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43 – 1
“요새 이상한 소문이 있더라.”
앉아서 쉬고 있던 줄리아와 로렌에게 아이다가 입을 열었다. 세 사람이 모인 것도 오랜만이라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유제니의 일을 도와주는 로렌은 줄리아와 자주 만났지만, 아이다는 다른 일로 바빴기 때문이다.
“트레이시 약혼자? 괜찮은 사람이라던데.”
아이다의 말에 줄리아가 대꾸했다. 오늘 약혼을 알리는 트레이시 밀러는 밀러 경의 딸로 세 사람의 아카데미 동기기도 했다.
트레이시는 괜찮은 아이다. 그녀와 약혼하기로 한 남자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들었다.
문제는 밀러 경이었다. 오늘 이 약혼이 트레이시의 의견과 상관없이 진행됐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트레이시가 약혼식 초대장을 주며 말했다. 갑작스럽겠지만 그녀 역시 갑작스럽다고.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서재로 불러 지시했다고 한다. 하퍼 남작과 결혼하라고.
“트레이시 약혼자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그렇게 말한 아이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에 아주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이 소문이 사실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잘됐다. 줄리아에게 물어봐도 될지 망설이다가 물어본 거였기 때문이다. 물어볼 시간은 많으니 지금은 훨씬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하는 게 낫겠지.
그녀는 물어보려던 불편한 소문을 뒤로 미루고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난 밀러 경이 트레이시를 늙어 빠진 남자한테 시집보낼까 봐 걱정했어.”
“아이다.”
주의를 주려는 듯 로렌이 가볍게 아이다의 이름을 불렀다. 여기는 밀러 저택이다. 밀러 경에 대한 욕을 하는 건 좋지 않다.
게다가 신부가 될 사람의 친구가 늙어 빠진 남자 같은 단어를 쓰는 건 더더욱 좋지 않고.
“넌 안 그랬어?”
하지만 아이다는 뻔뻔하게 물었다. 그녀는 정말 걱정했다. 셋째로 태어난 밀러 경은 작위를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처럼 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작위를 얻기 위해 트레이시의 어머니와 결혼했다. 만약 밀러 부인이 아들을 낳았다면 그 아들이 무슨 남작이 되었을 거라고 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밀러 경에게는 트레이시 하나뿐이다.
“밀러 경이 부인을 무척 사랑했다는 소문도 돌긴 했지.”
밀러 부인이 트레이시를 낳다가 사망했지만 밀러 경이 재혼하지 않자 그런 소문이 돌았다. 아이다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 소문을 믿었어?”
안 믿었다. 로렌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밀러 경은 트레이시가 십 대 중반이 되자 결혼시킬 집안을 물색했다는 걸 세 사람 모두 알고 있다. 트레이시가 직접 한 말이니까.
아이다의 말대로, 로렌과 줄리아 역시 밀러 경이 트레이시를 어느 나이 많은 귀족과 결혼시킬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밀러 경이 잡아 온 남자는 세 사람이 걱정한 것보다 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십 대 중반의 남작이니까.
“하퍼 남작 부인 성격이 장난 아니라던데.”
그때, 줄리아가 중얼거렸다. 밀러 경처럼 젊어서 배우자를 잃은 하퍼 남작 부인은 아들을 혼자 키우며 하퍼 남작가를 이끌어 왔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이끌어 왔다. 그녀는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하퍼 남작가를 이끌었다. 영지에서 일어난 문제를 처리하고 귀족 가문으로서 나라에 보여야 할 예의 역시 어긋남이 없었다.
운이 좋았던 건 하퍼 남작가가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는 거다. 같은 이유로 운이 나빴다고도 할 수 있지만.
“하퍼 경이랑 싸운 사건이 유명하지.”
하퍼 남작이 사고로 사망하자 남작의 동생은 남작 부인이 형을 살해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이다. 남작은 술에 취해서 말을 타다가 사망했으니까.
“왜 그런 거야?”
줄리아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었다. 설령 진짜 하퍼 남작 부인이 남작을 살해했다 해도 하퍼 경이 하퍼 남작이 될 일은 없다. 하퍼 남작 부부에게는 이미 아들이 있으니까.
“남작 부인이 사라지면 지금 남작의 후견인이 될 수 있잖아.”
하퍼 남작의 아버지가 사망한 건 남작이 막 세 살이 됐을 때였다. 세 살짜리가 남작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후견인이 수행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재정적 이득과 권력을 누릴 수 있겠지.
아이다의 설명에 줄리아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하지만 그래 봤자 남작이 성인이 되면 넘겨줘야 할 자리다.
“하퍼 남작은 아직도 집안 대소사를 남작 부인과 의논한대.”
아이다는 줄리아가 왜 이해하지 못하는지 알아차리고 덧붙였다. 남작이 성년이 되어 남작 업무를 수행한다고 해서 후견인이 손을 딱 뗄 수 있는 게 아니다. 심지어 그게 부모나 삼촌이라면 더 그렇겠지.
“허. 그럼 트레이시한테 별로 좋은 자리도 아니잖아.”
이미 오랜 시간 남작가를 휘어잡아 온 남작 부인이 있는 집에 남작 부인으로 들어가는 거다. 트레이시가 고생할 것 같다는 줄리아의 말에 로렌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결혼이라는 게 대부분 그렇잖아?”
