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42 – 2
할 리가 없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엘리엇이 내 손을 잡고 나를 잡아당겼다.
엇 하는 사이에 나는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었다. 엘리엇은 내 뺨을 감싸며 물었다.
“저도 해도 됩니까?”
대답하기도 전에 입술이 닿았다. 이럴 거면 뭐 하러 물어보냐고 하고 싶었지만, 그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부드럽게 헤집었다가 내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가 부리로 쪼는 것처럼 가볍게 쪽 하고 입을 맞추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네.
나는 멍하니 엘리엇을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 겪는 일이라 얼떨떨했다. 엘리엇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제가 사과해야 할까요?”
아니, 안 했으면 좋겠다. 정말로, 진짜로 좋았거든. 만약 그가 사과를 한다면 기분이 상당히 상할 것 같았다.
오. 그렇군.
나는 그제야 그가 왜 충격을 받았는지 이해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게요.”
엘리엇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무슨 뜻이냐는 표정에 나는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며 말했다.
“사과받기엔 너무 기분이 좋았거든요.”
엘리엇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정말로 행복한 것처럼 웃어서 나 역시 미소를 지었다.
* * *
“비스컨 남작!”
저택에 들어서던 올리버는 자신을 반기는 친구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악수 대신 서로의 주먹을 부딪치며 말했다.
“와 줘서 고마워.”
“좋은 그림 모았다고 그렇게 자랑을 하던데.”
“내가 모은 건 아니고. 동생이.”
휴스턴 남작가는 꽤 부유한 편이고 휴스턴 남작은 동생의 취미를 많이 도와주고 있다는 소문이다. 그 동생의 최근 취미는 괜찮은 화가를 발굴해 내는 거고.
하지만 실상은 동생이 그림에 너무 많은 돈을 써서 휴스턴 남작이 골치 아파한다는 거다. 남작은 올리버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마음에 드는 그림 있으면 말해. 싸게 넘길 테니.”
“그림은 나보다는 유제니가 더 잘 보는데.”
올리버는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예술적 소양은 그보다 유제니가 낫다.
“같이 오지 그랬어.”
유제니도 데려오지 그랬냐는 말에 올리버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데려올까 했다가 어머니께 한 소리 들었다. 여동생을 옆에 달고 가면 어느 여자가 말을 걸겠냐고.
꼭 여자가 말을 걸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냐고 대꾸했다가 이번엔 한 소리 정도가 아니라 등짝을 맞았다. 그렇게 잘 알면 여자들에게 말 좀 걸라고 말이다.
“뭐, 좀 둘러볼게.”
올리버는 그렇게 말하고 친구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림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친구가 초대하기도 했고 어머니께 혼이 나서 온 거다.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 갈 생각이었다.
그때 휴스턴 남작이 말했다.
“라넌 양도 왔군.”
익숙한 이름에 올리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클레어를 찾았다. 라넌 경이 왔다고? 친구의 말대로 클레어는 혼자 와서 벽에 걸린 그림을 구경하고 있었다.
“늘 혼자 다닌다던데.”
다시 휴스턴 남작이 클레어에 대한 정보를 던졌다. 그가 듣기로는 그랬다. 특히 왕궁에서 클레어는 항상 혼자 다닌다고 한다. 그녀와 같이 다닐 만한 기사가 없기 때문이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
올리버는 반사적으로 클레어의 편을 들었다. 딱히 휴스턴 남작이 클레어의 욕을 한 게 아닌데도 그랬다. 남작은 잠시 친구를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하지만 여기사라는 게 워낙 특이한 존재니까. 저 여자가 드나들 만한 클럽도 없지 않은가.”
그것도 그렇다. 기사 클럽이 있지만 거긴 여성 출입 금지다. 여기사가 탄생하긴 했지만, 그 규칙은 유지한다고 들었다.
올리버가 다니는 남성 클럽 역시 마찬가지다. 대상 자체가 남성 귀족이기 때문이다. 결국, 클레어가 드나들 만한 곳은 여성들의 전유물인 살롱이나 찻집 정도다.
하지만 찻집은 누구나 차를 마시는 곳이고 살롱은 누군가의 초대를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다. 결국, 클레어가 드나드는 살롱은 유제니나 유제니의 지인이 초대하는 곳 정도다.
“점점 늘어나겠지.”
올리버는 다시 그렇게 말했다. 그가 라넌 경에게 우호적이라는 것을 알아챈 휴스턴 남작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며 물었다.
“두 사람 사이가 안 좋은 줄 알았는데?”
라넌 경과 비스컨 남작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사교계에서 유명하다. 두 사람이 싸우는 게 자주 보이기도 했지만, 올리버도 클레어 이야기가 나오면 싫은 티를 냈기 때문이다.
친구의 지적에 올리버는 당황해서 잠시 멈칫했다가 변명했다.
“사이가 안 좋긴. 안 좋을 이유가 뭐가 있어?”
그것도 그렇긴 하다. 라넌 경이 유제니를 구해 준 것 역시 소소하게 소문이 났었다. 그리고 그녀가 올리버를 구해 준 것도.
휴스턴 남작은 그 소문을 떠올리며 별생각 없이 말했다.
