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43 – 2
세 사람 다, 어디로 가는지 설명도 없이 밀러 경을 따라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아이다가 자세를 바로 하고 침착하게 물었다.
“하인에게 이렇게 대하시나요?”
당돌한 말에 밀러 경의 말문이 막혔다. 하인에게 이렇게 대한다 해도 문제다. 지금 밀러 경은 딸의 친구들을 하인 취급한 거니까.
그는 눈앞의 아이들이 그의 딸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트레이시가 착한 편이었군. 밀러 경은 혀를 차며 생각했다.
트레이시는 그가 따라오라고 하면 군말 없이 따라왔다. 하퍼 남작과 약혼하라고 했더니 그 역시 군말 없이 따랐다.
그래서 아까 전부터 하는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약혼하기 싫다니? 그가 어련히 알아서 잘 골랐을까. 하퍼 남작은 여러모로 완벽했다.
남들의 질타를 받지 않을 정도로 젊었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하퍼 남작 부인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래 봤자 계집일 뿐이다.
트레이시가 하퍼 남작과 결혼해 하퍼 남작 부인이 되면 하퍼 남작가와 먼포시 남작가 역시 그의 손에 들어온다. 트레이시가 남자아이를 낳으면 그 남자아이가 먼포시 남작이 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젊은것들이니 그가 먼포시 남작의 대행이 되겠지. 거기까지 계획을 완벽하게 짜 놓았다. 트레이시가 하퍼 남작과 결혼만 하면!
밀러 경은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아니, 아니지. 트레이시가 곤란한 일이 생겨서 말이야. 잠시 따라와 주겠니?”
그때까지 이 정도의 수치심은 견딜 수 있다. 밀러 경은 자신의 인내심에 감탄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트레이시에게 곤란한 일이 생겼다니 세 사람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아이들은 곧바로 밀러 경의 뒤를 따랐다.
“트레이시, 친구들 왔다.”
트레이시는 이 층의 자기 방에 있었다. 밀러 경은 트레이시의 방문을 노크하며 말했지만,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무슨 일이지? 세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다시 한 번 트레이시를 부른 밀러 경은 딸의 친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방에서 나오려 하질 않는구나. 설득 좀 해 봐라.”
‘해 줄 수 있겠니’가 아니라 해 보라고 말했다. 로렌은 밀러 경이 아까의 무례에도 사과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마음 같아서야 알아서 하라고 떠나고 싶지만, 저 안에 친구가 있다.
로렌은 문으로 다가가 노크를 하며 말했다.
“트레이시, 나야. 로렌.”
“나도 왔어.”
곧바로 줄리아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안에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있긴 하구나. 로렌은 복잡한 기분으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것을 들었다. 트레이시가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도 꿈을 꾸기 전부터 이상한 기분이 들었었다. 친척이 사 준 좋은 드레스 입고 무도회나 식당에 가는 건 좋았지만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좋지 않았다.
물론 이야기를 하다 보면 좋지 않은 기분도 사라졌다. 하지만 다시 기숙사에 돌아와 혼자 남으면 좋지 않은 기분이 돌아오곤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기분이 왜 좋지 않은지 몰랐다.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는 꿈을 꾸고 나서야 알았다. 아마 지금 트레이시가 꿈을 꾸기 전 그녀와 비슷한 기분이었겠지.
“지금 네 기분이 어떤지 알아.”
로렌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약혼을 하는 게 맞는지 모르는 거다. 아니, 자신이 이 약혼을 하고 싶은 건지 아닌지 모르는 거다.
“무서운 거지? 뭔가 잘못되는 거 같은데 뭐가 잘못되는 건지 모르겠고.”
로렌의 말에도 방 안은 한동안 조용했다. 하지만 로렌은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렸다. 그러자 달칵 하고 문손잡이가 돌아갔다.
“트레이시!”
문이 열리고 트레이시의 얼굴이 나타났다. 곧바로 밀러 경의 호통이 터졌다.
로렌은 겁에 질린 트레이시의 눈이 부어 있는 것을 보고 그녀가 울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도 그랬다. 로렌은 곧바로 문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밀러 경이 호통쳤지만, 로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줄리아와 아이다가 나섰다.
“우리보고 설득해 보라면서요.”
“맞아. 저 얼굴로 내려가면 사람들이 퍽 재미있어하겠어요.”
그제야 밀러 경의 눈에 트레이시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는 트레이시의 얼굴이 부었다는 것을 보고 인상을 썼다.
줄리아와 아이다의 말이 맞다. 트레이시가 저 얼굴로 내려오면 하퍼 가에서 무슨 일이냐고 한 소리 할 거다.
“들어가 봐라.”
밀러 경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물론 그는 이 자리에서 떠날 생각이 전혀 없다. 당장은 이 계집애들에게 시간을 주겠지만, 트레이시의 얼굴이 좀 가라앉으면 설득이고 뭐고 상관없이 끌고 내려갈 거다.
“무슨 일이야?”
트레이시의 방으로 들어간 로렌이 물었다. 그사이, 아이다는 밀러 경을 똑바로 쳐다보며 방문을 닫고 있었다.
“혹시 꿈을 꿨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이번에는 줄리아가 물었다. 꿈? 아이다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로렌과 줄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꿈? 꿈은커녕 한숨도 못 잤어!”
