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0화 (185/239)

190화. 40 – 3

그럴 때마다 그는 너나 가라고 받아치고 있고.

아 참, 그랬지. 클레어는 비스컨 저택에서 종종 본 광경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꿈에서 본 것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꿈에서는 늘 화를 내는 비스컨 백작과 얼음장 같은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 때문에 조마조마했다. 그러면서 가끔씩 두 사람이 서로를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 주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두 사람이 싸우는 장면을 보면 웃음이 나왔다. 여전히 비스컨 남작은 한심스러웠지만 조마조마하진 않았다.

여기서는 두 사람의 다툼에서도 서로를 향한 애정이 보였다. 레이디 비스컨은 늘 올리버를 짜증 나는 오라버니라고 말했지만. 누군가가 그의 욕을 하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비스컨 남작 역시 마찬가지다. 잘난척쟁이라고 여동생을 놀리긴 했지만 누군가가 유제니를 잘난 척한다고 욕하면 상대방의 눈두덩이에 색을 입힐 사람이다.

그게 클레어는 생소하면서 동시에 익숙했다. 그리고 동시에 서글펐다.

“제 말은, 레이디 비스컨이 결혼 상대를 정해 주면 따를 거냐는 말입니다.”

글쎄. 클레어의 말에 올리버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하지. 할 것 같은데.”

매번 결혼이나 하라고 소리치긴 하지만 유제니가 결혼 상대를 정한 적은 없다. 그의 여동생은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예절이 있다는 걸 아주 잘 안다.

그녀가 감히 오라버니의 결혼 상대자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면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 거겠지. 심지어 유제니는 올리버가 세 명의 여자에게 구혼을 했다는 가십이 있었을 때도 그 여자 중 한 명과 결혼하라고 하지 않았다.

먼저 무슨 일인지 여자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겠다고 했다. 물론 그 전에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고 화를 내긴 했지만.

“만약, 만약….”

생각보다 쉽게 나온 올리버의 대답에 클레어는 다른 질문을 떠올렸다. 그녀가 질문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올리버의 눈썹이 올라갔다.

“만약 그 여자가, 싫어하는 여자라 해도 말입니까?”

질문이 점점 구체적이 되어 가고 있다. 올리버는 처음에 클레어가 질문을 하나만 하겠다고 한 걸 잊고 생각했다.

싫어하는 여자와 결혼하라고 유제니가 시킨다고? 그럴 리 없다. 개와 고양이 같은 사이지만 두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같이 자란 개와 고양이다.

어닝이 멍청한 짓만 하지 않았다면 번즈 백작이 무슨 짓을 해도 유제니가 파혼하지 않았을 거라는 걸 올리버는 알았다.

유제니 역시 마찬가지다. 올리버가 싫어하는 여자와 결혼할 리가 없다는 걸 안다.

“내 입으로 말하긴 싫지만.”

올리버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유제니는 나보다 영리하거든.”

이건 그의 어머니도 인정했다. 아무래도 유제니가 너보다 더 영리한 것 같다고. 올리버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것을 처음으로 클레어에게 이야기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녀석이 나한테 싫어하는 여자와 결혼하라고 할 리가 없어.”

단호한 올리버의 말에 클레어의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당신이 결혼해야지만 그 여자가 살 수 있다면요?”

이상한 기분이 든 올리버는 클레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물었다.

“질문이 구체적이지 않아?”

그러자 클레어의 얼굴이 확 하고 달아올랐다. 어어? 그 얼굴에 오히려 올리버가 당황했다. 일부러 정곡을 찌른 게 아니다. 그냥 머릿속에 생각난 걸 툭 내뱉었을 뿐이다.

올리버는 당황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어, 꼭 내가 결혼해야 해? 다른 사람이랑 결혼해서 살릴 수는 없는 거야?”

그게 클레어는 최근에 품은 의문이었다. 왜 하필 비스컨 백작이었을까.

꿈에서 그녀는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사망한 뒤 비스컨 백작과 결혼했다. 원해서 결혼한 건 당연히 아니었다. 사람들이 증언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사악한 계획을 막기 위해 공모했다고.

두 사람이 연인이었다는 말도 안 되는 증언도 있었다. 하지만 비스컨 백작은 부인하지 않았다. 왜 부인하지 않았던 걸까.

그때는 그가 그녀를 살리기 위해 그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증스럽다 여겼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 하는 노력과 거짓말로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도 살릴 수 있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위선자.

클레어는 비스컨 백작을 몇 번이나 그렇게 불렀다. 동생을 죽이고 고작 그녀를 살린 걸로 죄책감을 덜려 하지 말라고.

“레이디 비스컨이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죠.”

궁색한 클레어의 말에 올리버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오라버니와 결혼시킨다고? 너, 유제니를 잘 모르는 거 아냐?

그의 얼굴에 그런 표정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올리버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유제니가 날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 같은데.”

“불행, 이요?”

불행이라는 말에 클레어가 반응했다. 올리버는 문득 그녀가 보통 여자보다 약간 키가 큰 덕에 좀 덜 불편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꽤 괜찮았다. 그는 늘 여자들과 서서 인사를 나눌 때면 불편했으니까.

“싫어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불행할 거 아냐?”

