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5화 (180/239)

185화. 39 – 5

“아니요, 제가 만난 분은 비스컨 남작님이에요.”

소피아 커센 양은 예상보다 좀 더 어렸다. 아니, 어려 보이는 건가? 나는 그녀의 나이를 묻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대신 로렌과 베라가 알려 준 그녀의 정보를 떠올렸다.

소피아 커센. 유명한 커센 자작가의 방계로 본가가 파산하면서 그녀의 가족도 파산했다. 때문에 소피아의 옷차림은 좋게 말해서 단출했다.

나이로는 이미 데뷔하고도 남았을 나이지만 어머니가 확인해 본 바로는 아직 데뷔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교계 데뷔에는 돈이 든다. 드레스를 맞추고 명함이나 장갑, 액세서리 등의 눈에 보이는 지출뿐만이 아니다. 왕궁이나 다른 집안의 초대를 받아 방문할 때 사용할 마차 값이나 편지, 작은 선물 같은 것도 돈이 든다.

선물을 받으면 거기에 맞는 답례를 하는 게 예의니까. 물론 상대방이 답례하기 어려울 정도로 값비싼 선물을 하는 것도 예의에서 어긋난다.

다행인 건 여기에서 구혼 선물은 제외된다는 거고.

“올리버 비스컨이요? 본인이 자신을 그렇게 말하던가요?”

내 질문에 소피아는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다. 지금 이 상황이 그녀에게 얼마나 불쾌한 상황인지.

결혼을 약속했는데 남자 쪽 가족들이 자신을 불러 진짜 약혼한 게 맞는지 묻고 있는 거다. 심지어 다른 여자들까지 불러서.

나는 소피아의 옆에 앉은 다른 여자들을 확인했다. 훨씬 잘 꾸미고 온 쪽이 상인의 딸이겠지. 이쪽은 소피아보다 어려 보였다.

옷차림만 봐서는 이쪽이 귀족처럼 보인다. 하지만 귀족이란 옷차림만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다. 자세나 장소에 따른 태도도 중요하다. 소피아는 차림새는 단출했지만 내 앞에서 당당했고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서 눈치를 보는 여자는 누가 봐도 커피 하우스의 직원으로 보였다. 소피아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지만 옷차림이나 태도가 가장 자신 없었으니까.

“절 무시하는 건가요? 제가 커센 가라서요?”

소피아의 반응은 조금 날카로웠다. 아무래도 내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부드럽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이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우리는 지금 이 상황이 오해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이 사람들은 우리가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나는 비스컨 가의 사람이고 레이디 비스컨이니까.

“아니에요, 커센 양.”

나는 한숨을 내쉬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그리고 다른 두 명을 확인했다. 둘 다 약간 기가 죽은 표정이다. 아무래도 여기가 비스컨 저택이기 때문이겠지.

방계라고는 해도 귀족 집안인 커센 양과 달리 두 명은 평민이니까. 생각해 보면 내가 레이디 비스컨인 걸 알았을 때 레이첼도 어쩔 줄 몰라 했지.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서예요. 저와 어머니는 올리버가 결혼할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그러자 소피아의 얼굴에 자랑스러운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신분만으로 보면 소피아가 가장 올리버와 결혼할 가능성이 크긴 하다. 나는 다른 두 명이 어깨를 움츠리는 것을 보고 덧붙였다.

“추궁하거나 비난하려고 부른 게 아니에요. 다시 말하지만 저와 어머니는 이야기를 확인하려는 것뿐이고요.”

“비스컨 백작 부인은 어디 계시는데요?”

소피아의 질문에 나는 응접실의 문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썼다. 어머니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 중이다. 오늘 아침부터 어쩔 줄 몰라 하셨거든.

다행인 건 어제 차에 넣은 술 덕분에 일찍 주무셔서 나도 잠을 잘 수 있었다는 거다. 몇 시간 못 잤지만, 어머니가 안 주무셨다면 더 못 잤겠지.

“조금 있다가 들어오실 거예요.”

나는 침착하게 말하고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머니는 이 사람들이 난동이라도 부리면 어쩌냐고 걱정하셨지만 내가 보기엔 그러지 않을 것 같다.

세 사람 다,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 보인다. 불쾌하게 느끼기도 하겠지.

“올리는요?”

이어진 소피아의 질문에 나는 잠시 올리가 누구인가 생각했다. 올리버를 부르는 모양이네. 이거 좀 이상하다.

올리버의 애칭이 올리긴 하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올리버를 올리라고 부르지 않는다. 올리버가 싫어하거든. 그러니 그의 친구들도 올리라고 부르지 않을 거다.

“올리버도 들어올 거예요. 오라버니는 지금….”

뭐라고 하지? 클럽 가서 술을 마시고 있다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며 나가 버렸다. 클럽에 가서 술이라도 마셔야 진정이 될 것 같다나.

좀 짜증 나지만 이해도 된다. 지금 올리버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거니까.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지.

세 명의 남자에게 구혼을 받아도 당황스러운데 세 명의 여자에게 동시에 구혼을 했다는 소문이 나면 더 당황스러울 거다.

“그럼 저 사람은 누구죠? 하녀?”

곧바로 소피아가 물었다. 내 뒤에 서 있는 클레어에 관해 묻는 거다. 나는 클레어에게 고개를 돌려 양해를 구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쪽은 내 친구예요. 클레어….”

“클레어 라넌입니다.”

