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2화 (187/239)

192화. 41 – 1

이상하군. 엘리엇은 맞은편에 앉은 하몬 경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원래도 말이 많은 사내긴 하다. 하지만 오늘 하몬 경은 유독 더 말이 많았다. 두서없이 횡설수설하기도 했고.

동업을 제안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횡설수설하는 건 하몬 경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원래 말이 많았지만, 굳이 따지면 청산유수에 가까웠다. 하몬 경의 사업 수완 중에는 훌륭한 말재간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어, 그래서 내가 전부 확인을 했지. 하하하.”

같은 소리를 두 번째 반복하는 하몬 경을 보며 엘리엇은 모르는 척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 그는 주변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새 자잘하게 그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번 광산 출장 건만 해도 그렇다.

터널에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고 했다. 혹시 이게 드래곤의 흔적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드래곤이 보석을 좋아하는 건 유명한 이야기다. 엘리엇은 전문가를 보냈고 그는 강력한 마법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리고 엘리엇이 광산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오기 전까지 느껴지던 마법의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전문가는 식은땀까지 흘리며 당황했고 혹시 몰라 하루를 머무르며 확인했지만, 터널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그, 어때? 번즈 백작도 확인해 보겠나?”

하몬 경의 말에 엘리엇은 물끄러미 그를 쳐다봤다. 이상한 일은 또 있다. 비스컨 남작과 결혼 약속을 했다고 주장한 사람이 셋이나 나타났다. 그중 한 명은 그가 인수한 커피 하우스의 직원이었고.

물론 사기꾼이었지만 직원은 자신이 구혼까지 받은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 직원뿐 아니라 다른 피해자 둘도 약혼자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꼭 누가 약혼자에 대한 것만 지운 것처럼.

“아니.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군.”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하몬 경을 믿는 건 아니다. 그 전에 좀 더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최근 유제니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있다는 말도 들었다. 아직 그리 널리 퍼진 소문은 아니라는 보고를 받았지만 그게 엘리엇의 신경을 가장 건드렸다.

그것 말고도 자잘하게 몇 개 더 있었다. 전부 다 그냥 운이 나빴다고 생각할 법한 일이다. 그에게는 피해랄 것도 없었고.

하지만 엘리엇은 그 모든 사건이 신경이 쓰였다. 그는 더그가 소문에 대해 얼마나 알아봤을지 궁금해하며 하몬 경에게 말했다.

“그보다, 아직 계약서를 못 봤는데.”

지난번에 엘리엇의 직원들이 하몬 저택에 확인하러 갔다가 그냥 왔다. 원래대로라면 거기서 엘리엇은 계약을 중단한다.

하지만 하몬 경이 워낙 간곡하게 부탁해 와서 클럽에서 보는 조건으로 만나기로 한 것이다. 물론 하몬 경이 수도에서 내로라하는 상회를 소유했다는 것도 한몫했고.

“아, 그게….”

다시 하몬 경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을 열었다. 뭐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는 엘리엇에게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인이 가져오기로 했는데….”

아직 오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그제야 엘리엇은 하몬 경이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했는지 이해했다. 계약서를 가져오기로 한 하인이 아직도 연락이 없으니 그런 거다.

저런.

엘리엇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고 그가 언제 올지 모르는 하인을 기다릴 수는 없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면….”

하몬 경이 그렇게 말했지만 엘리엇은 무시하고 클럽에서 빠져나왔다. 그의 뒤로 하몬 경이 따라오며 말했다.

“금방 가지고 올 거야.”

이렇게까지 매달릴 거라면 처음부터 준비했으면 될 일이다. 왜 본인이 직접 가지고 오지 않은 거지? 엘리엇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멀리서 하인 복장을 한 남자가 봉투를 들고 달려오며 소리쳤다.

“어르신! 어르신!”

“이 멍청한 녀석!”

하인을 본 하몬 경이 발칵 화를 내며 소리쳤다. 상관없다. 엘리엇은 그들을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하인이 엘리엇과 하몬 경에게 달려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느, 늦어서 죄송합니다.”

“조금 더 늦었으면 자넨 해고야!”

하몬 경은 하인에게 그렇게 호통을 친 뒤 봉투를 낚아채 엘리엇에게 내밀었다.

“됐네.”

“한 번 확인이라도 해 보게.”

받지 않으려는 엘리엇과 봉투라도 주려는 하몬 경 사이에서 가벼운 실랑이가 벌어졌다. 대로변에서 이러는 것도 별로 좋은 모습이 아니다. 엘리엇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하몬 경의 머리에 검은 천을 뒤집어씌웠다.

“어르신!”

놀란 하인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 * *

“클레어, 클레어.”

비스컨 저택의 응접실에 멍하니 앉아 있던 클레어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서 유제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피곤하죠?”

