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41 – 3
“잠깐.”
로인은 곧바로 마차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유제니를 막았다. 비스컨 가에서 가장 고집불통인 사람답다. 유제니는 로인이 뭐라고 막아도 엘리엇을 구하러 뛰어들 생각이었다.
이래서야 막을 수도 없겠군. 유제니의 얼굴을 본 로인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가 먼저 들어가마.”
먼저 들어간댔지 들어가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유제니의 눈이 살짝 커졌다. 로인은 부하들에게 준비하라고 신호를 내린 뒤 유제니에게 말했다.
“삼십 분. 삼십 분 뒤에 들어와.”
삼십 분이면 그와 그의 부하들이 정리할 시간이다. 로인의 말에 유제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인은 그런 유제니에게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이며 다시 말했다.
“삼십 분이야.”
삼십 분이 대체 어느 정도일까. 유제니는 품 안에 시계가 있다는 걸 무시하며 생각했다. 창밖으로 기사들이 조심스럽게 저택으로 접근하는 게 보였다.
엘리엇이 저기 있다. 몇 시간 전에 베라가 와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번즈 백작을 함정에 빠트렸다고.
물론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까지는 그녀도 몰랐다. 베라가 아는 거라곤 그녀의 아버지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번즈 백작을 함정에 빠트렸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죄책감과 두려움에 술을 잔뜩 마시고 돌아와 술주정을 했다는 것도.
하몬 경이 번즈 백작을 함정에 빠트렸다는 건 그 술주정에서 들은 거였다. 번즈 백작을 어디로 데려갔는지는 하몬 경을 데려온 하몬 가의 마부에게 들었고.
다행히 베라는 가장 중요한 것 몇 가지를 알았다. 그녀는 번즈 백작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 아니, 들었다. 드래곤과 싸워 살아남았고 무사히 왕궁에 들어왔다.
몇 개월 동안 이어진 싸움 좀 한다는 사람들과의 싸움에서도 전부 이겼다. 게다가 그녀의 어머니조차 한탄하는 사교계에서도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있다.
아버지가 뭘 믿고 그런 짓을 한 건지는 몰라도 번즈 백작이 함정에 빠졌다는 걸 안다면 하몬 가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화가 난 번즈 백작을 달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레이디 비스컨.
“저쪽이다!”
몰래 숨어 들어간 기사들이 용병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전투가 벌어졌다. 유제니는 저택을 지켜보다가 사람들이 전투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마차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마치 길을 아는 것처럼 저택 뒤편으로 뛰어갔다.
“침입자다!”
침입자라는 말에 유제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재빨리 기둥 뒤에 숨었다. 다행히 용병들이 말한 침입자는 그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유제니는 용병들이 저택 앞쪽으로 달려간 다음에야 고개를 내밀고 한숨을 내쉬었다. 에스컬레 경의 말이 맞았다. 침입하는 데는 어두운 편이 낫다고 했지.
어둠과 커다란 기둥이 그녀의 몸을 숨겨 준 모양이다. 유제니는 주변을 돌아본 뒤 저택 뒤편에 난 문을 쳐다봤다.
지하로 내려가야 한다. 엘리엇이 거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문은 아니다. 그녀는 문에서 약간 떨어진 창문을 발견하고 거기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었다.
“침입자라고?”
그녀가 창문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이 벌컥 열리면서 용병들이 튀어 나왔다. 그들은 창문이 열린 걸 발견하지 못하고 침입자를 찾기 위해 저택에서 멀어졌다.
저택 안은 어둡고 냄새가 났으며 낡은 티가 났다. 유제니는 바닥을 내려다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발소리를 내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밟지 않는 거다. 하지만 걸으면서 바닥을 밟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구두를 벗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 낡고 더러운 바닥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다. 만약 못이라도 튀어나와 있거나 타일이 깨져 있기라도 하면 그녀는 엘리엇을 찾기도 전에 파상풍으로 죽을지도 모른다.
“죽을 순 없지.”
유제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지하로 가는 계단을 찾기 시작했다. 에스컬레 경의 말대로 다치면 많은 사람이 슬퍼할 거라는 걸 안다. 아마 엘리엇도 자신을 구하려다 그녀가 다치면 아주 많이 슬퍼할 거다. 어쩌면 좀 화를 낼지도 모르고.
그러니 유제니는 다칠 생각이 없다. 그녀는 가지고 온 검을 꽉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야 한다면 검을 뽑을 거다.
“침입자?”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남자들의 구두 소리와 말소리가 들려왔다. 유제니는 깜짝 놀라 멈춰 섰다. 그리고 숨을 곳을 찾다가 벽에 바짝 붙었다.
숨을 곳이 없다. 저들이 코너를 돈다면 그녀를 발견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검 좀 쓰는 놈들 같다는데.”
두 명이군.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에 유제니는 다시 검집을 잡았다. 남자들은 침입자가 어디서 온 건지 대화를 나누며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남자들이 오는 반대편 복도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맙소사. 유제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처음 나타난 두 남자에게는 그녀가 보이지 않지만 두 번째 나타난 남자에게는 그녀가 보인다.
아마 밝았다면 상대방은 그녀가 아예 투명해질 기세로 창백해진 것까지 볼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저택 안은 어두웠고 반대편에서 나타난 남자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는 벽에 붙은 유제니를 못 본 것처럼 지나쳤다. 그리고 용병들 앞을 막아섰다.
“어.”
남자를 발견한 용병들도 멈춰 섰다. 그들은 남자가 누군지 안다. 아니,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누가 무슨 일을 시키기 위해 데려온 자인지는 알았다.