내가 막 클레어를 라넌 경이라고 소개하려는데 클레어가 내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여기서 라넌 경이라고 소개를 받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다시 올리버가 구혼했다고 주장하는 여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 계신 분 중에 올리버에게 반지를 받은 분도 있다고 들었어요.”

곧바로 상인의 딸이 놀란 표정으로 다른 두 명을 돌아보았다. 커센 양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커피 하우스의 직원은 가엾게도 더욱더 기가 죽었고.

아이고.

나는 사람들의 얼굴에 희비가 엇갈리는 것을 보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안 좋다. 이게 올리버가 잘못한 거든, 안 한 거든 어쨌든 이 사람들은 피해자니까.

“반지를 볼 수 있을까요?”

“제가 왜 보여 줘야 하죠?”

주섬거리며 반지를 꺼내려는 상인의 딸과 달리 커센 양은 날카롭게 물었다. 뭐든 의심하는 건 나쁘지 않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올리버는 반지를 준 적 없다고 하거든요. 사실, 오라버니는….”

“여러분.”

올리버는 누군가에게 구혼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고 하려는데 응접실 문이 열리면서 집사가 들어왔다. 그는 우리를 한 번 돌아보더니 한쪽으로 몸을 비키며 말했다.

“비스컨 백작 부인이십니다.”

나는 어머니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이 사람들을 만나러 들어오기 전까지 어쩔 줄 몰라 하셨는데.

내 걱정과 달리 어머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녀는 빅스에게 고맙다고 말하더니 내 옆으로 와서 여자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지도, 인사를 하지도 않는 건가?”

백작 부인이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연장자고.

당연히 어머니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작위가 낮다면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세 명 중 어느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이 없었다. 커피 하우스의 직원이나 상인의 딸은 그렇다 쳐도 커센 양까지도.

커센 양은 입을 딱 벌리고 어머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곧바로 그녀에게 물었다.

“소피아 커센 양?”

“네, 네.”

그제야 커센 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걸 본 다른 여자들도 자리에서 일어났고.

저런.

어머니는 예의에서 어긋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예의범절 수업을 그렇게 많이 받았던 것도 그런 이유다. 그렇다면 올리버는 왜 저 모양이냐고 누군가 물을 텐데.

원래 인간의 힘으로는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있는 법이다. 자식 농사 같은 거.

“실망이군.”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 앉았다. 소피아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어머니는 신경 쓰지 않고 손을 저어 앉으라고 말했다.

그렇군. 어머니는 이 세 사람 중 소피아 커센 양에게 가장 기대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소문이 사실이건 아니건, 소피아와 올리버를 결혼시킬 각오를 하고 응접실에 들어오신 거다.

“내 아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결혼 약속을 한 적 없다고 하는군.”

나와 달리 어머니는 자리에 앉자마자 냉정하게 말했다. 동시에 여자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연히 반지를 준 적도 없다고 하고.”

“거짓말!”

곧바로 상인의 딸이 소리쳤다. 하지만 어머니가 쳐다보자 그녀는 몸을 움츠리며 작게 덧붙였다.

“거짓말이에요. 전 반지를 받았단 말이에요.”

“그건 네 주장이지.”

마음이 조금 안 좋아졌다. 이 사람들은 피해자잖아. 올리버가 속이지 않았다 해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속았다.

“감히 내 반지를 받았다는 거짓을 주장하려거든 어디 한 번 보여 주려무나. 이것과 무엇이 다른지 확인해 보지.”

어머니는 가차 없이 말하며 자기 왼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비스컨 백작 부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어머니의 것이었다.

커센 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어머니의 반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물었다.

“다른 반지를 그 반지라고 하시는 거라면….”

“건방진 것!”

어머니의 호통이 응접실을 갈랐다. 아이고. 나는 표정 변화 없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 그 말은 커센 양이 잘못했다. 이런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반지는 다른 걸로 바꿔치기하기가 어렵다.

당연하잖아. 대대로 비스컨 백작 부인의 초상화에 같이 그려 넣는 걸.

“실례.”

그때, 응접실 문이 열리면서 올리버가 나타났다. 아, 왜 이제 와? 화를 내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화가 나서 커센 양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입을 열기가 어렵다.

그는 나와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더니 슬그머니 내 뒤로 향했다. 그리고 클레어에게 뭔가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 거겠지.

“네가 받았다는 내 반지를 어서 꺼내 보거라. 네 말이 거짓인지 내 말이 거짓인지 확인해 보자.”

어머니의 재촉에 커센 양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녀는 어머니의 서슬 퍼런 호통에 못 이겨 품에서 반지를 꺼냈다.

“유제니.”

커센 양에게서 반지를 받아 든 어머니는 가만히 반지를 내려다보다가 나를 불렀다. 그리고 내게 반지를 내밀며 물었다.

“네가 보기엔 이게 비스컨 가에 맞는 수준의 반지 같니?”

안타깝게도 커센 양이 내민 반지는 품질이 현저하게 낮은 보석이었다. 평소에 내가 끼고 다니기에는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비스컨 백작 부인에게 대대로 내려오기에는 보석의 광택이 너무 탁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요즘 디자인이네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대로 내려오는 반지란 좋게 말하면 고풍스럽고 나쁘게 말하면 촌스럽다. 짧게는 몇십 년 전, 길게는 몇백 년 전에 디자인한 것이기 때문이지.

그때, 커센 양이 소리쳤다.

“아니에요! 이건 진짜로 비스컨 남작님에게 받은 거라고요! 비스컨 남작님은 어디 계시죠? 왜 안 오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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