“그래. 어떻게 보면 저 여자는 자네 남매의 은인이지.”
엇, 그런가?
올리버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게는 생각 안 해 봤다. 이걸로 클레어에게 말을 걸 수 있겠는데? 올리버는 금세 그렇게 생각하고 씩 웃었다.
그리고 친구인 휴스턴 남작의 어깨를 감사의 의미로 두어 번 친 다음 클레어에게 다가갔다.
“라넌 경.”
그림을 보고 있던 클레어는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표정을 굳혔다. 요즘 가장 만나기 싫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까딱하고 그 자리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옮긴 자리로 올리버가 따라오며 말했다.
“사람들 말로는 당신이 우리 비스컨 남매의 은인이라는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렇게 말하려던 클레어는 입을 다물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놀이 때 유제니를 구하는 엘리엇을 도와줬고 납치당한 올리버를 구하는 유제니를 도와줬다. 그녀가 한 거라곤 도와준 것뿐이지만 소문이 그렇게 난 거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말했다.
“전에 분명 헛소리라고 했을 텐데.”
곧바로 올리버의 얼굴에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 떠올랐다. 클레어는 인상을 쓰며 다시 말했다.
“내 꿈에서 당신과 나.”
전에 올리버가 물어봤다. 그녀의 꿈에서 두 사람이 부부였냐고. 다행히 클레어는 반사적으로 헛소리라고 말할 수 있었다. 헛소리라고 했지 아니라고 한 적은 없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그녀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다.
올리버 역시 클레어가 원하는 대로 그녀의 꿈에서 두 사람이 부부가 아니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신경이 쓰인다.
올리버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
“그래. 그랬지.”
“그런데 왜 이러는 거야?”
뭐가 왜 이러는 거냐는 건지 모르겠다. 다시 올리버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클레어는 살짝 짜증을 내며 다시 말했다.
“왜 친한 척하는 거냐고.”
친한 척한다니? 믿을 수 없는 말에 올리버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는 클레어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친한 척이 아니라 친해지려는 거야.”
“우리가 왜 친해져야 하는데?”
클레어가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올리버는 질세라 다시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우리 남매의 은인이니까.”
“그게 헛소리라는 걸 댁이 더 잘 알잖아.”
또 헛소리라고 하네. 올리버의 행동이 멈췄다. 그녀의 꿈에서 두 사람이 부부였냐고 물었을 때도 클레어는 헛소리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다시 클레어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그리고 내 동생과 친구잖아.”
그건 부인할 생각이 없다. 클레어가 현실에서 가장 만족하는 것 중 하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클레어는 다시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레이디 비스컨과 친구라고 댁과 친구가 돼야 할 필요는 없지.”
철벽이 따로 없다. 그리고 올리버는 놀랍게도 이런 철벽에 익숙했다. 그에게 철벽을 치는 유일한 여성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의 끔찍하게 사랑스러운 동생 유제니 비스컨.
“그만 가지 그래.”
올리버는 더 이상 클레어에게 다가가는 것을 멈추고 말했다. 그 옆은 기둥이다. 클레어 역시 그 사실을 깨닫고 말했다.
“댁이 그만 오면 되잖아.”
그게 올리버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는 물끄러미 클레어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리버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게 클레어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녀의 꿈에서 비스컨 백작은 종종 저것과 비슷한 눈으로 그녀를 보곤 했다. 그 표정이 묘하게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과 닮아 있어서 클레어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고.
“꿈을 잊는 게 어려워?”
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클레어가 발칵 화를 내려는 순간, 올리버가 물었다. 뭐라고? 클레어는 생각도 못 한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너 말야. 날 싫어하는 게 꿈 때문이라며. 나와 친해지기 싫은 것도 꿈 때문이잖아.”
꿈에서 그가 그의 동생을 죽였기 때문에, 정확히는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죽음에 일조했기 때문에 그가 싫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꿈이다. 현실과는 다르다. 이뤄질 리도 없다. 클레어는 지금 꿈에 얽매여서 올리버를 거부하고 있다.
“아냐?”
이어진 올리버의 확인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클레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맞다. 그녀가 올리버를 멀리하는 건 꿈 때문이다.
물론 그의 생각대로 그가 유제니를 죽게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니, 처음엔 그랬다. 꿈에서 깨어나 그를 처음 봤을 때는 그래서 증오했다.
하지만 지금 클레어가 올리버를 향해 가진 감정은 복잡해서 그녀조차도 어떤 감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너와 친해지고 싶어, 라넌 경. 유제니와도 친구잖아. 그럼 나와도 친해지면 안 돼?”
처음 듣는 말에 클레어는 다시 넋을 잃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올리버가 그녀에게 이렇게 친해지고 싶다고 말할 줄은 몰랐다.
문득, 그녀는 올리버가 자신을 라넌 경이라고 부르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심지어 여자들조차도 그녀를 라넌 양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하지만 올리버는 실수를 지적한 다음부터는 그녀를 무조건 라넌 경이라 부르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클레어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큰 올리버를 새삼스럽게 쳐다봤다.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꼭 간식을 조르는 강아지 같다.
어쩌면 비스컨 남작은 그녀의 생각과 조금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그녀가 생각한 것과 조금 달랐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