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43 – 3
“아니, 안 그럴 건데.”
줄리아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말했다. 결혼한 상태로 자정까지 무도회장에 남아 있는 것과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자정까지 무도회장에 남아 있는 건 아주 다르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런 건 내 전문이지. 아버지와 함께 가는 무도회와 아버지가 없는 무도회. 아주 큰 차이가 있다고.”
물론 에스컬레 경이 동반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유제니나 비스컨 백작 부인이 동반한다. 그건 줄리아가 결혼할 나이가 될 때까지 이어질 거다.
어차피 줄리아는 혼자서는 어느 곳도 갈 수가 없다. 하지만 동반하는 사람이 아버지냐 유제니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
“나도.”
줄리아의 말에 아이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녀도 트레이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다. 같은 티 파티에 참석해도 어머니와 함께 참석하는 것과 혼자 참석하는 건 큰 차이가 있다.
그게 남편이 된다면 그 차이는 큰 정도가 아니겠지.
“너희는 아카데미 졸업하고 모여 다니면서 쇼핑도 하고 공부도 할 거 아냐? 근데 난 졸업하자마자 애를 낳아서 길러야 한다는 말이잖아?”
트레이시는 자기가 한 말에 숨이 턱 막혀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이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이야기할 상대가 없었다. 이 약혼은 아버지가 주도한 거니까. 유모도 그녀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게 뭐지? 정말로 이게 나한테 좋은 일인가? 이 약혼을 거부하면? 이거보다 더 좋은 선택이 나한테 올까?
여러 가지 생각으로 트레이시는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줄리아와 아이다는 서로를 쳐다봤다. 트레이시가 왜 이러는지 알겠다. 그동안은 차근히 생각해 볼 시간이 없었던 거다.
“안 하겠다고는 말 못 하겠는 거지?”
아이다의 질문에 트레이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고 싶은 건지 안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는데 안 하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널 도와주고 싶어.”
로렌은 조용하게 말했다. 진심이다. 그녀는 트레이시를 돕고 싶었다.
그녀의 꿈에서 트레이시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어느 귀족 부인이 재산을 친정으로 빼돌렸다가 쫓겨날 뻔했다는 가십을 들을 때는 재미있지만 그게 아는 사람이면 더 이상 재미있지 않다.
“하지만 네가 뭘 할지 모르면 도와줄 수가 없어.”
결국, 선택은 트레이시의 몫이다. 바닥을 내려다보던 트레이시는 고개를 들며 물었다.
“수도 밖으로 도망쳐서 어떻게 하려고 했어?”
“뭐?”
그게 무슨 소리지? 어리둥절해하던 로렌은 친구가 몇 달 전 이야기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꿈을 꾼 지 얼마 안 됐을 때, 아무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로렌은 수도 밖으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그건 겁 없는 생각이었고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녀가 아무 피해 없이 여기 앉아 있을 수 있는 건 첫 번째는 줄리아 덕분이고 두 번째는 유제니 덕분이다.
“옷가게를 하려고 했어.”
로렌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멍청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제니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 경험도 필요한 거라고 했다.
유제니의 그 말이 없었다면 로렌은 그때 일을 입 밖에 내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도 할래.”
“옷가게를?”
로렌의 질문에 트레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된다. 로렌이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아이다가 냉정하게 말했다.
“네 수예 실력 별로잖아.”
“아이다.”
로렌이 말하기 전에 줄리아가 아이다를 타박했다. 어쩐지 유제니가 생각나서 로렌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옷가게는 실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더라.”
줄리아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트레이시에게 말했다. 그녀는 로렌이 의상실을 하겠다며 야심 차게 일을 벌이던 걸 옆에서 봤다.
그리고 모든 일이 그렇듯 야심 차게 벌인 일은 야심 차게 무너졌다. 그때 로렌은 수예 실력도 별로였지만 체크무늬 천이 팔릴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예측을 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물론 그 체크무늬 천은 짐가방을 꾸며 전부 팔아치우긴 했다. 그걸 곁에서 전부 지켜본 덕에 줄리아는 장사라는 게 실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실력도 있어야 하지만 감도 좋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 보는 눈도.
줄리아는 트레이시가 셋 중에 적어도 마지막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제니가 말했다. 아카데미를 다니는 학생이 사람 보는 눈이 좋아 봐야 얼마나 좋겠냐고.
그러니 무슨 일이 있으면 아버지나 유제니에게 말하라고 했다. 꼭 대처 능력을 기르는 훈련장에서 일이 일어났을 때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모든 상황에서 아버지나 보호자에게 말하라고 했다.
하지만 트레이시는 그녀의 보호자에게 말할 수 없다.
“유제니 불러올까?”
줄리아의 말에 로렌은 고개를 저었다. 유제니? 아이다는 레이디 비스컨의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전에 로렌이 곤란에 처했을 때 레이디 비스컨이 도와줬다고 들었다.
“지금은 어렵지 않을까?”