이윽고 트레이시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꿈을 꿔서 이러는 건 아닌 모양이다. 줄리아와 로렌의 시선이 부딪쳤다.
“그럼 왜 그러는 건데?”
초대장을 줄 때까지만 해도 트레이시는 침착했다. 갑작스럽지만 자신도 놀랐다고 말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 방을 서성이며 말했다.
“나, 나 결혼하는 거지? 그러니까 저 남자랑? 그, 하퍼 남작이라는 사람이랑?”
로렌은 한숨을 내쉬었고 아이다는 입을 딱 벌렸다. 역시 그래서 안 나오고 있었던 거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어? 줄리아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몰랐던 거 아니잖아?”
아이다의 질문에 트레이시의 걸음이 딱 멈췄다. 그녀는 아이다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누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말이 맞다. 몰랐던 거 아니다.
하지만 실감하지 못했다. 그녀가 트레이시 밀러가 아니라 트레이시 하퍼가 된다는 걸. 이 집을 떠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과 살아야 한다는 걸.
“아직 약혼일 뿐이잖아.”
줄리아는 트레이시를 위로하기 위해 말했다. 딱히 밀러 경이 명령한 걸 따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트레이시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약혼이 결혼이지!”
그녀의 아버지가 그랬다. 지금 약혼하고,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면 된다고.
이건 관대한 제안이었다. 하퍼 남작이라면 더 젊고 예쁜 여자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녀를 하퍼 남작 부인으로 만들기 위해 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냐고도 했다.
트레이시는 늘 그렇듯 그런 아버지를 고맙게 생각했다. 아니, 반은 짜증 난다고 생각했다. 항상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낳자마자 죽어 버린 어머니 대신 자신이 얼마나 희생했는지 떠들어 댔으니까.
하지만 짜증 나는 것과 별개로 이번 혼담은 그녀에게 좋은 게 맞았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좋은 혼담이었다.
하퍼 남작은 젊은 편이고 부유하니까. 생긴 것도 저 정도면 괜찮다. 손버릇이 나쁘다거나 뭔가에 중독돼 있다는 소문도 없다.
“결혼하기 싫은 거야?”
아이다가 물었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는 게 좀 어이가 없긴 하지만, 싫을 수도 있지.
트레이시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췄다. 모르겠다. 몰라서 무서웠다.
“하고 싶은 거야?”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줄리아가 물었다. 하기 싫어서 이러는 거 아니었어?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와 아이다 앞에서 트레이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모르겠는 거지?”
그때, 로렌이 물었다. 그녀는 트레이시의 기분을 정확하게 알았다. 친척이 그녀를 연회에 데려가서 모르는 남자의 옆에 앉힐 때마다 그런 기분이 들었으니까.
“하고 싶은지 하고 싶지 않은지 모른다고?”
그걸 어떻게 모르냐는 아이다의 반응에 로렌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녀는 트레이시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물었다.
“하고 싶지 않은데 그랬다가 사람들이 실망할까 봐 무서운 거잖아.”
정확하다. 트레이시의 눈이 동그래졌다. 로렌은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말처럼 이게 정말 좋은 기회라면 놓치는 게 아깝게 느껴지는 거고.”
“마, 맞아.”
배부른 소리라는 말을 들을까 봐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고민을 로렌이 정확하게 집어내자 트레이시는 입을 딱 벌렸다.
하퍼 남작은 괜찮은 배우자감이다. 아무것도 없는 그녀가 하퍼 남작 부인이 될 수 있는 건 아버지의 인맥과 그녀의 젊은 나이 덕분이다. 트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깝다고?”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며 아이다가 트레이시와 로렌의 맞은편에 앉았다. 줄리아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네가 더 아깝지, 트레이시.”
“빈말은 됐어.”
트레이시는 줄리아의 칭찬에 한숨을 내쉬며 부인했다. 그녀가 더 아깝다니. 누구라도 하퍼 남작이 아깝다고 생각할 거다.
“벌써 결혼하기 싫어. 아카데미 졸업하고 일이 년 정도는 나도 사교계에 데뷔해서 춤도 추고 음악회도 가고 싶어.”
아카데미 친구들과 함께 가는 소박한 소풍이 아니라 진짜 귀족 부인이 초대해 주는 소풍에도 참석하고 싶다. 듣기로는 사륜마차를 몇 대나 대동해서 하인들을 이끌고 호수 근처로 간다고 한다.
넓은 들판에 하인들이 천막을 세우고 차를 마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준다고 들었다. 마차 가득 싣고 온 갖가지 케이크를 내놓고 뜨거운 물을 끓여 그 자리에서 차를 내려 준다고 들었다.
뿐만이 아니라 자정 넘어서까지 무도회에 남아 있어 보고도 싶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않은 사람들은 잘 시간이 되면 집으로 보내진다. 그러니 무도회나 음악회에서 자정 넘어서까지 남을 수 있는 건 성인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무슨 말 할지 알아. 그런 거, 결혼해도 할 수 있다고 말할 거잖아.”
트레이시가 이런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말 안 한 건 아니다. 처음 약혼이 결정됐을 때 그녀는 유모에게 말했었다.
하지만 유모는 트레이시의 머리를 빗겨 주며 그런 건 결혼해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