귀족의 결혼이라는 게 그렇다. 이미 남작 부인이 존재하는 집에 새로운 남작 부인이 들어가는 거다. 그나마 새로운 남작 부인의 친정이 영향력 있는 집안이라면 조심하겠지만 영향력 없는 집안이라면 무시당하는 것도 흔하지 않다.
“그럼 트레이시가 남작 부인이 돼도 밀러 경이 얻을 수 있는 건 없는 거 아냐?”
그렇게 가문을 꽉 쥐고 있는 남작 부인이 있다면 밀러 경이 트레이시를 이용해서 하퍼 가문의 도움을 받기는 어려울 거다. 줄리아의 질문에 아이다 역시 인상을 썼다.
설마 밀러 경이 이제야 딸을 위한 선택을 하기라도 했나? 시어머니가 꽉 잡고 있긴 해도 하퍼 남작가는 괜찮은 집안이다.
“트레이시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은 작위를 두 개 가지게 되잖아.”
그때, 로렌이 입을 열었다. 하퍼 남작위와 트레이시의 어머니에게서 이어지는 남작위. 후자는 아들에게 이어지니 트레이시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은 남작위를 두 개 물려받게 된다.
로렌은 꿈에서 트레이시에 대한 이야기를 약간 들었었다. 그리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줄리아와 아이다의 이야기대로 현 하퍼 남작 부인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밀러 경은 남작의 할아버지가 되는 거지.”
잘하면 밀러 경이 손자를 대신해서 두 번째 작위의 대리가 될 수도 있다. 그는 그걸 계산한 거다.
“결국 트레이시를 가지고 장사를 한 거네.”
아이다가 빈정거렸다. 그녀의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많다. 당장 그녀의 아버지도 비슷한 짓을 하고 있으니까.
줄리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금세 세 사람이 앉은 테이블 위로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로렌은 복잡한 기분으로 앉아 있었다.
꿈에서 트레이시는 아버지와 하퍼 남작 부인 사이에서 곤란해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결혼한 여자라면, 특히 귀족 집안이라면 대부분 겪는 일이라고도 들었다.
트레이시가 안됐다고 생각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트레이시에게 이 결혼을 하지 말라고 말릴 수도 없는 일이니까.
결혼한 귀족 여성이라면 대부분 겪는다는 게 사실이라면, 트레이시의 미래가 유독 불행한 것도 아니다. 다들 비슷하게 불행하다면 그걸 불행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너희!”
그때, 세 사람의 테이블에 밀러 경이 급하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로렌은 심상치 않은 밀러 경의 표정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줄리아와 아이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차가 아주 훌륭하네요.”
솔직히 말하면 음식은 그냥 그랬다. 하지만 차는 정말로 괜찮아서 한 말이다.
하지만 밀러 경은 딸의 친구들이 뭐라고 하는지 관심 없었다. 그는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트레이시와 이야기했니?”
아직 못 봤다. 원래라면 트레이시는 약혼자와 함께 나와 인사를 하고 함께 식사를 했어야 한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탓인지 못 나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다.
“긴장해서 속이 안 좋다고 하던데요?”
아까 집사가 나와서 그렇게 말했다. 약혼식에 긴장한 모양인지 잠시 쉬고 있다고. 줄리아의 질문에 밀러 경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자 세 사람은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희가 트레이시에게 이상한 바람을 불어 넣은 게 아니란 말이지?”
밀러 경의 말에 세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이상한 바람? 제일 먼저 줄리아가 물었다.
“무슨 바람을 불어 넣어요?”
“결혼하기 너무 이르다거나.”
그거야 모든 사람이 다 생각하는 거다. 특히 줄리아와 로렌은.
트레이시는 열여덟 살밖에 안 됐다. 요새는 약혼도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하는 추세인데 졸업도 전에 약혼식이라니.
하지만 세 사람은 예의 바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트레이시가 더 잘 알 거다. 주변에서 이 나이에 약혼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집안끼리 어렸을 때부터 결혼시키기로 약속한 경우가 아니면 이렇게 일찍 약혼하는 경우는 없다.
“아무 말도 안 했어?”
밀러 경이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약간 윽박지르는 듯한 태도여서 아이다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안 했어요.”
“그래?”
그제야 밀러 경은 복잡한 표정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그대로 세 사람의 테이블을 떠나려는 것처럼 물러나더니 다시 다가왔다.
“잠깐 따라오거라.”
따라오라고? 다시 세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이번에 입을 연 건 로렌이었다.
“어디로요?”
“잔말 말고 따라와.”
세 사람의 테이블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에스컬레 경은 단 한 번도 줄리아에게 잔말 말고 따라오라고 말한 적이 없다.
반면 로렌은 익숙했다. 그녀의 친척이 늘 그렇게 말했으니까. 로렌은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줄리아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저희, 손님 아닌가요?”
“뭐?”
밀러 경은 로렌의 질문에 무슨 소리냐는 듯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줄리아 역시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유제니가 그랬다. 어떤 누구라도 자신에게 부당한 대접을 하는 걸 허락하지 말라고. 그게 설령 친구의 아버지라 해도 마찬가지다.
“무례하시네요.”
이어서 줄리아가 말하자 밀러 경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줄리아에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 고개를 들었다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아이다까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