오늘도 그녀는 근무를 마치고 방문했다. 당연히 피곤할 거라는 유제니의 물음에 클레어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냥 잠깐….”

며칠 전에 비스컨 남작과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꿈에서 두 사람이 부부였냐는 그의 질문에 클레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거짓말을 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녀는 이미 유제니에게도 말하지 않은 게 몇 가지 있으니까. 유제니에게도 속이는 게 있는 마당에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하는 게 대수일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 비스컨 남작에게 헛소리 작작 하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못 하는 그녀에게 올리버가 물었다. 잊어버리는 건 어렵냐고.

미래의 일이지만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해진 일이다. 꿈에서 그녀의 남편이었던 리오스 경과 결혼할 일은 없다. 그는 클레어가 기사단에 들어오기 며칠 전에 이미 불의의 사고를 당해 기사단을 그만두었으니까.

꽤 심한 사고라고 들었다.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라고.

꿈에서 리오스 경은 좀 더 오래 기사단에 남아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사고로 그만뒀기 때문에 클레어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도 꿈과 현실이 다르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그러니 비스컨 남작의 말대로 꿈을 잊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무슨 일 있어요?”

걱정스러운 유제니의 질문에 클레어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차라리 잊고 싶다. 죄책감으로 얼룩졌을 뿐 아니라 자신의 무지와 무능함 때문에 괴로우니까.

하지만 잊히지 않았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마지막 말에 이제는 괴로워하던 비스컨 백작의 표정이 더해졌다.

“아닙니다. 그보다, 뭐라고 하셨죠?”

“더 추워지기 전에 소풍을 갈까 하거든요.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요.”

줄리아는 당연하고 로렌과 리사도 초대할 거다. 베라는 물론이고.

리사는 바빠서 거절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에리카도 올 수 있을지 모른다. 최근 커널 남작 부인의 상태가 조금 좋아졌다는 소식을 유제니에게 알려 왔다.

“저도 초대해 주시는 건가요?”

클레어의 질문에 유제니는 당연하지 않냐는 표정을 지었다. 초대할 거니까 입에 올렸다.

“가고 싶어요.”

기뻐하는 클레어의 표정에 유제니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간단하게 준비하려고요. 샌드위치와 스콘 정도요.”

몇몇 사람은 나눠 먹을 간식을 챙겨 올 것이다. 유제니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을이면 먹을 것이 풍족해져서 이런 식으로 소풍을 가서 각자 가져온 간식을 나눠 먹기도 한다.

“아가씨.”

그때, 집사가 응접실 문을 열고 유제니를 불렀다. 오늘 올 사람은 없지만 늘 연락 없이 방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줄리아와 엘리엇이다. 유제니는 웃으며 물었다.

“엘리엇인가요?”

줄리아는 오늘 아침에 이미 다녀갔다. 당연히 엘리엇일 거라 생각하는 그녀에게 빅스가 말했다.

“하몬 양입니다.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만.”

베라는 늘 오기 전에 방문 허락을 구한다. 이상하네. 유제니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이쪽으로 안내해 주세요. 차도 내주시고요.”

이미 베라는 클레어와 안면이 있으니 동석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녀의 말에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그리고 금세 뻣뻣하게 긴장한 베라가 나타났다.

“레이디 비스컨.”

이것도 조금 이상한 일이다. 유제니는 이미 베라에게 이름을 불러도 된다고 말했으니까.

“베라, 무슨 일 있어?”

그렇게 말하자마자 유제니의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 그녀는 방금 이 질문을 했다. 다른 사람에게.

유제니는 저도 모르게 클레어를 한 번 쳐다봤다가 베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베라는 금세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쥐어짠 듯한 목소리가 베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유제니는 재빨리 베라의 상태를 확인했다.

옷은 멀쩡하다. 오다가 다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표정은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뭐를?”

다시 베라가 우물쭈물 망설이기 시작했다. 답답한 마음에 유제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클레어 역시 무슨 일인가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 우리 집에 피해가 가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그때, 베라가 불쑥 말했다. 예상치 못한 말에 유제니와 클레어의 시선이 부딪쳤다. 하몬 가에 피해가 가지 않게 해 달라고?

유제니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겠다고 약속해 주고 싶어. 하지만 내가 그럴 수 있는 사안이니?”

그럴 수 있다. 베라는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지금 하몬 가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유제니뿐이다.

“번즈 백작님이 유제니의 부탁은 들어줄 테니까요.”

“번즈 백작? 엘리엇이 왜?”

엘리엇이 하몬 가에 화가 났다는 뉘앙스의 말에 유제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최근 엘리엇이 하몬 경과 사업을 할지 생각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설마 그 과정에서 틀어지기라도 했나? 그렇게 생각하는 유제니에게 베라가 다시 쥐어짠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 번즈 백작님을 함정에 빠트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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