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3화 (188/239)

193화. 41 – 2

“도와드릴까요?”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감고 있던 엘리엇은 표정 없이 대답했다.

“아니.”

그럴 줄 알았다. 철창 밖에 있던 로지는 피식 웃었고 데이빗은 입술을 비틀었다. 그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물었다.

“그럼 왜 계속 거기 계시는 겁니까?”

철창이긴 하지만 엘리엇의 실력이라면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이 정도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건 일도 아니다. 로지는 지금 당장 엘리엇이 빠져나올 방법을 세 가지 정도 댈 수 있다.

하지만 엘리엇은 감옥에 갇힌 지 다섯 시간째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데이빗은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답답하지도 않나? 그라면 갇히자마자 빠져나갔을 것이다.

“데이빗.”

어둠 속에서 시리도록 파란 엘리엇의 눈동자가 나타났다. 데이빗은 그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상하게도 엘리엇 번즈의 눈은 어떤 사람에게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배후는 알아냈나?”

엘리엇의 질문에 데이빗은 로지를 쳐다봤다. 아직이다. 그들은 하몬 경이 집으로 돌아간 것까지 확인했다. 그 뒤는 더그가 쫓고 있다.

“아직입니다.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하몬 경은 집에 있었습니다.”

다시 엘리엇의 눈이 감겼다. 누군가가 하몬 경을 납치하려 했고 그 자리에 있던 엘리엇도 같이 납치하려 했다.

당연하게도 그는 거기서 하몬 경을 구하고 범인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게 함정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일부러 걸려들었다.

하몬 경을 납치하려면 다른 더 좋은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클럽 앞의 대로변에서 하필이면 엘리엇과 함께 있을 때 하몬 경을 납치하려 하지 않겠지.

그래서 엘리엇은 이 사건에 배후가 따로 있고 그 배후가 노리는 게 자신이라는 걸 눈치챘다. 확실하지 않은 건 하몬 경이 우연히 말려든 피해자인지, 적극적인 동조자인지였다.

하지만 하몬 경은 세 시간 전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엘리엇에게는 어디론가 끌려간 척했지만.

데이빗과 로지가 알려 주기 전에 이미 엘리엇은 그게 연기라는 걸 알았다. 그는 진짜 겁에 질린 비명 소리를 안다. 이 일의 배후가 누군지 안다면 엘리엇은 하몬 가를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굳이 배후를 찾지 않아도 누가 하몬 경 뒤에 있는지는 알지 않습니까?”

로지가 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여기 있는 세 사람뿐 아니라 하몬 경을 뒤쫓는 더그도 배후에 누가 있는지 예상하고 있다.

거마로트 공작 부부겠지. 정확하게는 거마로트 공작 부인일 거다. 공작이 부인의 계획에 동참했는지 묵인했는지의 차이가 있을 뿐.

그때, 다시 엘리엇이 눈을 떴다. 그는 로지와 데이빗을 쳐다보고 눈동자만으로 다른 쪽을 가리켰다. 동시에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뭐야?”

재빨리 몸을 숨긴 데이빗이 로지에게 속삭였다.

좁아 죽겠는데 왜 여기로 같이 들어와서 이 난리야? 로지가 흘겨봤지만 데이빗은 꿋꿋하게 다시 물었다.

“누가 와?”

“안 들려?”

‘이 멍청이가’라는 말이 뒤에 붙어 있는 것 같다. 데이빗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귀를 기울였다. 놀랍게도 로지의 말대로 저 멀리서 누군가가 지하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작은 소리였다. 그런 소리가 있다는 걸 알고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그런데 엘리엇은 저 소리가 들리기 전에 이미 알아차렸다.

“난 가끔 대장이 인간이 아닌 것 같다니까.”

“좀 닥쳐.”

로지는 낮게 일갈했다. 이 멍청이가 조잘조잘 떠드는 소리 때문에 지금 다가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발걸음 소리는 많은 정보를 품고 있다. 성별과 무게는 당연하고 어떤 신발을 신는 지로 부유한지 가난한지도 알 수 있다. 보폭으로 키를 가늠하는 건 당연하다.

데이빗이 입을 다문 덕분에 로지는 지하로 내려오는 남자가 키가 꽤 크고 약간 호리호리하며 그리 부유하지는 않다는 걸 알았다.

아니, 잠깐.

지하실 문이 열리자 더 많은 소리가 들려왔다. 펄럭이는 천 소리다. 무게와 키로 남자라는 걸 알았으니 저게 드레스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로브를 입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추측대로 로브를 입은 남자가 두 사람이 숨은 곳을 지나쳤다.

엘리엇은 남자가 자신이 갇힌 철창 앞까지 다가오자 눈을 떴다. 그가 궁금한 게 이거였다. 배후에 거마로트 공작 부인이 있다는 건 안다. 하몬 경이 감히 그를 상대로 도박을 한다는 건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다.

거마로트 공작 부인이 뭔가를 제안했겠지.

문제는 거마로트 공작 부인이다.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해도 나라를 구한 영웅을 납치하는 건 다른 문제다.

“마법사로군.”

엘리엇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뒤집어쓴 후드 달린 로브가 이야기 속에 나오는 마법사 같긴 하다. 하지만 엘리엇이 고작 그런 걸로 마법사라고 확신할 사람은 아니다.

“너는 영웅이고.”

마법사는 그렇게 말하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상한 일이군. 엘리엇은 후드 때문에 코 아래만 보이는 마법사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보이는 건 코와 입, 그리고 당장 팔을 뻗어 졸라 버리고 싶은 가느다란 목뿐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엘리엇은 상대방이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게 마법을 걸 건가? 그 여자들에게 걸었던 것처럼?”

