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40 – 4
“세금을 늘리다니! 지금도 충분히 많이 내고 있다고!”
비스컨 백작의 고함이 알현실 안에 울려 퍼졌다. 늦은 밤이라 그의 고함은 알현실 밖까지도 울려 퍼졌을 것이다.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전쟁과 드래곤의 습격으로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탓에 어디나 일손은 턱없이 부족했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말벗인 리오스 부인이 간단한 청소까지 해야 할 정도로.
“전하 앞입니다. 언행을 조심하세요!”
곧바로 클레어 리오스 부인의 호통이 따라왔다. 엘리엇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클레어를 쳐다봤다가 다시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비스컨 백작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많은 세금을 요구하면 결국 힘들어지는 건 영주민들뿐입니다.”
클레어의 호통 때문인지 비스컨 백작은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귀족의 세금은 결국 영지에서 나온다. 이미 수많은 귀족이 자신의 영지에서 과도한 세금을 걷고 있었다.
유제니가 귀족의 세금을 올리면 귀족들은 영지민들에게 걷는 세금을 올릴 거라는 말이다.
“글쎄.”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작고 핏기없는 외견과 달리 목소리만은 카랑카랑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엘리엇은 늘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이미 자네들은 영지에서 과도한 세금을 걷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지적에 비스컨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맞다. 드래곤이 습격하고 전쟁이 터지자 몇몇 귀족은 자신의 영지에서 걷는 세금을 더 올리기 시작했다.
그 세금은 점점 높아져서 최근 꽤 많은 귀족이 9할 정도를 걷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9할이라니. 올리버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말이 9할이지 지금 같은 시기에는 굶어 죽으라는 말이다. 비옥한 영토를 자랑하는 발시안이지만, 일손이 없어 땅이 놀고 있다. 수확물은 현저하게 줄었고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서 세금으로 수확물의 대부분을 바쳐야 한다. 결국, 이대로 있다간 굶어 죽겠다 생각한 사람들이 화전민이 되는 실상이었다.
“그 정도로 안 걷는 사람도 많습니다. 오히려 이번 일로 낮은 세금을 부과하던 사람들도 세금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럴듯한 올리버의 주장에 클레어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어렸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왕궁 안팎으로 이 모든 게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 때문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
그녀에게 반감을 가진 귀족들이 모든 문제를 그녀의 탓으로 몰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일로 귀족들이 영지에 부과하는 세금을 올린다면 이번에야말로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
“누가 있지?”
그때,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있냐고? 어리둥절해하는 올리버에게 그녀가 다시 말했다.
“비스컨 백작, 여기 있는 사람들 외에 누가 9할 이하로 세금을 부과하고 있냐는 말이야.”
아무도 없다. 엘리엇조차도 몰랐던 사실이라 그의 눈썹이 올라갔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우, 우리뿐이라고?”
올리버의 얼빠진 질문이 가라앉은 알현실 분위기를 갈랐다. 몇몇만 그렇게 받는 줄 알았는데 다 그러고 있었단 말야? 그는 믿을 수가 없어서 엘리엇을 쳐다봤다가 유제니에게 물었다.
“그렇게 받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살라고?”
그러게나 말이다. 클레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럴 때 보면 비스컨 백작이 다른 귀족들보다 조금은 낫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저자는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하나뿐인 오라버니면서 그녀의 반대편에 서 있다. 오늘도 귀족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이 과중하다며 항의하러 오지 않았던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온 겁니까?”
클레어의 지적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올리버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클레어가 계속해서 말했다.
“정작 따져야 할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부끄럽지 않습니까?”
“콜록, 콜록.”
그때, 유제니가 작게 기침했다. 동시에 알현실 안이 얼어붙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곧바로 클레어의 관심이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에게 향했다. 늦은 밤까지 이런 한심한 작자의 항의를 받느라 그런 거다. 클레어의 걱정 어린 물음에 그녀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괜찮네. 목이 좀 칼칼해서 그래.”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사람이 있겠지만 클레어는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먹고 마시는 걸 직접 확인한다. 그녀가 왕궁에 오고 나서 독살 시도만 열 번이 넘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나가는 것을 보던 엘리엇은 비스컨 백작의 시선이 클레어를 쫓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엘리엇은 지난번에 클레어가 돌아가는 올리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장면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종종 서로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쫓곤 했다.
두 사람이 서로가 그런다는 걸 알까? 그는 가끔 그게 궁금했다.
“저 여자는 날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야?”
곧이어 고개를 돌린 올리버는 남은 두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 투덜거렸다. 자신이 리오스 부인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숨기고 싶은 거다.
“좋은 사람이지.”
유제니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느닷없는 말이었지만 엘리엇과 올리버는 그녀가 클레어에 대해 말한다는 걸 알았다.
“그렇긴 해.”
약간 지친 표정으로 올리버가 말했다. 좋은 사람이다. 자기 실수를 인정하고 고치려고 노력한다. 그것만으로도 클레어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다.
문제는 그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거고.
“오라버니를 싫어하는 건 아니야.”
오랜만에 유제니가 올리버를 비스컨 백작이 아닌 오라버니라고 불렀다. 그녀는 올리버가 그 부분에 반응하기 전에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 상황이 끔찍한 것뿐이지.”
이 상황이 끔찍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엘리엇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가장 끔찍한 삶을 사는 건 유제니일 테니까.
