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화 (194/239)

199화. 42 – 4

그렇지 않다. 클레어의 인생은 그녀의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다. 꿈에서도, 지금도.

꿈에서 깨어났을 때 클레어가 하고 싶었던 건 발시안에서 떠나는 거였다. 뭐, 여러 가지를 하고 싶긴 했다. 올리버와 리오스 경을 찾아가서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발시안에서 떠날까도 생각했다. 끔찍한 미래를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녀에게는 무능한 아버지 대신 챙겨야 할 아직 어린 동생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은혜를 갚아야 할 유제니가 있었다.

“아니.”

클레어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에 올리버는 쓰게 웃었다.

문득 클레어의 머릿속에 지금까지 생각하지 않았던 올리버에 대한 것들이 떠올랐다.

꿈에서 많은 귀족이 발시안 밖으로 도망쳤지만 몇몇 귀족은 남아 있었다. 그 몇몇 귀족에 올리버가 포함된다.

지금까지 클레어는 꿈에서 올리버가 남아 있었던 건 유제니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제니를 돕는다거나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동생이 섭정이 됐으니 그걸 이용해서 권력을 휘두르려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올리버는 동생의 뒤에서 권력을 휘두른 적이 없다. 그가 권력을 사용한 건 같은 귀족을 상대할 때뿐이었고 비스컨 가문은 유제니가 가장 큰 힘을 가졌을 때도 그리 부유하진 않았다.

그녀가 클레어 비스컨이 되었을 때 비스컨 가는 지금보다 더 가난했을 것이다. 아마도.

아주 잠깐 클레어는 비스컨 가의 하인이 몇 명인지 생각했다. 잘 기억은 안 난다. 하지만 지금 유제니를 만나러 방문할 때 보는 하인의 수보다 현저하게 적었다.

그게 전쟁 때문에 다들 도망쳐서인지, 아니면 비스컨 가가 가난해서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고.

“비스컨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뭘 하고 싶었는데?”

호기심에 클레어가 물었다. 올리버는 다시 콧잔등을 찡그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뭐라는 거야. 클레어는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올리버를 쳐다봤다. 집에서 동생에게 받던 시선을 밖에서도 받게 된 올리버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생각 안 해 봤어. 생각한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거야 많다. 여행도 좀 더 다녀 보고 싶고 카드 게임도 전문적으로 해 보고 싶다. 물론 유제니나 그의 어머니가 안다면 전문 도박꾼이 되려는 거냐고 기겁을 하겠지만.

“조정은 어때?”

클레어가 물었다. 그가 조정 클럽에 소속돼 있다는 걸 안다. 지난번 물놀이 때도 시합에 참여한 걸 봤다.

물론 그걸 보지 않았다 해도 올리버 비스컨이 조정 클럽이라는 걸 모를 수는 없다. 사교계의 젊은 여자들 사이에 조정을 하는 올리버는 꽤 유명하니까. 그가 탄 배가 나타나면 다들 걸음을 멈추고 지켜볼 정도다.

“뭐, 조정 선수로 좀 더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싶긴 해.”

그렇게 말한 올리버는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깊이 생각 안 해 봤다.

“귀족이라?”

귀족이라 못하는 거냐고 클레어가 물었다. 올리버는 잠시 미간을 찡그리며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거랑은 상관없어.”

조정 선수 중에는 귀족도 많다. 조정은 비용이 많이 들어서 집이 좀 부유해야 한다. 그러니 귀족이 하기 더할 나위 없는 운동이다.

물론 올리버가 못하는 데 비용 문제도 좀 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난 비스컨 백작이 될 테니까.”

그런데?

클레어의 얼굴에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이 떠올랐다. 조정 선수 중에 귀족도 많다며? 올리버는 우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영지로 돌아가야 하잖아. 본격적으로 활동한다 해도 오래 할 수 없지.”

그가 비스컨 백작이 된다면 비스컨 백작의 영지를 다스려야 한다. 비스컨 백작의 영지는 두 곳으로 델베키쉬와 컨서런트다. 두 곳은 가까운 편이지만 마차로 며칠은 가야 하고.

많은 가주가 사교 시즌에만 잠깐 수도에 올라왔다가 내려가는 이유다. 가문의 수익은 소유한 영지에서 나오니까.

물론 영지 경영을 믿을 수 있는 하인에게 맡겨 놓고 자신의 수도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도 있다. 영지에서 나오는 수익을 기대할 수 없을 때 그렇게 한다.

대표적으로 번즈 백작이 있다.

생각하지 못한 대답에 클레어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의 말이 맞다. 올리버가 본격적으로 조정 선수로 활동한다 해도 그는 비스컨 백작이 될 사람이다.

백작이 된다면 선수 생활을 접어야 할 터다. 그러면 결국 그의 팀에 영향을 끼치게 되겠지.

“처음부터 시도를 안 하면 중간에 포기할 필요도 없잖아?”

올리버는 그렇게 말하고 씩 웃었다. 그리고 생각났다는 듯 다음 그림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진짜 하고 싶은 사람에게 기회가 넘어갈 테고.”

올리버 비스컨이라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줄은 몰랐다. 클레어는 저도 모르게 올리버의 뒤를 따르며 그를 쳐다봤다.

꿈에서 늘, 비스컨 백작은 생각 따윈 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자기 멋대로에 하고 싶은 건 뭐든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렇게 깊은 대화를 한 올리버는 좀 달랐다.

