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39 – 7
엘리엇의 물음에 클레어는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유제니는 자신을 공격한 커센 양을 용서하겠다고 했다. 심지어 먼저 비스컨 백작 부인에게 찾아가 커센 가에 항의하지 말아 달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녀가 아는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다. 그녀도 그랬다. 조금 방식이 거칠고 냉정하긴 했지만 대부분 그렇게 처리했다.
레이디 데번에게 딸이 죽었다고 하고 숨겨서 다른 사람이 키우게 하는 것처럼.
“모든 피해자가 무고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하시더군요.”
커센 양은 이미 피해자다. 그녀가 피해자라는 사실이 레이디 비스컨을 공격했다는 사실에 가려져서는 안 된다. 유제니는 그렇게 말했다.
클레어 역시 유제니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커센 양이 레이디 비스컨을 공격한 건 나쁜 짓이지만, 그녀의 말대로 모든 피해자가 무고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군. 고맙네.”
엘리엇은 클레어의 이야기를 듣고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떠났다. 그 미소의 느낌이 그리 밝지 않아서 클레어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금세 잊어버렸다.
다음 날 아침, 유제니에게 커센 가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혹시 커센 양이 어디로 간다거나 그런 이야기를 한 적, 없죠?”
커센 양이 어디로 간다고? 클레어는 무슨 소린지 몰라서 물었다.
“커센 양이 사라졌어요?”
“커센 양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전부 다요.”
유제니는 커센 양이 사과만 하면 그녀가 자신을 공격한 걸 없었던 일로 해 주겠다고 했다.
커센 가로서는 무조건 받아들일 제안이다. 하지만 아무 연락이 없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심부름을 다녀온 하인이 말했다.
“커센 양이 살던 집이 텅 비어 있대요.”
커센 씨에게 빚 독촉을 하러 간 사람이 발견했다고 한다. 가구는 물론 입던 옷과 약간의 음식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집 사람들은 하녀 한 명 없이 살았기 때문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 줄 사람이 없다.
“이상한 일이네요.”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고 표정을 관리했다. 머릿속에 어제 만난 번즈 백작의 이상한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 짓이죠?”
몇 시간 뒤, 번즈 백작을 만난 클레어는 대뜸 그렇게 따졌다.
엘리엇은 갑자기 자신의 집 앞에 나타난 클레어를 보고 당황하지도 않고 물었다.
“날 찾아온 건가?”
당연하다. 그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 화가 나서 찾아왔다. 클레어는 목소리를 낮춰 엘리엇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분은 옳은 일을 하려고 하셨어요. 당신은 어떻게 그분의 뜻을 거스를 수가 있죠?”
엘리엇의 얼굴에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 뻔뻔한 얼굴을 보자 클레어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잠시 비스컨 남작 때문에 잊고 있었지만, 그녀는 비스컨 남작만큼이나 번즈 백작도 싫어했다. 그의 귀족적이지 않은 태도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의견에 종종 반대했기 때문이다.
“나라고 그 여자가 마음에 들었는지 압니까? 레이디 비스컨이 옳은 일을 하신다고 하니 따른 것뿐이라고요.”
클레어도 커센 양을 쫓아가 감히 레이디 비스컨을 공격한 죗값을 물고 싶었다. 하지만 유제니가 그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참은 거다.
그런데 그걸 번즈 백작이 망쳤다.
분노한 클레어의 말에 엘리엇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왜 레이디 비스컨이 옳은 일을 해야 하지?”
“뭐라고요?”
그녀가 그걸 원하기 때문이다. 그게 옳으니까. 클레어는 엘리엇을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을 보듯 쳐다봤다. 그 시선에 엘리엇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옳은 일을 해서 그녀에게 무슨 보답이 있냐는 말일세.”
“보답이라니, 옳은 일을 꼭 보답이 있어야 합니까?”
사람이라면 그냥 옳은 일을 하는 법이다. 마지막까지 나라를 위해 선택한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처럼.
하지만 엘리엇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유제니가 옳은 일을 하는 게 싫었다. 그게 언젠가 그녀에게 계속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이 될까 봐 두려웠다.
“레이디 비스컨이 그 여자를 용서해서 내버려 둔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엘리엇의 질문에 클레어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되다니? 커센 양은 레이디 비스컨의 관대한 마음에 감동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짓을 안 하려고 노력하겠지.
과연 그럴까?
“자신을 도와주려 한 사람을 공격한 사람이야. 갑자기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을까?”
엘리엇의 빈정거림에 클레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꿈에서도 이런 일은 종종 있었다. 사람들은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행동을 오독했고 저마다 다른 이유로 그녀를 비난했다.
제일 먼저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을 마녀라고 부르기 시작한 건 그녀 덕분에 글을 배울 수 있게 된 수도에 사는 아이들이었다.
“그녀의 말이 맞아. 피해자가 무고해야 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커센 양은 몰락 귀족이고 피해자다. 유제니에 비하면 약자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대체 유제니가 그녀에게 뭐라고 했길래 커센 양이 공격했는지 제멋대로 떠들고 다닐 것이다.
