게 말했다.

“그래서 장소를 옮길까 했어요. 지난번처럼 꼭 뭘 배우러 올 필요 없이 차를 마시러 오는 게 문턱을 낮출 수 있을 테니까요.”

생각해 보면 수영장 때 잘 몰랐는데도 그만큼 잘됐던 건 그냥 운이 좋았던 거다. 사람들은 배 위에서 뭔가를 한다는 것에 흥미를 느꼈고 여자들만 출입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력을 느꼈다.

로렌의 말이 맞다. 지금의 훈련장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나 역시 그녀처럼 좀 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보고 싶었다.

수영장 때는 입장료가 있었다. 그 돈으로 찻값을 감당할 수 있었지. 클럽도 그렇게 하면 괜찮지 않을까.

“아니면 입장료를 없애고 다과뿐 아니라 식사도 팔면 어떨까요? 간단한 샌드위치 종류로 시작하는 거죠.”

수영장 때 로렌이 수영복을 팔았던 것처럼 펜과 종이를 파는 것도 괜찮을 거다. 다들 편지를 쓰니까.

“그거….”

‘그냥 클럽 아냐?’라는 표정이 클레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맞다. 그냥 클럽이다. 하지만 클럽이라고 부르면 안 될 거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훈련장은 수영장보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우리 집이니까 초대받지 않으면 못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요.”

수영장 때는 호기심에 한 번 와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호기심에 오는 게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제일 중요한 게 있는데요.”

그때, 줄리아가 손을 들며 끼어들었다. 지금이 수업 중도 아니고 손을 들 필요는 없다. 내가 콧잔등을 찡그리자 그녀는 킥킥대며 손을 내리더니 물었다.

“여전히 여자만 출입할 수 있는 거죠?”

“그게 좋아?”

줄리아는 남자들도 같이하는 걸 좋아할 줄 알았는데. 나는 조금 놀랐지만, 아닌 척 물었다. 그러자 줄리아가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요. 그게 가장 중요해요.”

“저도요.”

로렌 역시 합세했기 때문에 나는 클레어를 쳐다봤다. 그건 생각 안 해 봤는데.

이유는 모르겠는데 남자는 출입 금지라는 사실이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모양이다. 귀족 아가씨들에게 검술을 가르쳐 준다는 소문이 퍼지자 온갖 남자들에게 편지를 받았거든.

자신이 무상으로 가르쳐 준다는 사람도 있었고 같이 배우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아주 구구절절하게 사연을 써서 보낸 사람도 있었지.

어릴 때부터 검술이 부족한 게 콤플렉스여서 같은 남자들과는 검술 훈련을 못 하겠다고. 그러니 여자들 사이에 껴서 훈련하고 싶다는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편지였다.

하품하느라 흘린 눈물도 눈물이라면 말이지.

“클럽도 남자만 출입 가능하니까, 여자만 출입 가능한 곳이 한 곳쯤은 있는 것도 괜찮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러자 줄리아가 손뼉을 치며 반색했다.

“좋아요!”

로렌 역시 반기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클레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차도 마시고 훈련도 할 수 있으려면 건물이 꽤 커야 할 텐데요?”

지난번 배 정도는 아니어도 우리 집 홀의 두 배는 되어야겠지. 나는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알아봐야죠.”

돈이라면 꽤 있다. 수영장을 운영할 때 벌어 둔 돈을 그대로 가지고 있거든. 장소를 어떻게 구할지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줄리아와 로렌을 향해 말했다.

“좋아. 이제 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계속. 너희는 숙제를 해야지.”

이 애들에게는 아직 숙제가 남아 있다. 그것도 아카데미의 방학 숙제가.

내 지시에 줄리아의 얼굴에 못마땅한 표정이 떠올랐지만, 로렌이 순순히 내려놓았던 책을 꺼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괜찮은 건물을 빌릴 수 있는지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안다. 엘리엇이지. 그리고 리사가 있다.

“유제니.”

서재로 들어서자 어느새 클레어가 나를 뒤따라 들어오며 말을 걸었다. 내가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짓자 그녀는 서재 안으로 들어와서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가족 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아, 그랬지.

아까 전에 그랬다. 줄리아와 로렌이 친구를 아버지의 밑에서 독립시키려 했을 때. 나는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클레어가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나를 쳐다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응?

뭘 말하려는지 몰라도 망설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나는 여전히 망설이는 클레어에게 물었다.

“클레어도 줄리아의 친구가 아버지 밑에서 나오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짜 그 친구를 독립시킬 생각은 없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옳은 일이라고 해도 그게 트레이시에게 옳은 일인지는 알 수 없으니까.

다행히 클레어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내 질문에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아니요. 저도 유제니 말대로 줄리아의 친구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한 걸까. 나는 클레어가 이야기를 하길 기다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게 분명하다. 나를 보고 입을 열었다가 다물기를 반복하던 클레어는 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다른 집에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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