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42 – 1
“아가씨, 번즈 백작님이 오셨습니다.”
빅스가 응접실에 들어와 손님의 방문을 알린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맙소사. 내 얼굴이 붉어졌을 게 분명하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쳐다봤고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자, 작은 응접실에서 맞이할게요.”
“여기로 안내해도 되는데?”
안 된다. 하마터면 안 된다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나는 어머니께 침착하게 말했다.
“잠깐 이야기할 게 있어서요.”
우선 그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시 얼굴이 뜨거워지려는데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여기에서 이야기하렴. 가기 전에 나 부르는 거 잊지 말고. 번즈 백작에게도 인사를 하고 싶거든.”
“그럴게요.”
어머니가 응접실에서 나가자 빅스 역시 자리를 떴다. 맙소사. 세상에. 나는 그대로 응접실 안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나는 그에게 아주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 그리고 사과도 못 하고 헤어졌고.
그때 에스컬레 경이 지하실 문을 연 게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유제니.”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나는 펄쩍 뛰어올랐다. 세상에. 뒤를 돌아보자 엘리엇이 완벽하게 잘생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더듬더듬 인사를 건네자 성큼 안으로 들어오더니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손등에 키스를 하고 물었다.
“백작 부인께서 수도를 떠나신다는 소문이 돌던데요.”
아, 그거.
안전한 주제가 흘러나오자 조금 진정이 됐다. 나는 엘리엇에게 자리를 권한 뒤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네. 아버지가 보고 싶으신가 봐요.”
금세 집사가 차를 가지고 왔다. 차는 내가 따르는 게 좋겠지. 나는 그에게 두고 나가라고 말한 뒤 찻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백작 부부께선 사이가 좋으시군요.”
엘리엇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다들 그렇게 말한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나러 영지로 내려가신다고 이야기하면 말이다.
아직 사교 시즌이기 때문이다. 봄부터 가을까지가 사교 시즌이다. 다들 늦가을쯤 되면 너무 추워지기 전에 자신의 영지로 떠난다. 너무 추운 지역에 영지가 있는 사람들은 수도에 남기도 하고.
하지만 어머니는 아직 초가을인데도 영지로 먼저 가시는 거다.
“그런 편이에요.”
나는 엘리엇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적당히 대꾸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이가 꽤 좋긴 하지만 이번 일은 나와 올리버에게도 생소하다.
간혹 어머니가 여름쯤에 영지로 한 번 다녀오신 적도 있긴 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일찍 돌아가시는 일은 없다.
올리버가 아카데미를 다니는 동안에는 우리는 항상 여름을 여기서 지냈다. 그때는 아버지도 방학을 맞이한 올리버를 보기 위해 수도로 오셨었고.
“아버지께서 보고 싶다고 편지를 보내신 모양이에요.”
나는 엘리엇의 앞에 케이크 한 조각을 놓은 접시를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올리버의 추측이었다. 아버지께서 보고 싶다고 한 게 아니겠냐고.
하지만 나는 아닌 것 같다.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영지로 먼저 돌아가야겠다고 말씀하시긴 했지만 설레거나 좋아하시는 게 아니라 약간 굳은 표정이었거든.
설마 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아진 건 아니겠지. 그런 걱정이 들었지만 나는 재빨리 털어 냈다. 만약 그렇다면 어머니는 먼저 수도에 있는 괜찮은 의사를 찾아보셨을 거다.
“당신도 함께 갑니까?”
엘리엇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 보통 가족은 같이 움직이니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어머니만요. 저와 올리버는 여기 좀 더 있다가 겨울이 오기 전에 가려고요.”
나는 같이 가고 싶어 했다. 어머니의 태도가 좀 걱정됐거든. 하지만 어머니가 말렸다. 여기 남아서 올리버의 연애 사업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라고 하셨지.
그놈의 연애 사업, 시작이나 했는지 모르겠는데.
그리고 나와 엘리엇의 사이도 잘 진전해 보라고 하셨다. 그걸 생각하자 얼굴이 달아올라서 나는 재빨리 찻잔을 들어 올렸다.
“다행이군요.”
남의 속도 모르고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가 차를 한 모금 마시는 걸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정식으로 사과할게요.”
그 순간, 엘리엇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는 가만히 자신이 마신 차를 내려다보더니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엘리엇이 괜찮다고 할 줄은 알았다. 그렇다고 내가 한 짓이 무례한 짓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고.