“너는 어때, 라넌 경?”

이번에는 조금 작은 그림이었다. 올리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림을 구경하며 클레어에게 다시 물었다.

“어릴 때부터 기사가 되고 싶었나?”

그렇지 않다. 클레어가 기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꿈에서 깨어난 다음이었다. 어릴 때 아주 잠깐, 그녀도 아버지처럼 기사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은 있어도 되고 싶어 한 적은 없었다.

“되고 싶어 한 적은 없어. 내가 기사가 된 건 꿈을 꿨기 때문이거든.”

클레어는 그림을 쳐다보며 말했다.

“꿈에서 기사였나 보지?”

“아니, 그 반대였어. 무력해서 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키지 못했거든.”

“그게 유제니였어?”

올리버의 질문에 클레어는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봤다. 이상하게 닮았네. 그녀는 올리버를 보며 생각했다. 아까 보여 준 콧잔등을 찡그리는 버릇도 그렇고 이상한 구석에서 예리한 것도 그렇다.

유제니와 올리버는 닮은 부분이 꽤 많았다. 그게 클레어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음, 그렇지.”

“그럼 진짜로는 뭘 하고 싶었는데?”

이어진 올리버의 질문에 클레어는 인상을 썼다. 뭘 하고 싶었냐고?

생각해 보면 그녀도 뭔가를 하고 싶어 한 적이 없었다. 아이들은 보통 부모의 직업을 따라간다. 그리고 여자아이들은 결혼해서 가정을 돌본다.

“잘 모르겠어.”

클레어는 그림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기사단장이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기사의 정년은 빠른 편이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유제니의 살롱에서 귀족 아가씨들에게 호신술을 가르쳐 주는 걸 오래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결혼? 클레어는 결혼을 포기했다. 아니, 거부했다. 꿈에서처럼 집 안에 앉아 남편의 기분을 살피는 건 절대로 하지 않을 거다.

“뭐야, 그럼 너도 똑같네.”

어쩐지 재미있다는 듯한 목소리에 클레어는 다시 고개를 돌려 올리버를 쳐다봤다. 뭐가 똑같냐고 힐난하고 싶었지만, 그의 반갑다는 표정을 보자 그럴 기분이 사라져 버렸다.

“똑같지는 않지.”

클레어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녀는 아예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거고 올리버는 하고 싶은 게 있지만 하지 못하는 거다.

“레이디 비스컨이?”

그때,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는 이름에 클레어와 올리버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는 조각이 말한 줄 알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조각 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 올리버 비스컨의 동생.”

클레어와 올리버처럼 예술품을 구경하러 온 손님이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이었다. 클레어는 조각상 뒤에 누가 있는지 보려고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녀가 조각상 뒤에 있는 사람들을 보기 전에 올리버가 그녀를 잡아당겼다.

“쉿.”

갑자기 잡아당긴 탓에 클레어의 뒤통수에 올리버의 가슴이 닿았다. 그녀도 소리 낼 생각은 없었다. 어떤 놈이 감히 유제니에 대한 소문을 입에 올리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클레어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노려봤지만, 올리버는 신경 쓰지 않고 조각상 뒤를 지켜보고 있었다.

최근 유제니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이 많다는 건 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올해는 유제니에게 다사다난한 해였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어닝과의 소문도 있었고 엘리엇과의 소문도 있었다. 물론 올리버는 전자는 듣자마자 소문을 내뱉은 놈의 눈두덩이에 색을 칠해 주었다.

“허, 안 닮았다는 생각은 했는데.”

“비스컨 백작의 자식이 아니니까 그랬던 거지.”

충격적인 대화에 클레어의 몸이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들어 올리버의 표정을 살폈다.

그사이, 조각상 뒤의 남자들은 여전히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럼, 백작 부인이 불륜을 저지른 건가?”

“그렇겠지. 비스컨 백작의 자식이 아니라니까 말야.”

“백작도 알고 있고?”

“그건 모르지.”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대화를 나누던 남자들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 고상한 척하던 비스컨 백작 부인과 레이디 비스컨이 떠올랐다.

“예의범절을 그렇게 따지더니 결국 사생아였단 말이잖나.”

“그러게나 말이야. 고상한 척은 다 하더니….”

다음 순간, 남자들의 머리 위가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들이 그걸 깨닫기도 전에 남자들의 몸을 무거운 것이 덮쳤다.

“악!”

그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조각상은 남자들의 몸을 덮치고 쓰러진 뒤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울렸다.

“세상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다가왔다. 그리고 쓰러진 조각상과 그 조각상에 깔린 남자들 곁에서 올리버와 클레어를 발견했다.

“무슨 일이에요?”

사람들은 굳은 올리버와 클레어를 보고 물었다. 둘 다 하얗게 굳은 얼굴이었지만 다들 이 사고 때문에 놀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올리버가 말했다.

“이 빌어먹을….”

“조각상이.”

클레어는 올리버의 손을 재빨리 잡아챘다. 이런 소문이 커져서는 안 된다. 그녀는 올리버를 한 번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갑자기 쓰러졌어요. 이 사람들이 건드린 것 같아요.”

이렇게 큰 조각상이 아무 이유 없이 쓰러질 리가 없다. 클레어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이, 휴스턴 남작의 하인들이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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