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3화 (198/239)

203화. 44 – 1

“맙소사.”

때마침 줄리아가 하퍼 남작 부인을 불러왔다는 부분까지 들은 나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맙소사. 정말 맙소사다.

오늘 아침, 직접 줄리아와 로렌을 우리 집에 데려온 에스컬레 경이 말했다. 이 녀석들은 외출 금지니까 자신이 데리러 올 때까지 집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고.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물어봤더니 얼마 전 다녀온 친구의 약혼식을 무산시켰다는 답이 돌아왔다. 무슨 약혼식인지 안다. 줄리아에게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그, 그래서?”

나는 차를 마시는 것도 잊고 물었다. 내 옆에서 클레어 역시 입을 딱 벌리고 로렌과 줄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친구의 약혼식이 무산된 것과 두 사람의 외출 금지가 대체 무슨 상관인 걸까.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더니 이런 엄청난 이야기가 시작됐다.

“문 앞에 하퍼 남작 부인이 서 있더라고요.”

“내가 딱 맞춰서 데려왔던 거죠.”

침착한 로렌과 달리 줄리아는 뿌듯한 표정이었다. 지금 이게 뿌듯할 일이 아닐 텐데?

나는 줄리아에게 눈살을 찌푸려 보인 뒤 로렌에게 물었다.

“하퍼 남작 부인이 화냈겠네?”

하퍼 남작 부인이라면 나도 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혼자 아들을 아주 훌륭하게 길러 냈다. 현 하퍼 남작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그녀가 하퍼 남작가를 다스렸고.

그 말은, 하퍼 남작가의 사업도 그녀가 이끌었다는 말이다.

대단한 분이다. 보통 남편이 갑자기 사망하면 남편이 하던 사업은 휘청이기 마련이다. 그대로 무너지는 경우도 있고 회생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하퍼 남작의 사업은 남작이 사망했을 때도 큰 피해 없이 유지됐다고 들었다. 그게 다 남작 부인의 수완 덕분이라고.

“음. 화를 내긴 했어요.”

로렌은 그렇게 말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퍼 남작 부인이 화를 내는 장면을 상상하자 나 역시 한숨이 나왔다. 대단한 분이고 굳이 어느 쪽인지 고르라면 존경하는 분이기도 하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혼자 어린 아들을 기르면서 사업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내가 수영장과 훈련장을 운영해 보니 알겠다. 이게 쉽지 않다는 걸.

그리고 아이를 기르는 건 이것보다 훨씬, 훨씬 더 어렵겠지.

“난 솔직히 그분이 막 소리 지르고 그럴 줄 알았거든요?”

내가 차를 마시는 사이에 줄리아가 입을 열었다. 클레어가 끼어들었다.

“안 그랬어?”

줄리아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네. 조용하더라고요.”

음, 그렇겠지. 거기서 소리치고 일을 키워 봤자 좋을 게 없다.

밀러 경이 하퍼 가문을 무시한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될 테니까. 밀러 경의 행동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와 상관없이 귀족들은 보통 그런 걸 사람들이 알게 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

“대단하네.”

클레어가 신음하듯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밀러 경을 노려보더니 그대로 내려가서 약혼을 없었던 일로 만들어 버렸어요.”

줄리아는 그렇게 말하고 하퍼 남작 부인이 뭐라고 핑계를 댔는지 간단하게 설명했다. 길게 말하긴 했지만, 요점은 아무래도 두 아이가 아직 어려서 약혼은 시기상조인 것 같다는 내용이었단다.

“그러기 쉽지 않은데.”

나는 꽤 그럴듯한 핑계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밀러 경 앞에서는 침착할 수 있어도 다른 손님들 앞에서까지 침착하게 다른 핑계를 댔다는 게 대단하다.

말로는 이런 게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고 하지만 그 상황에서 침착하게 행동하기란 쉽지 않거든.

이렇게 차를 마시면서 하퍼 남작 부인이 당연한 행동을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내 일이라면 나는 하퍼 남작 부인처럼 그렇게 침착하게 처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친구는 어때? 그 애는 괜찮고?”

하퍼 남작 부인이 약혼을 취소하고 돌아갔다는 부분까지 확인하자 나는 줄리아와 로렌의 친구가 걱정이 됐다. 트레이시 밀러라고 했던가.

만난 적은 없다. 하지만 이야기는 들었다. 줄리아처럼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다고.

하지만 에스컬레 경과 달리 밀러 경은 딸을 조금 통제하면서 기른 모양이다. 졸업도 전에 자기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약혼이 결정됐는데 그걸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했으니까.

물론 그것도 받아들인 게 아니라 실감을 못 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줄리아와 로렌이 왔을 때 결혼하기 싫다고 울고 있었겠지.

“모르겠어요. 지금은 걔도 외출 금지라….”

줄리아는 로렌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겠네. 나는 줄리아와 로렌이 왜 출입 금지 형벌을 받았는지 이해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 탓으로 약혼이 취소됐다고 하면 억울한 측면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만족하니?”

줄리아와 로렌이 원하는 대로 트레이시라는 아이는 약혼이 취소됐다. 그것도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의 잘못으로.

친구의 약혼을 막아서 만족하냐는 내 질문에 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로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렌은 만족하지 않는 것 같은데.

내가 그녀를 쳐다보자 로렌은 잠시 찻잔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게 끝이 아니잖아요.”

“끝?”

