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39 – 6
그 순간, 응접실 안에 기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자들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나와 어머니가 깜짝 놀랐다.
나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클레어와 나란히 서 있던 올리버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여자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 맞아요. 비스컨 남작님과 이야기하게 해 주세요. 그분은 정말로 제게 결혼하자고 하셨단 말이에요.”
이어서 다른 여자들도 용기를 얻은 것처럼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어어? 나는 여자들을 돌아봤다가 클레어와 올리버를 돌아봤다.
그리고 다시 여자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올리버 비스컨을 찾는 거 맞죠?”
“맞다고요! 왜 자꾸 이러는 거예요? 전 비스컨 남작님과 결혼을 약속했어요!”
커센 양의 고함에 이번에는 어머니도 움찔하고 놀랐다. 나는 다시 올리버를 쳐다봤다.
“올리버 비스컨은 난데?”
아주 잠깐, 우리와 손님들 사이에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리고 곧바로 여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짓말!”
“말도 안 돼!”
순식간에 응접실 안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여자들은 우리가 진짜 올리버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들은 올리버를 보며 소리쳤다.
“당신 누구야?”
“올리를 어디에 숨겼죠?”
아니, 이 남자가 올리버라니까. 나는 재빨리 어머니를 쳐다봤다. 손님들이 난동을 피울까 봐 걱정하셨는데.
다행히 어머니가 걱정하는 난동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집사가 하인들을 데리고 들어왔거든.
“이게 우리 집안 초상화예요.”
나는 빅스에게 부탁해 예전에 그린 초상화를 가져오게 한 다음 말했다. 부유한 집이라면 몇 년에 한 번 주기로 그리게 하기도 하지만 우리 집은 그렇게 하는 게 어렵다.
그래서 우리 집은 나와 올리버가 태어난 해와 내가 사교계에 데뷔한 해에 한 번씩 초상화를 그렸다.
지금 이 초상화는 당연히 내가 사교계에 데뷔하는 해에 그린 거다. 아버지와 어머니, 올리버, 내가 있다. 음, 이렇게 보니 확실히 올리버는 아버지를 닮았군.
“이분이 제 아버지고요.”
나는 사람들이 아버지를 먼저 볼 수 있도록 비스컨 남작을 가리킨 뒤 올리버로 손가락을 옮겼다. 그리고 약간 시간을 뒀다가 올리버를 쳐다봤다.
이건 우리가 속이고 말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라면 모르지만, 올리버는 아버지를 닮았으니까. 아버지가 더 젊고 건장한 모습이 올리버다.
여자들은 초상화와 올리버를 번갈아 보며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세상에. 나는 그들이 진짜로 몰랐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묻지. 자네들이 만난 사람이 정말 내 아들, 비스컨 남작이 맞나?”
어머니의 질문에 여자들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 모습에 어머니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적어도 한 명쯤은 올리버와 결혼 약속을 했다고 우겨서 우리 집에 들어오려 한다고 생각하셨거든.
하지만 이 사람들은 확실하게 피해자였다. 이건, 그러니까, 결혼 사기 정도 되려나.
“혹시 그 남자에게 돈을 줬나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군지 모를 남자가 자신을 비스컨 남작이라고 속인 이유가 뭘까. 비스컨 백작가가 그리 부유하지 않다는 건 사교계 사람들이라면 다 안다. 그러니 돈을 노린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거라면 상인의 딸만 노렸겠지. 힘겹게 살아가는 커피 하우스의 직원과 파산으로 몰락한 귀족의 방계라고? 이해가 안 된다.
“돈은, 아니요. 돈은 준 적 없어요. 오히려 받으면 받았지….”
거기까지 말한 커피 하우스 직원이 울음을 터트렸다.
경제적인 타격은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결혼 약속까지 했다는 건 그 남자를 믿었다는 말이겠지. 사랑했다는 말이고.
젠장. 기분이 별로 안 좋다. 내가 어닝의 배신을 알아차렸을 때가 생각났다. 나는 어닝을 사랑하지 않았는데도 상처를 받았다.
그를 좋아했고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으니까. 우리가 괜찮은 부부가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다면 사랑한 사람에게 속았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은 얼마나 더 상처를 받을까.
다른 여자들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상인의 딸을 쳐다봤다가 커센 양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채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렇다면 이 일은 비스컨 가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군.”
그때, 어머니가 말했다. 뭐라고요? 나는 깜짝 놀라서 어머니를 쳐다봤다.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가해자가 올리버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에게 사기를 쳤는데?
“그만 가 보게. 헛된 소문을 퍼트린 건은 어떻게 처리할지 좀 생각해 보겠네.”