그게 문제였다. 남자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른다는 거다. 용병들이 뭐라고 할지 망설이는 사이, 남자가 말했다.
“침입자라면 현관 쪽에 나타났다는 것 같던데.”
“뭐라고?”
침입자가 저택 밖에 나타났으니 몇 명은 저택 안을 순찰하라는 명령을 받은 터였다. 남자의 말에 용병들은 깜짝 놀라서 서로를 쳐다봤다. 저택 밖에 있다던 침입자가 현관 쪽에서 나타났다면 당장 현관으로 가 봐야 한다.
“번즈 백작은 걱정하지 말게. 내가 방금 보고 왔는데 지하실은 조용하더군.”
남자의 말에 용병들은 그대로 몸을 돌려 현관 쪽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달리고 나서야 남자 역시 남자들과 같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상하네. 유제니는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개를 내밀었다. 복도는 어두워서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 남자가 날 못 본 걸까?
위치상으로는 못 봤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녀를 도와줬다는 말인데.
왜 도와준 건지를 모르겠다.
유제니는 고개를 갸웃하며 남자가 온 길로 재빨리 나아갔다. 지금은 정체불명의 남자가 자신을 도와준 걸 고민할 때가 아니다. 엘리엇이 무사한지 확인해야 한다.
“엘리엇?”
아무 방해도 없이 쉽게 지하로 내려온 유제니는 어두운 지하실로 들어서며 엘리엇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적막이 흐르던 지하실 안에 부스럭 소리가 났다.
“유제니?”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제니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엘리엇의 얼굴을 확인했다.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꼭 갇힌 게 엘리엇이 아니라 유제니인 것 같다. 그의 당혹스럽다는 반응에 유제니는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당신을 구하러 왔죠.”
마치 기사 같은 말에 엘리엇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는 비스컨 백작 부인도 그녀가 여기 온 걸 아느냐고 물으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다음으로 궁금한 것을 입에 올렸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베라가요. 오, 당신은 베라를 용서해 줘야 해요.”
그녀가 감히 유제니에게 엘리엇이 여기 있다는 걸 알려 유제니를 위험하게 만든걸? 엘리엇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유제니는 재빨리 설명했다.
“하몬 경의 잘못을요. 그 애는 당신이 화가 나서 하몬 가에 복수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거든요.”
“방금 복수하고 싶어졌습니다.”
엘리엇은 이를 갈며 말했다. 지금까지는 하몬 경 하나만 혼을 내고 싶었다면 유제니가 여기 왔다는 것만으로 이젠 하몬 가 전체를 가만둘 생각이 없어졌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길 온 걸까. 설마 아까 전부터 위가 소란스러워졌던 게 그녀 때문인가? 엘리엇이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지하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남자들이 대화를 나누며 들어왔다.
“정말 그 사람 맞아?”
“그렇다던데. 짐이 확인했다더군.”
“쉽게 잡혔다며? 소문으로는 대단한 실력자라던데.”
그렇다. 번즈 백작은 용과 싸워 이겼다는 소문이 퍼져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소문에 호기심을 느낀 도전자를 전부 이겼다. 그것도 적어도 어디 한 군데는 부러트려서.
그런 사내가 이렇게 쉽게 잡혔다는 사실에 용병 모두 믿을 수 없어 했다. 하지만 전에 번즈 백작을 본 적 있는 짐이 확인했다. 그가 맞다고.
잘못 본 거 아니냐는 질문에 저런 얼굴이 이 나라에 둘이나 있을 리 없다고 답하기도 했고.
“왜 잡아 온 거야? 그 사람은 뭘 원하는 거래?”
“모르지. 사랑에 빠진 아가씨일지도.”
자기 사랑을 받아 주지 않아서 번즈 백작을 납치한 거 아니냐는 농담에 용병은 킬킬대고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거래를 하러 온 사람이 마법사까지 데려온 탓에 그런 소문이 있다.
번즈 백작에게 반한 아가씨가 그를 납치해서 자신과 사랑에 빠지게 하는 마법을 걸려는 게 아니냐는.
“그런데 번즈 백작은 그, 누구야, 그 여자한테 목매고 있….”
거기까지 말하던 용병은 그제야 지하실에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말을 멈췄다. 침입자가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지하실도 확인하러 온 터였다.
두 사람은 숨을 곳을 찾지 못하고 얼어붙은 여자를 발견하고 램프를 들어 올렸다. 작고 창백한 안색의 젊은 여자였다.
뭐지?
용병들의 시선이 부딪쳤다. 침입자라고 하기엔 옷차림이 마치 귀족 아가씨 같다. 두 사람은 여자가 들고 있는 검을 발견하고 다시 서로를 쳐다봤다.
설마 용병이 아가씨 차림으로 온 건 아니겠지.
“유제니 비스컨이네.”
그때, 유제니가 불쑥 말했다. 유제니 비스컨이라고? 다시 용병들의 시선이 부딪쳤다. 다행히 두 사람은 유제니의 이름을 알았다. 최근 수도에서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니까.
두 사람은 천천히 유제니에게 다가가며 속삭였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가둬야지.”
“비스컨 가의 아가씨를?”
비스컨 가의 아가씨가 아니라 할아버지라 해도 가둬야 한다. 대장이 그렇게 말했다. 저택 안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라고.
하지만 대체 저 아가씨는 어떻게 들어온 걸까.
두 사람 다, 유제니의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침입자거나 잘못 들어온 거면 저렇게 당당하게 자기 이름을 말할 리가 없다.
혹시, 그들을 고용한 사람과 어떤 이야기를 한 게 아닐까. 아니면, 그들을 고용한 사람이 유제니 비스컨인가?
잠깐.
용병들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