줄리아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로렌의 말대로 끝이 아니다. 밀러 경은 딸을 빨리 결혼시키고 싶어 한다. 트레이시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 하고.

이번 일은 막았지만 밀러 경은 다음에도 트레이시를 결혼시키려 할 거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밀러 경만이 알겠지.

운이 좋다면 트레이시가 결혼하고 싶을 때겠지만 그런 운은 내가 아는 한 그리 많지 않다. 자신이 원할 때 결혼하는 귀족 여자는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

“어쩔 수 없지. 어쨌든 밀러 경은 트레이시의 아버지니까.”

“트레이시가 집에서 나오면 되지 않을까요?”

줄리아의 질문에 나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건 남의 일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다. 단편적으로 봤을 때 밀러 경은 트레이시를 빨리 결혼시키려 한 나쁜 아버지지만 트레이시도 그렇게 느낄지는 모르는 거다.

“그건 어렵지 않을까.”

클레어의 말에 줄리아가 인상을 썼다. 어려울 거다. 로렌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오기 어렵지. 걔 아버지가 놔줄 리도 없고.”

뭐, 그럴 수도 있고. 나는 로렌의 말에 반쯤은 동의하지만, 반은 동의하지 않는다.

나도 올리버가 아주 짜증 나는 오라버니지만 누군가가 올리버 욕을 하면 그 사람을 가만두지 않을 거거든.

트레이시도 어떨 때는 아버지가 싫지만 어떨 때는 좋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가족이 그렇지 않은가. 짜증 나 죽겠지만 때로는 있어서 그나마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본인이 나오고 싶어 해?”

가장 중요한 게 그거다. 로렌은 도망치고 싶어 했다. 도망치려고 마차를 타고 수도를 빠져나간 적도 있다.

트레이시도 그렇게 살고 싶어 할까? 로렌은 그게 더 나았다. 하지만 트레이시도 과연 아버지에게서 도망쳐서 타인의 도움으로 사는 걸 원할까? 그리고 그게 나을까?

아주 잠깐, 응접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클레어는 로렌과 줄리아를 쳐다봤고 두 사람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닐걸요.”

금세 로렌의 입에서 부정적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것 봐. 나는 줄리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가족 일은 모르는 거야.”

가족 일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일이 그렇다. 나와 엘리엇도 그렇다. 겉으로 보기엔 엘리엇이 내게 구혼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가 나를 기다려 주고 있는 거지. 내가 결혼할 준비가 될 때까지.

나는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전에도 말했지만 많은 귀족 아가씨가 원할 때 결혼하지 못한다. 지금은 많이 늦춰지긴 했지만, 아직도 결혼은 최대한 빨리 하는 게 좋다는 인식이 있다.

결혼은 뭘 모를 때 해야 한다는 말도 있잖은가.

“그래서 고민해 봤는데요.”

그때, 로렌이 입을 열었다. 차를 마시고 줄리아가 가져온 파이를 먹던 나와 클레어는 고개를 들었다.

줄리아가 파이를 굽다니, 외출 금지를 당해 어지간히 심심했던 모양이다.

“저도 유제니처럼 하고 싶어요.”

순간, 머릿속에 베라가 떠올랐다. 나처럼 되고 싶다고 했지.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니라 그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귀족 아가씨가 되고 싶었던 것에 가까웠지만.

내가 베라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귀족 아가씨라는 말이 아니다. 베라는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의견을 존중하는 그런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다. 내가 그렇다고 생각했던 거고.

꽤 영광스럽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착각이었다. 나처럼 되고 싶다고 한 행동도 약간 어긋나 있었고.

“어떤 면으로?”

줄리아가 질문을 한 덕분에 나는 베라를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로렌은 자세를 바로 하고 나를 바라보더니 심호흡을 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까지 마음의 준비를 하는 걸까. 어쩐지 나도 긴장이 돼서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훈련장은 좀 덜하지만, 지난번 수영장에서 전 되게 좋았거든요.”

“응?”

훈련장과 수영장? 어째 내 각오와는 다른 이야기가 나올 모양이다. 로렌은 줄리아를 한 번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제 또래도 많이 왔잖아요? 그래서 시간이 나면 이야기도 하고 가고요.”

그렇다. 수영장은 한 번에 몇 명 이상 수영을 할 수가 없으니 남은 사람들은 기다리면서 차를 마시거나 이야기하곤 했다.

지금 훈련장은 그런 시간이 좀 줄긴 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상황을 상정하고 어떻게 대처할지를 의논하거든.

직접 연습하고 이야기하다 보면 그것 자체가 그냥 대화라서 따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로렌은 따로 대화를 나누는 게 좋았던 모양이다.

“그런 걸 하고 싶어요.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요.”

나는 반사적으로 클레어를 쳐다봤다. 일상적인 이야기라면 지금 우리도 하고 있다. 그러니 로렌이 말하는 건 이런 게 아니겠지.

“더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말이니?”

내 질문에 로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어렵네.

친하지 않다면 딱히 이유도 없이 모이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그렇지 않은가. 친하니까 그냥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거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갑자기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러 오라고 할 수는 없다.

“어디서 이야기해?”

줄리아가 물었다. 그러게. 클레어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생각 같긴 한데, 어디서 할지도 문제고 사람들이 올지도 문제야.”

그렇지. 우리 집에 초대한다고 나와 친분이 없는 사람들이 올 리가 없다. 여기가 찻집도 아니고.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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