당장 이 방 밖에 밀러 경이 버티고 있다. 그가 유제니를 불러오게 내버려 둘 리가 없다. 게다가 이미 약혼식은 시작됐다. 유제니를 불러온다고 해도 그녀가 뾰족한 수를 낼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로렌은 트레이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여기에 누가 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네 선택이야.”
이 약혼을 할 건지 말 건지 결정해야 한다. 할 거라면 당장 차가운 물을 적신 수건을 가져오라고 해야 할 거다. 우느라 부은 눈을 가라앉혀야 할 테니까.
“내가 안 한다고 하면….”
트레이시는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겁을 잔뜩 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가 날 미워하실 거야.”
그녀의 말에 아이다는 한숨을 내쉬었고 줄리아는 트레이시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로렌은.
로렌은 숨이 가빠 왔다.
그녀도 그랬다. 친척의 요청을 거절하면 친척이 그녀를 미워할 거라 생각했다. 더 이상 그녀를 돌봐주지 않겠다고, 너처럼 배은망덕한 계집애는 혼나야 한다고 버림받을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를 꿈에서 봤다. 아니, 겪었다.
“저쪽이 약혼 안 한다고 하진 않겠지?”
줄리아의 질문에 아이다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안 할 거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지.”
“하퍼 남작한테 문제는 없어?”
하퍼 남작의 문제를 꼬투리 잡아서 약혼 거부를 하자는 말에 로렌을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세 사람이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하퍼 남작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방법이 없어.”
친구들의 대화를 듣던 트레이시가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결혼이다. 그녀가 감히 거부할 수가 없다.
그걸 보자 로렌은 다시 가슴이 아파 왔다. 그녀는 트레이시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하기 싫은 거지?”
트레이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결혼한다면 스무 살 중반쯤에나 하고 싶다. 아이다의 아버지 별장에도 놀러 가고 피아노도 더 배우고 싶다.
아직은 밀러 양이라고 불리고 싶었다. 하퍼 남작 부인이나 누군가의 엄마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숨을 토하듯 말했다.
“하기 싫어.”
“하기 싫다니!”
다음 순간, 문이 ‘쾅!’ 하고 열리면서 밀러 경이 들이닥쳤다. 트레이시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줄리아와 아이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렌은 재빨리 줄리아의 손을 잡고 그녀에게 속삭였다.
“하퍼 남작 부인 불러와.”
“뭐?”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줄리아는 로렌이 노리는 게 뭔지 금세 깨달았다. 그녀의 시선이 아이다를 향했다.
혹시 모르니 아이다와 로렌은 여기 있어야 한다. 줄리아는 슬금슬금 밀러 경의 시선을 피해 방 밖으로 나갔다.
“하기 싫다니? 하기 싫다니!”
“아, 아버지….”
분개한 밀러 경 앞에서 트레이시는 겁을 집어먹었다. 이게 무서웠다. 아버지가 이렇게 화를 낼까 봐.
그녀의 예상대로 밀러 경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어렵게 얻은 자리인데! 하퍼 남작 부인이 되는 게 쉬운지 알아?”
“죄, 죄송해요.”
반사적으로 트레이시의 입에서 잘못했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로렌은 재빨리 트레이시의 손을 잡았다.
마음 같아서야 유제니가 그랬던 것처럼 친구를 자신의 뒤로 숨겨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도 밀러 경이 무서웠다. 그때, 아이다가 그녀에게 다가와서 트레이시의 반대편 손을 잡았다.
“트레이시는 아직 졸업도 안 했어요. 너무 이르잖아요.”
아이다의 행동에 용기를 얻은 로렌이 말했다. 밀러 경은 그녀의 개입에 잠시 로렌을 쳐다봤다가 아이다와 트레이시를 돌아보았다.
건방진 것들. 그는 로렌을 노려보며 말했다.
“부모라면 자식의 미래를 위해 일찍부터 준비하는 법이야. 너 같은 애는 모르겠지만.”
로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이다와 트레이시는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트레이시가 충격을 받아 굳은 사이에 아이다가 말했다.
“일찍도 일찍 나름이지. 지금이 용 잡을 때도 아니고 이 나이에 무슨 결혼이에요?”
밀러 경은 아이다를 쳐다보다가 트레이시에게 고개를 돌렸다. 약혼하면 아카데미도 그만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녀석들과 친하게 지내니까 착한 트레이시가 약혼식 날 결혼하기 싫다는 헛소리를 하는 거다. 그는 트레이시를 설득하기 위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트레이시, 널 위해 일부러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남자를 고른 거다. 우리가 가족이 되면 얼마나 좋겠니?”
헛소리라고 아이다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로렌이 말했다.
“아저씨가 하퍼 남작 부인과 결혼하면 진짜 가족이 될 텐데요?”
시어머니와 장인어른이 아니라 새어머니와 새아버지가 된다. 물론 밀러 경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가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말하려 했을 때였다.
아이다가 끼어들었다.
“그러게. 아저씨가 하퍼 남작 부인과 결혼해요. 아저씨도 새 부인이 필요할 거 아니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밀러 경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왜 그런 귀찮은 여자와 결혼해?”
그 순간, 방 안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밀러 경은 표정이 변한 아이다와 로렌을 보고 인상을 썼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