나는 내가 왜 그랬는지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러자 엘리엇의 얼굴에 이상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다시 자신의 찻잔을 쳐다보며 물었다.
“차에 뭘 넣으신지는 아시는 거겠지요?”
“차에, 네?”
“차에 뭘 넣어서 사과하시는 거 아닙니까?”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나는 멍하니 엘리엇을 쳐다봤고 그는 다시 자신의 찻잔을 들어 올리더니 찻물의 색을 확인했다. 그리고 냄새를 맡더니 한 모금 홀짝 마시고 말했다.
“무색무취에 무맛이기까지 한데요. 이런 독이라면 스테노나 럼버일 것 같은데. 맞습니까?”
“스테, 뭐요?”
처음 듣는 단어의 향연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엘리엇은 내 얼굴을 한 번 보고 다시 차를 마시더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차에 독을 타신 게 아니군요. 그럼 왜 사과를 하신 겁니까?”
왜 사과를 하다니, 내가 댁한테 사과할 게 그거 말고 뭐가 있어? 나는 어이가 없어서 엘리엇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물었다.
“내가 차에 독을 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과하신 게 아닙니까?”
“그런데 마셨어요?”
심지어 괜찮다고까지 했다. 방금 대체 무슨 대화가 오갔던 거지?
“당신이 준 거니까요.”
엘리엇은 천연덕스럽게 말하더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무슨 사과를 하신 겁니까?”
“며칠 전에, 그, 지하실에서….”
다시 떠올리니 얼굴이 뜨거워진다. 내가 엘리엇에게 입을 맞췄고 깜짝 놀라서 펄쩍 뛰어올랐을 때 에스컬레 경이 지하실 문을 열었다.
“당신은 나를 구하러 온 거였잖습니까.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아니, 그거 말고….”
그, 그, 그거.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엘리엇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계단 위에서요. 내가 당신한테….”
“키스했죠.”
다시 얼굴이 확 하고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엘리엇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걸 사과하시는 겁니까?”
당연하다. 나는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기 위해 차를 마셨다. 그리고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어두웠고 갑작스러웠잖아요. 당신은 아무 준비도 안 돼 있었고요.”
그제야 엘리엇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약간 충격받은 표정이기도 했다. 그는 입술을 살짝 벌리고 나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지금 저한테 키스한 걸 사과하시는 겁니까?”
어째 엘리엇의 태도를 보자 내가 키스한 게 문제가 아니라 사과한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혹시 후회하시는 겁니까?”
엘리엇이 물었다. 나는 내가 그에게 키스한 걸 후회하는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자 내가 고민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는지 엘리엇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 이런. 나는 허둥지둥 말했다.
“그, 한 걸 후회하는 건 아닌데요.”
엘리엇의 고개가 나를 향했다. 아니, 한 걸 후회해야 하나? 나는 제발 앉으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말을 이었다.
“그, 그 상황에서 한 걸 후회했달까. 그, 거긴 너무 어둡고….”
내가 엘리엇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다. 그는 싫다는 표현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혹시 엘리엇이 싫었는데 내가 갑자기 하는 바람에 거부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그게 걱정이었다.
“상황만 달랐다면 사과하지 않으셨을 거라고요?”
그렇다. 엘리엇의 질문에 나는 내 손을 꽉 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밝고 안전한 곳이었다면 사과할 필요도 없었겠지.
그러자 엘리엇이 테이블을 돌아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하세요.”
“뭐, 네?”
“여기는 밝고 저는 준비가 돼 있으니까요. 하세요.”
그러더니 이제는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어, 진짜로?
나는 저도 모르게 살짝 열린 응접실의 문을 확인했다. 저 문이 열린 이유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열려 있는 거다. 하지만 엘리엇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듯 내게 완전히 맡기고 눈을 감고 있었다.
이래도 되나? 나는 눈을 한 바퀴 굴렸다. 그때 엘리엇이 눈을 감은 채 물었다.
“하기 싫으신 거면 일어나겠습니다.”
“아니.”
하기 싫은 건 아니다. 아니, 잠깐.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말한 뒤 엘리엇을 보자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했네. 나는 심호흡을 하고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엘리엇의 얼굴이 나보다 위에 있었기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조심스럽게 입술이 닿았다.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우리가 마신 차 맛이 났다.
나는 슬쩍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엘리엇의 얼굴이 나를 따라오다가 멈췄다. 곧이어 그의 파란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차갑게 보이던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지더니 엘리엇이 물었다.
“사과하실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