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화 (193/239)

198화. 42 – 3

“좋아.”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올리버와 친해지겠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이 꿈에 얽매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인생은 꿈과 많이 달라졌다. 리오스 경과 원하지 않을 결혼을 할 필요도 없고 유제니는 평화롭고 안전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게다가 올리버의 말대로 그는 유제니의 하나뿐인 오라버니다. 유제니와 친구가 된 이상 올리버와도 적당히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낫겠지.

“어, 정말?”

생각보다 쉽게 클레어가 수긍하자 올리버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클레어는 그런 그에게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싫으면 말고.”

“아, 아냐.”

클레어의 마음이 바뀔세라 올리버는 재빨리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렇다고 이렇게 가까이 와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려다 말았다.

그리고 눈앞에 걸린 그림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림 좋아해?”

얼마 지나지 않아 올리버가 불쑥 물었다. 멍하니 그림을 구경하던 클레어는 그대로 올리버를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잘 몰라.”

뭐를? 올리버는 하마터면 그렇게 물어볼 뻔했다. 그림을 잘 모른다는 건지, 그림을 좋아하는지 모른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클레어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그림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거든.”

그림이라는 건 부유한 사람들의 취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제니는 그림을 좋아한다. 그림, 음악, 공연. 그녀는 그런 것들을 좋아했다.

그래서 클레어는 처음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을 모시게 됐을 때 꽤 고급스러운 취미를 가지고 있다고 속으로 빈정거렸다.

“음악이나 공연을 즐기는 건 알 것 같아. 그런 것들은 줄거리가 있으니까.”

특히 공연이 그렇다. 사랑 이야기도 있고 전쟁이나 성장하는 이야기도 있다. 클레어는 자신이 연극을 좋아한다는 걸 꿈 덕분에 알았다. 아마 꿈이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을 거다. 그녀는 책도 별로 안 좋아한다.

“그리고 시작과 끝이 있잖아? 그런데 그림은….”

시작과 끝이 없다. 그냥 그림 한 장만 덜렁 있을 뿐이다. 때때로 클레어는 커다란 그림 앞에 넋을 놓은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을 보며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든 거라곤 고작해야 이렇게 큰 그림을 어떻게 그렸을까 정도였기 때문이다.

“온전히 나한테 달려 있지.”

그때, 올리버가 말했다. 뭐라고? 클레어가 그를 쳐다보자 올리버는 그림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시작도 끝도 내게 달려 있잖아.”

음악이나 연극은 연주자와 배우가 시작을 하고 끝을 낸다. 더 듣고 싶고 더 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하지만 그림은 아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볼 건지 보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어디부터 어떻게 볼 건지도 보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하지만 이런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올리버는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그림이 내 거라면 말야.”

그렇게는 생각해 본 적 없다. 클레어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다시 그림을 쳐다봤다. 어느 서재를 그린 그림으로 여전히 그녀는 이 그림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작도 끝도 온전히 내게 달려 있다는 말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올리버를 쳐다보며 물었다.

“누가 한 말이야?”

“내가 한 말이거든?”

올리버는 울컥해서 말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어머니는 예술을 좋아해서 올리버와 유제니에게도 어릴 때부터 직접 가르치곤 했다.

물론 영지까지 선생님을 데려오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고.

“유제니는 어릴 때부터 여자애들이 할 만한 건 영 소질이 없었거든.”

올리버는 여자애들이라고 말할 때 손가락 두 개를 까딱였다. 그건 어머니가 하시던 말이다. 요리나 악기 연주 같은 것들.

참 못했다. 어지간한 걸로는 탈이 안 나는 올리버가 유제니가 만든 스콘을 먹고 배탈이 났을 정도로. 악기 연주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지난번 음악회 때 봤잖아?”

비스컨 백작 부인과 올리버의 연주에 비해 유제니의 연주는 빈말로라도 훌륭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럭저럭 박자를 맞추는 수준이긴 했지.

“하지만 검은 잘 다루잖아.”

클레어의 질문에 올리버의 콧잔등에 주름이 생겼다. 익숙한 버릇이라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유제니가 짓는 표정이다.

신기하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올리버가 입을 열었다.

“음, 수학도 잘해. 그건 알아?”

안다. 꿈에서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에게 보고를 할 때면 긴장하곤 했다. 그녀는 암산만으로 보고자의 계산이 틀린 걸 알아내곤 했으니까.

유제니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네.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이는 클레어를 보고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다음 그림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몸이 약하니까.”