피해자 앞에서 훈계를 했다거나 잘난 척했다는 식의 가벼운 헛소문으로 시작해서 그녀의 과거 행적까지 헛소문을 만들어 내겠지.
결국 유제니는 커센 양에게 공격받아 마땅한 사람이 된다.
“너무,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요.”
엘리엇의 말에 클레어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될까? 너무 비관적인 거 아냐?
엘리엇은 그녀의 순진한 말에 피식 웃었다.
그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너무 많은 사람을 봤다. 끔찍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를 버티게 한 건 유제니 같은 사람이었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왜 결혼하지 않는지 소문을 못 들었나?”
곧바로 클레어의 얼굴이 굳었다. 들었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지독한 남성 혐오자라 그렇다는 소문이었다. 반대로 그녀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 남자들이 도망쳐서 결혼을 못 하는 거라는 소문도 있었다.
암사마귀 같은 여자라는 말도 있었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문란해서 매일 밤 남자를 갈아치우지만 아무도 모르는 이유는 밤을 지낸 뒤 상대 남자를 산 채로 잡아먹어서 그렇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다. 하지만 그 소문을 믿는 사람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렌시드 가에 대한 소문은 어떻고?”
엘리엇의 빈정거림이 이어졌다. 꿈에서 어닝 렌시드는 결혼 직전 매춘부를 옆에 태운 채 마차 사고로 사망했다. 하지만 유제니가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되자 그 사실은 전혀 다른 소문으로 퍼져나갔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어닝 렌시드를 살해했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렌시드 가의 명예를 더럽히기 위해 매춘부를 죽여 어닝의 시체 옆에 놓았다고.
“나는 모든 사람에게 두 번째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레이디 비스컨의 의견에 동의하네.”
그는 진심으로 유제니의 의견에 동의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최소한 두 번의 기회가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겠지만.
“그리고 그 기회가 유제니에게도 있기를 바라지.”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에게는 없었다. 그녀는 선택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녀가 행복하고 평안한 노후를 즐길 수 있도록 하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처리해 버렸다고요?”
클레어는 처리라는 단어를 말하면서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엇의 설명에도 그녀는 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약 커센 양이 레이디 비스컨의 용서를 받고도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닌다면 그때 화를 내도 되지 않을까?
“커센 가에서 옳지 않은 행동을 하면 그때 문제를 제기해도 되잖아요?”
엘리엇은 옳지 않은 행동이라는 말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 세상에 옳지 않은 행동을 나서서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자신이 무고한 피해자를 공격한다고 생각하고 공격하는 사람은 없다. 상대방이 공격당해도 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공격하는 거다.
그는 클레어를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어차피 그녀와 그는 보고 경험한 게 다르다. 그가 생각하는 것과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다를 것이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을 마녀라 부른 아이들도 그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
사람을 죽이고 그 피를 마신다는 소문이 돌았다. 차 맛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하녀에게 차를 먹여 죽인 뒤 하녀의 가족들을 모조리 참수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 정도면 마녀로 불릴 만하지 않은가.
사람들에게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공격당해 마땅했다. 왕족이 모두 죽은 것도, 어닝 렌시드가 마차 사고로 죽은 것도, 레이디 데번이 반란을 꾀하다 사형당한 것도 모두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나빴기 때문이다.
“나는 레이디 비스컨이 옳지 않길 바라.”
그녀가 할 수 있는 많은 잘못과 실수를 하길 바란다. 그녀를 향한 사람들의 기대치가 낮아지길 바란다. 기대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녀의 목을 죄어 올 테니까.
“하지만….”
엘리엇의 설명에 클레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그녀는 그런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좋았다.
상처를 감내하면서 옳은 일을 하려는 모습이. 스스로 마녀가 되길 자처하면서 나라를 위해 버티는 모습이.
“자네는 레이디 비스컨이 자네가 바라는 만큼 올바르지 않다면 실망하지 않을 수 있나.”
엘리엇의 말에 클레어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친 표정이었다. 늘 감정 없는 무표정인 그녀가 지친 표정을 지었다는 게 놀라워서 클레어는 저도 모르게 물었었다.
- 전하께서도 지치실 때가 있군요?
그때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지은 미소가 생각났다. 서글픈 미소였다. 그래서 클레어는 자신이 뭔가 잘못한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사과하기 전에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입을 열어서 사과하는 걸 잊어버렸다.
- 그냥, 이 모든 게 언제 끝날지 생각 중이었네.
클레어는 그게 전쟁이라고 생각했었다. 길고 지루한, 끈질긴 전쟁. 이웃 나라의 침략과 드래곤의 영향을 받은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아 내야 했으니까.
하지만 전쟁을 말하는 게 아니었던 거다. 이미 그때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자신의 모든 게 언제 끝날지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잠깐.”
문득 클레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 의문을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저도 모르게 엘리엇에게 물었다.
“비스컨 남작이 저와 결혼한 게, 그분의 지시였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