“내가 끔찍한 게 아니라니 다행이네.”
올리버는 그렇게 말하며 유제니의 곁으로 다가왔다. 엘리엇이 여차하면 올리버를 막을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쳤지만, 유제니는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앉은 자세 그대로 올리버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상황이 끝나면 자신이 오라버니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두 사람이 잘될 수도 있다. 그걸 자신이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유제니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 상황이 끝나는 날이 올까?”
올리버는 유제니가 앉은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지친다.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데 만날 때마다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것도. 미워하는 척해야 하는 것도.
유제니가 그래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올리버는 지금쯤 번즈 백작의 옆에서 검을 들고 서 있었을 것이다.
“오지.”
유제니는 의자에 약간 늘어지듯 몸을 기대며 말했다. 그녀는 이 왕좌가 싫었다. 앉아 있으면 그녀의 목을 옥죄는 것처럼 느껴져서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유제니가 살아 있는 건, 억지로 뭔가를 먹고 아침마다 눈을 떠서 침대 밖으로 나오는 건 그런 희망 때문이었다. 언젠가 이 끔찍한 상황이 끝날 거라는 희망.
“그 전에 말 좀 해 주면 안 돼? 나 그렇게 끔찍한 사람 아니라고.”
올리버의 농담 같은 부탁에 유제니는 피식 웃었다. 안 된다. 그녀는 우울한 눈으로 엘리엇을 쳐다봤다. 그가 그녀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받아 줄 수 없다. 그녀는 발시안에 모든 것을 불태워야 하니까.
괜한 미련을 품게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올리버와 클레어는 다르다. 언젠가. 언젠가는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겠지.
“아직은 안 돼.”
“아직은?”
“사람들이 우리를 내버려 두는 건, 우리가 부서진 발시안을 맨손으로 치우고 있기 때문이야.”
발시안은 산산이 부서진 유리성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그 유리 조각을 치우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아직 쓸모가 있기 때문에 내버려 두는 것뿐이다.
유제니는 그녀의 뒤에서 귀족들이 호시탐탐 이 자리를 노린다는 걸 알았다. 새로운 발시안의 왕이 되고 싶은 자도 있고 아직 어린 왕자를 이용해 섭정이 되고 싶어 하는 자도 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성인이 된 왕자가 자기 자신의 힘으로 발시안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최대한 유리 조각을 치우는 것뿐이다.
딱히 왕자를 위한 건 아니다. 그녀는 지금 손안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는 것만도 힘이 부친다. 그녀가 부서진 유리성을 치우는 건 발시안을 위해서였다. 드래곤을 쫓아내고 이 땅에 나라를 세운 영웅들과 이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발시안의 사람들을 위해서.
발시안의 국민들을 위해 망가지고 부서진 곳은 모두 치워야 한다. 그리고 제오르지오 왕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의 피해가 최소화된다.
“치우고 나면 된다는 거야?”
올리버의 질문에 유제니는 세상에 하나뿐인 가족을 쳐다봤다. 부모님은 사망했고 그녀에게 남은 가족은 올리버뿐이다. 그녀는 진심으로 올리버가 행복하길 바랐다. 그녀에게 보여 준 애정만큼.
“리오스 부인이 늦는군. 어두워서 위험할 수도 있겠어.”
유제니가 그렇게 말하자 엘리엇은 올리버를 쳐다봤다. 그는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을 지켜야 한다. 그러니 클레어의 상태를 확인하러 가는 건 비스컨 백작이 해야 할 것이다.
“다녀오지.”
비스컨 백작이 설렘을 가까스로 누르며 알현실에서 나가자 유제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엇은 알현실 밖에 누군가가 없는지 확인한 되돌아와 물었다.
“부서진 발시안을 전부 치울 수 있다 생각하십니까?”
과연 이 나라가 깨끗해질까. 나라를 아끼는 자들은 전쟁이 났을 때 나라를 지키다 제일 먼저 사망했다. 지금 남아 있는 자들은 어린 계집이 섭정이라는 사실에 불만을 가진 쭉정이들뿐이다.
쭉정이만 남은 밭을 깨끗하게 하는 방법은 모조리 태우는 거다. 엘리엇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그럴 수가 없었다. 밭에 떨어진 낱알이 있다. 어디선가 그 낱알이 싹을 틔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리가 부서지면 어디에 작은 조각이 남아 있을지 모르지. 깨끗하게 쓸어 내도 언젠가 작은 조각에 다치더군.”
유제니는 그렇게 말하며 구두를 벗었다. 맙소사.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다. 꽉 죄는 높은 구두를 온종일 신고 있어야 한다는 건 이미 고문 그 자체다.
발이 시원해지자 유제니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약간 풀어진 마음으로 엘리엇에게 물었다.
“부서진 유리에 다치지 않는 방법이 뭔지 아나?”
다치지 않는 방법? 엘리엇은 별생각 없이 말했다.
“구두를 신고 있는 거죠.”
동시에 두 사람의 시선이 유제니의 맨발로 향했다. 작고 앙상한 발은 상처투성이였고 그게 엘리엇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아니면 두꺼운 카펫을 까는 거지.”
고개를 든 유제니는 엘리엇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일그러진 듯한 미소에 엘리엇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죽으면 아주 두꺼운 카펫이 되겠지.”
“유제니!”
엘리엇의 고함에 유제니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전까지 구두를 벗지 말게, 번즈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