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41 – 4
“저, 혹시 그 남자를 보낸 게 당신입니까?”
두 용병의 대장은 높은 분을 모신다는 남자와 계약을 했다고 했다. 누군지 알 필요 없다고도 했고.
그게 비스컨 가의 아가씨였던 걸까. 비스컨 백작가라면 상당히 높은 집안이니 높은 분이라는 말도 맞다. 용병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유제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이자를 잡았다고 하기에 보러 왔지.”
아까보다 훨씬 여유롭고 당당한 목소리에 남자들의 걸음이 멈췄다. 그들은 어두운 철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안이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다.
그럴듯하다. 대장은 그들이 자세한 걸 알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들의 농담대로 사랑에 빠진 귀족 아가씨가 번즈 백작을 납치한 모양이다.
용병들은 피식피식 웃으며 유제니에게 말했다.
“이 남자가 그렇게 애타게 했나 보군요.”
유제니의 얼굴이 잠깐 달아올랐다. 다행히 지하실 안이 어두워서 그게 잘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연기를 시작하려 했을 때, 용병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이 평범하게 생긴 아가씨가 유명한 이유가 또 있다. 용과 싸워 이긴 용사, 번즈 백작이 목매고 있다는 소문 때문이다.
“잠깐.”
그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유제니를 바라보며 동료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동료를 향해 말했다.
“번즈 백작이 목매는 여자가 이 여자 아니었어?”
“목, 뭐?”
처음 듣는 말에 유제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뭘 매달아? 하지만 동시에 동료의 말을 들은 용병의 눈도 커졌다. 그는 곧바로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아가씨, 순순히 우리를 따라오시죠.”
이 정도면 더 이상 연기가 통하지 않는다. 유제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검을 뽑으며 말했다.
“내가 할 말이야. 순순히 엘리엇을 풀어 줘.”
용병들은 유제니와 그녀가 든 검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가 검을 휘두르겠다고? 둘 중 한 명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가씨, 괜히 다치지 말고 그 검, 이리 주시죠.”
유제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저렇게 상대방을 얕보는 사람은 다치기 쉽다. 그리고 유제니는 자신의 검에 누군가 다치는 걸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난 아무도 안 다쳤으면 좋겠어.”
유제니의 말에 용병들이 다시 킬킬대고 웃었다. 아가씨가 겁을 먹은 모양이군. 하지만 유제니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쳐야 한다면 당신들이 다치는 게 낫겠지.”
잔인하지만 그래야 한다. 그녀는 다치기 싫고 엘리엇이 다치는 것도 싫으니까. 두 사람이 다치지 않기 위해 상대방을 죽여야 한다면 그래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유제니는 내키지가 않았다. 누군가를 죽이다니,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누군가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유제니의 검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걸 본 용병들은 그녀가 완전히 겁을 집어먹었다고 생각했다.
이건 뭐, 두 명이나 덤빌 필요도 없겠는데?
“살살 해.”
램프를 든 용병이 그렇게 말하고 뒤로 물러났다. 다음 순간, 검을 든 용병의 앞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엘리엇은 순식간에 그의 팔을 내리쳐 검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대로 검을 휘둘러 램프를 든 용병의 손에 상처를 입혔다.
“아악!”
“엘리엇!”
램프를 떨어트리는 용병의 비명과 유제니의 외침이 겹쳐졌다. 그가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엘리엇은 팔을 부여잡는 용병의 머리를 걷어차 그를 기절시킨 뒤 검을 반대편으로 옮겼다.
그리고 남은 용병을 향해 휘둘렀다.
“악!”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엘리엇은 자신의 검이 용병의 팔에 깊게 스쳤다는 것을 알았다. 아예 분리하고 싶지만, 유제니가 그런 걸 보지 않길 바란다.
“죄송합니다.”
남은 용병까지 팔을 붙잡고 쓰러지자 엘리엇은 곧바로 유제니에게 다가와서 사과했다. 그리고 그녀가 쥐고 있는 검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과는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였다. 유제니는 엘리엇이 용병 두 명을 순식간에 제압하자 입을 딱 벌렸다. 엘리엇은 그녀의 검을 가져가며 말했다.
“당신이 검을 들게 했으니까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유제니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지난번에도 내가 검을 들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때는 누군가를 죽일 각오는 안 하셨잖습니까.”
정확하다. 유제니는 엘리엇이 자기 생각을 읽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하지만 엘리엇은 그녀가 계속 놀라도록 둘 수가 없었다.
그는 유제니의 등에 손을 대며 물었다.
“혼자 왔습니까?”
“오, 그럴 리가요.”
그녀가 아무리 엘리엇을 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일 각오까지 했다지만 자신도 죽을 생각이었던 건 아니다. 유제니는 엘리엇이 가져간 자신의 검을 빼앗으며 말했다.
“에스컬레 경과 왔어요. 검은 늑대들 몇 명도요.”
혹시 몰라서 엘리엇은 유제니가 가져간 검을 가져오지 않았다. 대신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에스컬레 경은 당신이 여기 있는 걸 압니까?”
