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9화 (184/239)

189화. 40 – 2

“리오스 부인.”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사망한 다음 날, 방 안에 감금된 클레어를 찾아온 건 비스컨 백작이었다.

올리버는 핏발 선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클레어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클레어 리오스. 결혼 전 성은 라넌이라고 들었다.

기사였던 리오스 경과 결혼해 리오스 부인이 된 그녀는 남편이 반란에 가담한 죄로 갇혔다가 마녀 유제니의 흥미를 끌어 살아남았다.

그리고 마녀 유제니가 왕자 제오르지오를 살해하려던 계획을 막았다. 그런 증거가 남아 있다.

“자네는 석방이네. 대신 조건이 있어.”

그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걸 안다. 특히나 유제니가 죽은 지금은 그를 증오하겠지.

젠장, 유제니.

죽어 버린 동생에 대한 원망이 솟아났다. 너만 편하면 다냐고 울부짖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동생이 가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원해서 그 자리에 오른 게 아니었다. 그녀밖에 없었으니 할 수 없이 오른 자리였다.

왕궁으로 가던 날, 유제니는 의연하게 앉아 있었지만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했다. 원하면 그가 데리고 도망쳐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의 책임감 강한 동생은, 고집불통의 융통성 없는 레이디 비스컨은 그걸 거절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같은 대화를 며칠 전에 반복했다.

“나와 결혼해야 해.”

침통한 말에 클레어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비스컨 백작을 향해 덤벼들었다.

“차라리 죽여! 날 죽이라고!”

“의회에서 결정했네. 평생 내가 감시하는 조건으로 당신의 목숨은 살려 주겠다고.”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분이, 그분이 뭘 잘못했는데?”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 유제니는 최선을 다했다. 안타까운 건 발시안이 멸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왕족은 모두 죽었다. 단 한 명, 왕자인 제오르지오 사운더키즈만 빼고. 유제니 비스컨은 제오르지오 사운더키즈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발시안을 다스릴 섭정이었다.

다들 제오르지오가 왕이 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왕족이 사망했고 나라 안팎에 몬스터가 들끓었다. 불타는 발시안은 잿더미조차 남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유제니 비스컨, 자신의 성을 고집한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섭정이 되면서 나라는 삐걱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은 유제니에게서 발시안의 희망을 보았다. 그리고 탐욕스럽게도 몇몇 사람은 나라를 집어삼킬 꿈을 꾸기 시작했다.

“휘어지지 않는 검은 부러지기 마련이야.”

침통한 목소리가 올리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아버지가 가르쳐 주셨다. 휘어지지 않는 검은 부러지기 마련이라고.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그렇게 살아야 한다. 나쁜 사람들이 거슬리지 않도록 적당히 나쁜 짓도 하고 타협도 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 비스컨 가가 살아남는다.

하지만 유제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왕궁으로 오기 전에 가지고 있던 생기를 모조리 빨리기라도 한 듯 텅 빈 눈으로 유제니가 말했다.

- 모든 검은 부러지기 마련이야.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휘어지는 검을 검이라 할 수는 없지.

하지만 부러진다는 건 죽음을 의미한다. 젠장, 유제니.

올리버는 이를 악물었다. 휘어졌어야지! 뇌물도 좀 받고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지 말았어야지! 나라가 좀 엉망이면 어때? 적당히 눈감아 주고 도망칠 길을 만들었어야지.

하지만 유제니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가장 잘 벼른, 그리고 절대 휘어지지 않는 검이었다.

- 올리버,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휘어지지 않는 검이 필요해. 그 중간은 없어.

이것 봐. 결국 산산이 부서졌잖아.

올리버는 혀를 깨물어 눈물을 참았다. 그의 약하고 어린 동생은 휘어지지 않는 검이 되어 발시안을 나라로 부를 만한 상태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비스컨 가와 자신을 분리해 비스컨 가가 존속되도록 만들어 놓았다.

독한 것. 올리버의 머릿속에 유제니를 향한 욕이 떠올랐다.

그는 애원했다. 도망치라고. 도망치게 해 주겠다고. 번즈 백작과 외국으로 도망쳐 살라고. 그가 돕겠다고 했다. 돕게 허락해 달라고 애원했다.

생각해 보겠다던 유제니는 싸늘한 주검으로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제야 올리버는 깨달았다. 유제니가 죽어야 비스컨 가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모든 잘못을 그녀가 안고, 사악한 마녀 비스컨으로 죽어야 비스컨 가가 무사할 수 있다는 걸.

어느새 유제니는 올리버가 제오르지오 왕자의 암살을 막은 증거를 만들어 놓았다. 대체 언제, 어떻게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비스컨 가의 재산 절반을 유제니가 강제로 빼앗았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었다.

증거에 의하면 올리버와 비스컨 가는 유제니와 철저하게 반대편이었다. 적이었다.

“자네가 살아남는 방법은 이것뿐이네.”

클레어가 올리버와 결혼해야 한다. 죽음 앞에서 유제니는 자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계획을 철저하게 세워 놓았다.

두 사람이 결혼할 수 있도록 증거까지 만들어 놓았다. 사악한 마녀 비스컨이 제오르지오 왕자를 암살하려 했을 때 두 사람이 저지한 것으로.