엘리엇의 말에 마법사가 멈칫했다. 마치 ‘이놈 봐라?’라는 태도에 엘리엇은 씩 웃었다.

자신을 비스컨 남작이라 주장하는 남자에게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은 범인에 대한 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만약 그게 마법이라면 엘리엇의 기준으로도 그 마법사는 상당한 실력자다.

세 명이나 되는 사람에게 동시에 같은 마법을 썼으니까. 게다가 아주 깔끔했지.

엘리엇은 눈앞의 마법사 같은 실력자를 보거나 들은 적이 있는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이 정도 실력자라면 만나지는 못했어도 적어도 이름 정도는 들었어야 한다.

하지만 없다. 그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어차피 지울 거라면 이름 정도는 알려 줄 수 있겠지?”

“어차피 지울 건데 뭐 하러 알려 주겠나?”

마법사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씩 웃었다. 역시 익숙하다. 이상하다고 엘리엇이 생각한 순간, 마법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만 가 봐야겠군. 다음에 보지.”

그렇지 않아도 엘리엇도 아까 전부터 위가 좀 소란스러워졌다고 느끼던 차였다. 아마 이 마법사에게도 어떤 신호가 간 거겠지.

엘리엇은 말없이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누군지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익숙하다. 꿈에서 만난 걸까.

이 정도 실력자라면 꿈에서 만났다 해도 그가 잊었을 리가 없다. 세 명의 기억을 깔끔하게 지워 버린 마법사라니, 용병이라면 소문이 뉴커크까지 났을 거다. 그는 조용히 마법사가 지하를 빠져나가는 것을 응시했다. 마법사가 계단을 오르고, 문이 열리자 바깥의 소리가 좀 더 확실하게 들려왔다.

“데이빗.”

엘리엇은 마법사가 나가서 문을 닫자마자 데이빗을 불렀다. 로지와 함께 숨어 있던 그는 엘리엇이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먼저 말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더그에게 다녀오죠.”

로지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아서 판단하고 떠나자 엘리엇은 한숨을 내쉬며 벽에 기대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그 마법사를 어디서 만났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꿈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경우도 종종 있다. 지난 꿈에서 별 볼 일 없는 자가 이번에는 꽤 영향력을 가진 자가 되어 있기도 한다. 예전의 길더처럼.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사람의 영향력이 조금씩 달라진다. 하지만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이 갑자기 상류층이 되지는 않는다. 무능력한 사람이 상황이 달라진다고 해서 갑자기 없는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저 마법사 역시 어떤 식으로든 그와 만나거나 그의 귀에 들어온 적이 있을 것이다.

* * *

“사람이 꽤 많은데.”

같은 시각, 엘리엇이 느낀 대로 그가 스스로 갇혀 있는 지하의 위는 상당히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도로 저편에서 마차에 탄 로인이 창밖으로 저택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수도 외곽에 있는 별장이다. 소유주는 핸더슨 후작으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후작의 정부가 머물고 있었다. 저 상태로는 그 정부는 이미 저택을 떠났다고 볼 수 있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맞은편에 앉은 유제니를 돌아보았다.

딸, 이라기보다는 그냥 조카겠지. 로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디 비스컨, 그의 먼 친척인 비스컨 가의 아가씨 유제니는 나이 차로 보나 관계로 보나 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솔직히 말하면 로인은 줄리아가 유제니의 반만 닮았다면 걱정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좀 융통성이 없고 고집이 세긴 하지만 기사단장의 자식이라면 줄리아처럼 너무 자기 멋대로인 것보다 낫다.

물론, 로인은 줄리아가 약간 자기 멋대로인 부분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줄리아가 유제니처럼 융통성이 없고 예의범절을 철저하게 지킨다면, 그는 딸이 가여웠을 테니까.

“왔어요.”

그때, 유제니가 입을 열었다. 그도 들었다. 멀리서 천천히 다가오는 마차 바퀴와 말발굽 소리를 들은 거겠지. 로인이 부른 부하들이다.

그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부하들에게 잠시 대기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유제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있으라고 해도 말 안 듣겠지?”

그렇다. 유제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을 빛냈다. 로인은 아예 여기도 유제니를 데려오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억지를 부려 따라왔다.

젠장. 로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줄리아가 유제니의 반만 닮았으면 한다는 거 취소다. 생각해 보면 지난번에 줄리아가 친구를 돕겠다며 위험한 짓을 한 것도 유제니의 영향이다.

어떻게 여자애 둘이 마차를 타고 수도 밖으로 나갈 생각을 했냐고 혼내자 줄리아가 그랬다. 그녀는 기사의 딸이고 기사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그리고 그건 유제니가 어릴 때 자주 한 말이기도 했다. 그녀는 비스컨 백작의 딸이고 귀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유제니, 네가 다치면 슬퍼할 사람이 아주 많다는 걸 잊지 말렴.”

로인은 이걸로 유제니가 위험한 짓을 하지 않도록 막을 수 있길 바라며 말했다. 다른 때라면 잘 먹혔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은 아니다. 유제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 다치도록 노력할게요.”

위험한 일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게 아니라 안 다치도록 노력한다는 말에 에스컬레 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다시 한 번 유제니를 설득하기 위해 말했다.

“번즈 백작은 내가 무사히 데려올 테니까….”

그때, 마차 밖에서 그의 부하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장님, 움직임이 있습니다.”

동시에 유제니의 고개가 창밖으로 향했다. 부하의 말대로 움직임이 있었다. 경계를 서고 있던 용병 중 몇 명이 모이더니 건물 안으로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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