그 순간, 클레어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비스컨 백작과 결혼해 불행했다. 아주 짧은 기간이었다. 사실, 그리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가 기억하는 꿈은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죽고, 비스컨 백작과 결혼하는 것까지였으니까.

하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클레어를 불행하게 만든 건 비단 그녀가 비스컨 백작을 증오해서가 아니었다. 죄책감이었다.

마땅히 누려야 할 사람이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 비스컨 백작은 그녀가 아니라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을 살렸어야 했다.

꿈에서 비스컨 백작의 보호를 받아 살아 있어야 하는 건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었다. 그녀에게 목숨을 구원받았는데 은혜를 갚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클레어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불행한 사람들 대부분 그렇듯, 그 원망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로 향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무조건 잘 어울릴 리가 없잖아. 유제니도 그걸 알걸?”

단순히 두 사람을 좋아해서 이어 주고 싶다는 이유로 결혼하라고 강요할 정도로 유제니는 순진하지 않다. 뭐, 순진한 면도 분명 있긴 하지. 올리버는 그렇게 생각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확실히 귀족 아가씨로 자란 탓인지 유제니는 순진한 면이 있었다. 아카데미를 다니지 않고 집 안에서 가정 교사에게 교육을 받아 더 그렇다.

융통성 없는 면도 그렇고 대부분의 사람이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면이 그렇다. 하지만 단순히 자기가 좋아하는 두 사람이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의 순진함이다.

그랬다면 올리버가 아카데미에 다닐 때 자기 친구들을 몇 번이나 소개해 줬겠지.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나를 불행하게 만들 녀석은 아니거든.”

차라리 자기가 무슨 짓을 하면 했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올리버에게 결혼해 달라고 하지는 않을 녀석이다.

“아닌가?”

유제니가 그럴 리 없다고 말하던 올리버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뭐가? 어리둥절해하는 클레어의 앞에서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불행해도 사람을 살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려나? 그 여자는 어때? 날 싫어해?”

구체적인 질문은 구체적인 확인으로 돌아왔다. 올리버의 질문에 클레어는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비스컨 백작을 싫어했냐고?

싫어했다. 싫어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단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점점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자신이 없어졌다. 철석같이 믿었던 진실이 혹여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스컨 백작이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을 살릴 수 있었는데 살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죄책감을 덜기 위해 그녀를 살렸다고 생각했다. 뻔뻔한 남자. 위선자.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에게 기생해 살아가던 거머리 같은 작자.

그렇게 생각하며 꿈에서 깨어났는데 현실에서 만나서 접한 비스컨 남작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지금 그녀가 아는 비스컨 남작은 동생을 사랑했다. 동생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린 남자의 얼굴을 엉망이 되도록 때릴 정도로.

그녀의 머릿속에 기름기가 배어 나오던 손수건 뭉치가 떠올랐다. 복잡한 기분이 그녀를 잠식했다. 서글프면서 동시에 조금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그녀가 모르는 곳에서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과 비스컨 백작은 서로를 위하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그녀는 비스컨 백작을 비난했다. 그리고 그는 그걸 묵묵히 감내했다.

무엇을 위해서?

“라넌 경?”

클레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올리버가 물었다. 고개를 든 그녀는 괜찮냐는 올리버의 표정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비스컨 백작이 싫어서 불행한 게 아니었다. 다른 장소에서 다르게 만났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두 사람을 이어 주려 한 게 아닐까 하는 괴로운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너무 괴로워서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기도 했다.

“어쩌면….”

저도 모르게 입을 연 클레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싫어하지는 않을지도요.”

“음.”

클레어의 말에 올리버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잠시 고민했다. 상대방이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그도 상대방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는 다시 클레어에게 물었다.

“그런데 나는 상대방을 왜 싫어해?”

올리버의 질문에 클레어의 말문이 막혔다. 왜 싫어하냐고? 모르겠다. 그녀가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말벗이라서?

꿈에서는 그게 당연했다. 자잘하게 쌓인 것들이 있었으니까. 그녀는 비스컨 백작이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을 찾아와서 고함을 지르는 걸 싫어했다. 그래서 그의 방문을 몇 번이나 막았다. 그가 멍청한 짓을 하는 걸 방해한 적도 있다.

그래서 그가 그녀를 싫어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싫어했을까.

결혼했을 때 비스컨 백작은 다정했다. 사실, 다정했다는 건 이제 와서 깨달은 거긴 하다. 그때 그녀는 비스컨 백작을 보기만 하면 욕을 퍼붓거나 덤벼들었으니까.

하지만 비스컨 백작은 단 한 번도 클레어에게 화를 내거나 손을 든 적이 없었다. 빈정거리거나 폭언을 내뱉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그녀를 그냥 내버려 뒀을 뿐이다.

아니, 아니다. 그는 그녀가 죽지 않게 돌봤다. 그녀의 목숨을 귀하게 여겨 주었다.

끔찍하다 생각했던 시절의 기억이 밀려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클레어는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살아 있을 때보다 죽고 난 다음이 더 끔찍했다.

“라넌 경.”

가만히 클레어를 바라보던 올리버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반응과 질문 덕에 그녀가 무슨 꿈을 꿨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클레어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 꿈에서 우리가 부부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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