거기까지 말한 올리버가 ‘그것도 알지?’란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안다. 클레어는 꿈에서 화가 나서 펄펄 뛴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열이 올라 쓰러졌던 걸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약하니까 어머니는 얌전히 앉아서 할 수 있는 취미를 붙여 주려고 했거든.”

사실, 귀족 아가씨들의 취미라는 게 대부분 앉아서 할 수 있는 거긴 하다. 수를 놓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거 같은 것들.

안타깝게도 유제니는 그런 것들에 전혀 소질이 없었다. 그녀가 가장 잘한 건 수학 문제를 푸는 거였고 독서는 소질과 상관없이 몸이 약해서 가지게 된 취미일 뿐이다.

“검은 날붙이를 다루면 건강해진다는 말이 있어서 배운 거고.”

그게 재능을 발굴하게 될 줄은 몰랐다. 세이마리아 역시 딸이 검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당황했다. 그리고 뭐든 재능이 있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해서 계속 배우게 둔 거다.

하지만 클레어는 전혀 다른 부분에 반응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날붙이를 다루면 건강해진다고?”

“어, 이쪽은 모르나? 어머니가 이야기하신 건데.”

세이마리아가 아는 말이니까 어쩌면 그녀의 친정이 있는 지역에서 내려오는 말인지도 모른다. 올리버는 그렇게 말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어디나 이런 식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미신 같은 게 있지 않은가. 열네 살 생일에 하얀 옷을 입고 자면 꿈에서 배우자를 만날 수 있다거나 하는 것들.

클레어는 어릴 때 들었던 미신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올리버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림이나 악기 연주도 나랑 같이 배웠지. 어머니께서 직접 가르쳐 주셨는데….”

귀족의 소양이라며 배웠다. 당연히 올리버는 자신보다 유제니가 더 잘할 거라 생각했다. 동생은 어릴 때부터 그보다 훨씬 야무진 아이였으니까.

세이마리아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기대를 깨 버리고 유제니는 끔찍한 실력을 보여 주었다. 심지어 그림을 배울 때는 텅 빈 종이 앞에서 대체 뭘 그려야 하느냐고 반문할 정도였다.

“뭐, 걔도 못 하는 게 있겠지.”

수학과 검에 재능이 있지만, 자수나 그림, 악기 연주는 끔찍했다. 올리버는 유제니가 처음으로 수놓은 꽃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에.”

클레어 역시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도 자수를 해 봐서 안다. 보통 처음으로 해 보는 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리고 다들 처음 수를 놓을 때 시작하는 게 꽃이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건 정말 끔찍했다는 말이다. 유제니가 못하는 것도 있다는 사실이 클레어에게 신기하고 유쾌하게 다가왔다.

“내가 한 게 더 낫더라니까.”

올리버가 그렇게 덧붙이자 클레어는 배를 잡고 웃어 버렸다. 이 키와 덩치를 가진 남자가 꼬물거리며 꽃을 수놓는 걸 상상하자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물론 어렸을 때니까 올리버도 작았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클레어는 키득거리며 물었다.

“그림의 시작도 끝도 내게 달려 있다는 말은 어쩌다 하게 된 거야?”

“아, 그거.”

유제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느라 잊어버렸다. 올리버는 턱을 쓸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걘 그림 그리는 걸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올리버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뭐든 동생보다 부족하던 올리버에게 그림이나 악기 연주는 처음으로 동생보다 잘하는 거였다.

그래서 신이 나서 종이를 가득 채우는 올리버에게 유제니가 물었다. 그림 그리는 게 재미있냐고.

“재미있었어?”

이야기를 들은 클레어가 물었다. 그냥 유제니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진짜 재미있었던 건가?

올리버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유제니보다 잘해서 기쁜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건 재미있다. 그러니 아직도 매년 사교 시즌이 되면 어머니와 함께 연주회를 하는 거겠지.

“재미있지. 처음부터 끝까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거잖아.”

유제니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대답이 다시 올리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스운 말을 하네. 클레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아는 한, 올리버 비스컨은 할 수 있는 한 멋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꿈에서.

꿈에서 비스컨 백작은 섭정인 동생을 믿고 날뛰었다. 저잣거리에서 다른 귀족과 싸운 적도 있고 불법 도박을 하다가 걸린 적도 있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에게 알리지도 않고 변경으로 달려가 참전한 적도 있었지.

“인생이 마음대로 안 된다고 생각되나 보지?”

클레어는 반사적으로 빈정거렸다. 그 정도면 올리버는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았다. 그가 이 나이까지 미혼인 것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올리버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본 순간, 클레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삐딱한 미소로 물었다.

“네 인생은 네 마음대로 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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