심지어 어느 시종이 증언했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클레어 리오스 부인을 의심하고 있었다고. 비스컨 백작과 자신을 끌어내리려는 작당 모의를 하고 있다는 의심이었다.

젠장, 유제니.

올리버는 다시 혀를 깨물었다. 입 안에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유제니는 늘 그보다 영리했다. 자기 주변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알 만큼.

시종 앞에서 클레어와 올리버를 의심하는 연기를 할 만큼.

이제 마녀가 죽었으니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때다. 연인이라는 증언까지 나온 마당에 클레어와 올리버가 결혼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유제니가 심어 놓은 증거를 의심할 것이다.

“당신이 죽인 거야! 당신 때문이야!”

클레어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올리버는 뒷걸음질로 클레어의 방에서 걸어 나와 문을 닫았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닫힌 문에 이마를 대고 눈물을 흘렸다.

독한 것.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융통성도 없는 계집애.

영리하긴 개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것.

* * *

“젠장.”

클레어는 기사단 앞에 버티고 선 커다란 남자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게 자세만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클레어가 아는 남자 중에서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가 가장 자신감이 넘치는 남자였다.

“라넌 경.”

기사단 앞에 서서 클레어가 나오길 기다리던 올리버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들어 보였다. 하지만 당연히 알은척하며 자신에게 다가올 줄 알았던 그녀가 재빨리 몸을 돌려 버리자 잠시 당황했다.

눈이 마주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살면서 그와 눈이 마주치고도 피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올리버는 남녀를 통틀어서 인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는 눈이 마주치면 상대방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게 당연했다.

“라넌 경.”

결국, 클레어가 자신을 못 봤다고 생각한 올리버는 재빨리 그녀를 부르며 따라갔다. 그러다가 문득, 클레어가 자신을 피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넌 경이 날 피하나? 하지만 왜? 그 이상한 꿈을 꾼 건 그녀지 그가 아니다. 피하려면 내가 피해야 하는 거 아냐?

“라넌 경.”

“그만 좀 하시죠.”

사람이 없는 곳까지 온 클레어는 짜증을 내며 돌아섰다. 지금 당장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고르자면 단연 올리버 비스컨이다.

하지만 올리버는 클레어를 만나야 했다. 그는 그만 좀 하라는 클레어의 호통에 잠시 멈칫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아까 클레어와 눈이 마주쳤을 때 빛나던 얼굴이 조금 시무룩해져 있었다. 클레어는 그 모습이 어이도 없고 우스워서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하시죠.”

할 거면 빨리 해라. 듣자마자 떠날 거니까. 그런 태도의 클레어에게 올리버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내가 유제니를 해칠 일은 절대 없다고. 그거 알려 주려고 왔어.”

뭐라고?

올리버의 말에 클레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여기까지 쫓아와서 하는 말이 고작 그건가?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에게 올리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찾아봤는데 꿈은 현실의 반대라는 말 있더군.”

이걸 찾느라 오랜만에 서재도 들어가 봤다. 유제니는 대체 무슨 책을 그리도 많이 읽는지. 올리버는 서재 안의 책만 가져다 팔아도 유제니의 지참금은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유제니를 죽이는 꿈은 내가 유제니를 위해 죽을 거라는 말이지.”

이 남자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리둥절하던 클레어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녀는 결국 참다 못하고 물었다.

“레이디 비스컨을 위해 죽을 겁니까?”

“아니, 내가 미쳤어?”

뭐라는 거야, 진짜. 클레어의 얼굴에 그런 표정이 떠올랐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올리버 역시 잠시 당황했다가 말했다.

“내 말은, 꿈은 반대라는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올리버의 얼굴이 묘하게 뿌듯해 보여서 클레어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아는 비스컨 백작은 늘 약간은 화가 나 있었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자신의 행동을 사사건건 반대해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그런 비스컨 백작이 한심스럽게 느껴지기도 했고.

하지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리버 역시 클레어가 슬쩍 웃는 것을 봤다. 분위기가 누그러졌다는 증거다. 물론 그녀가 웃는 걸 말하면 이 분위기가 깨질 것이라는 걸 올리버는 아주 잘 알았다.

여자들은 종종 그런다. 그의 어머니도 그에게 짜증을 내다가 그의 말 한마디에 피식 웃곤 했다. 그리고 올리버가 그걸 입에 올리면 곧바로 정색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잠시 올리버를 보며 미소를 짓던 클레어는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지금 그녀가 이 남자를 보고 웃고 있을 때가 아니다.

“뭐든지.”

클레어의 질문에 올리버는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귀족 남성 특유의 허세가 느껴지는 대답에 클레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꿈에서는 그의 이런 점이 싫었다.

비스컨 백작이 허세를 부릴 수 있는 건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뒷일을 처리해 줄 거라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가 레이디 비스컨을 믿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원래 성격이 이런 거다. 그리고 클레어는 그걸 싫어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기 시작했다.

“만약 레이디 비스컨이 결혼하라고 하면 결혼할 겁니까?”

“그건 만약이 아닌데.”

올리버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유제니는 지금도 그에게 장가 좀 가라고 구박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