어머니의 명령에 하인들이 여자들에게 다가갔다. 나는 재빨리 어머니를 향해 속삭였다.
“우리랑 상관없는 일이 아니잖아요?”
어머니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우리와 저 여자들은 아무 상관이 없지.”
“하지만 저 사람들은 올리버와 결혼하는 줄 알고 있었잖아요?”
저 사람들은 비스컨 남작이라는 이름에 속았잖아. 우리랑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나?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유제니, 네가 약혼할 때 내가 입단속 시킨 거 기억나니?”
그랬다. 어머니는 내가 어닝과 약혼하기 전에 올리버뿐 아니라 나와 집안사람들 모두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결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약혼 발표를 할 때까지 조용히 하라고.
약혼 발표 전에도 파담이 될 수 있다. 집안끼리 의견이 안 맞으면 그렇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는 그런 내 모습에 손을 내밀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확실히 되기도 전에 입을 놀리면 안 된다는 걸 저 여자들도 알았을 게다.”
그건….
그건 그렇다.
그렇긴 하다.
사실 그런 생각도 있었다. 우리 집에 먼저 연락하지 않고 올리버와 결혼 약속을 했다고 소문낸 건, 소문을 먼저 내서 우리가 허락하게 하려고 한 게 아닐까 하는.
하지만 마음이 안 좋았다. 그녀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한 것과 별개로 어쨌든 사기를 당한 거니까. 게다가 저 여자들은 자기가 만나는 올리버가 진짜 올리버인 줄 안 거잖아.
나는 응접실 밖으로 나와 하인들에게 끌려가듯 현관으로 향하는 여자들을 쳐다봤다.
혹시나 해서 올리버를 한 번 쳐다봤지만, 그는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클레어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라버니를 생각하면 다행이긴 하지.
“잠시만요.”
나는 하인들을 따라 현관으로 다가가며 집사를 말렸다. 이미 여자들은 현관 밖까지 나간 뒤였다.
“여러분.”
여자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조금 이기적이었고 조금 섣불리 행동했다고 해서 귀족 가문에게 비난을 받거나 혼나는 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자들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머니가 굉장히 걱정이 많으셨거든요. 제가 잘 말씀드려서 이번 일은 묻어 두는 거로 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적어도 우리 집까지 이 사람들을 힘들게 할 필요는 없다. 우리도 피해를 입긴 했지만, 피해자끼리 다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그 사기꾼은….”
어머니는 화가 나서 잡으려 하실 거다. 올리버도 마찬가지고. 나도 가능하면 잡고 싶다. 하지만 무슨 죄로 잡을 수 있을까.
올리버의 신분을 도용해서? 금전적으로 손해를 입힌 적이 없는데?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런 건 수사관에게 맡겨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아는 수사관에게 꼭 잡아 달라고 부탁할게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이미 상처와 걱정으로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그 순간, 커센 양이 발칵 소리쳤다.
“잘난 척하지 마!”
어?
나는 깜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옆으로 몸을 틀었다. 동시에 내 얼굴 옆으로 뭔가가 휙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유제니!”
“아가씨!”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제일 먼저 달려온 건 빅스와 클레어였다. 클레어가 나를 붙잡고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하인들이 커센 양을 붙잡았다.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잘난 척하지 마! 좋은 집에서 태어난 것뿐이잖아!”
이어진 커센 양의 고함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멍하니 그녀를 쳐다봤다. 내가 뭘 잘못했나?
“네가 나보다 잘났어? 건방진 년!”
“빅스!”
커센 양의 욕이 이어지는 것과 동시에 내 뒤에서 어머니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잠시 얼어붙어 있던 현관 앞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빅스의 지시로 하인들이 커센 양을 붙잡는 게 보였다. 곧바로 클레어가 나를 데리고 이 층으로 올라갔다.
“괜찮으세요?”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앉아 몸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 * *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다음 날, 클레어는 수도로 돌아온 엘리엇에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했다. 딱히 보고하는 건 아니다. 엘리엇이 먼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봤기 때문에 알려 주는 것뿐이다.
물론 엘리엇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충 알고 있긴 했다. 그가 없는 동안 유제니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까 싶어 미리 부하들에게도 지시를 내려놓았다.
그래서 엘리엇은 응접실 밖에서 일어난 일은 이미 알았다.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했고.
“좀 당황하신 모양이지만….”
거기까지 말한 클레어는 잠시 말을 멈췄다. 좀 당황한 정도가 아니다. 아마 꽤 놀랐을 것이다. 차라리 검을 든 상대라면 자신을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예 무기가 없는 여자였다. 유제니는 경계하지 않았고.
“괜찮아지셨습니다. 커센 양을 용서하겠다고도 하셨고요.”
“용서하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