유제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걸로 답은 충분하다. 엘리엇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와 함께 지하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비슷한 짓을 한 적이 있어요.”
유제니는 엘리엇을 따라 지하실 계단을 올라가며 입을 열었다. 약간 기가 죽은 목소리라 엘리엇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홉 살 때였나 열 살 때였나. 신문 기사를 봤거든요.”
아주 작은 부분만 할애한 기사였다. 가난하거나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 유괴되고 있다는. 아이들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지만, 수사가 지지부진하다는 기사에 유제니는 분개했다.
가난한 집이라 치안관의 관심이 덜할 수도 있다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는 결심했다. 그녀가 가난한 집 아이처럼 꾸미고 납치가 되어야겠다고.
어렸고 잘 몰랐다. 그녀가 납치돼도 부모님이 그녀를 찾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짓이기도 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엘리엇의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열 살 즈음의 유제니라니, 그는 본 적도 없다. 그때도 지금처럼 고집불통에 하고 싶은 건 기어코 하고야 마는 어린이였을 것이다.
“진짜로 납치되진 않았어요.”
잠시 걸음을 멈췄던 엘리엇이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당연하다.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낡고 오래된 옷을 입고 나갔지만, 귀족의 옷이다. 아무리 나쁘게 봐도 아가씨의 옷을 물려 입은 하인의 자식 정도로 보였겠지.
그리고 귀족의 옷을 물려 입을 정도의 하인이라면 평민 중에서는 사정이 상당히 좋은 편에 속한다. 가난하거나 부모가 없는 아이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건 다행이군요.”
엘리엇은 가장 상단의 계단에 올라 지하실 문손잡이를 잡으며 말했다. 바깥이 어떤지 살펴야 한다. 에스컬레 경과 그 부하들이 가까이 있다면 좋지만, 아니라면 유제니를 보호해야 하니까.
“대신,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깨달았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엘리엇은 유제니의 말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행동에 유제니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지하실이 어두워서 엘리엇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가진 게 가문뿐이더라고요.”
세상은 아주 넓고 그녀가 모르는 게 많았다. 백작가의 아가씨로서 살았지만, 유제니는 자신에게 가문을 빼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난 내게 가문 외에 내가 만든 뭔가가 있길 바랐거든요.”
지식, 경험, 실력 같은 것들. 그것 역시 결국은 가문이 있었기 때문에 쌓을 수 있는 거긴 하다. 그래서 유제니는 엘리엇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는 그녀와 달리 평민이었지만 홀어머니 밑에서 누구보다 훌륭하게 스스로를 만들었으니까.
“내가 괜한 짓을 했어요.”
유제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하실 문을 살짝 열던 엘리엇은 깜짝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물었다.
“괜한 짓이요?”
전투가 저 바깥쪽에서 이어지는지 간간이 싸우는 소리가 들리긴 하다. 하지만 가까운 곳은 조용했다.
“알아서 나올 수 있었잖아요. 괜히 구해 주겠다고 덤볐다가 당신에게 짐만 늘렸어요.”
엘리엇은 유제니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보다 계단 하나 아래에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조심스럽게 유제니보다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 두 개쯤 내려가야 두 사람의 얼굴 높이가 비슷해진다. 그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 유괴범은 어떻게 됐습니까?”
잡았다. 딸의 기상천외한 행동에 기겁한 비스컨 백작 부부가 국왕에게 요청했고 며칠 안 돼 잡았다고 들었다.
유제니의 대답에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못 잡았다면 그가 잡을 생각이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났다 해도 상관없다.
“당신 덕에 유괴범을 잡은 거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아이들을 구한 건 유제니다. 그녀의 철없는 행동이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렸을지는 몰라도 다른 아이들을 구했다.
엘리엇은 그런 유제니가 걱정스럽고 화가 나면서 동시에 좋았다. 그녀의 그런 점이 그를 화가 나서 돌아 버리게 만들면서 동시에 견딜 수 없게 사랑스럽기도 했다.
“당신은 나를 걱정했고 나를 구하러 달려왔습니다. 기사처럼요.”
솔직히 말하면 검을 꽉 쥐고 지하실로 내려온 유제니를 봤을 때 그는 기사보다는 요정이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제니는 요정보다는 기사가 되고 싶어 했다.
엘리엇은 유제니가 들고 있는 그녀의 검에 손을 얹었다. 어릴 때 그녀는 다른 아이들을 위해 자신을 위험에 빠트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를 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칠 각오를 했다.
“무엇 하나도 괜한 게 없습니다.”
유제니는 엘리엇을 구하기 위해 달려왔다. 자신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엘리엇을 벅차게 만들었다. 그녀가 위험해졌다는 사실에 화가 나면서도 그녀가 자신을 걱정했다는 사실에 하늘을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유제니, 나는 당신의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나를 걱정한 마음 한 조각까지, 모두 다. 당신이 구한 아이들도 그럴 겁니다.”
유제니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열린 지하실 문을 통해 달빛인지 램프 불빛인지 모를 빛이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유제니 눈에 엘리엇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농담도, 그녀를 달래기 위해 하는 말도 아니었다. 유제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