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4화 (179/239)

184화. 39 – 4

* * *

올리버는 엘리엇이 떠나고 두어 시간 뒤에 집에 돌아왔다. 술이 든 차를 두 잔이나 마신 탓에 나른해진 어머니를 대신해서 나는 올리버를 취조했다.

“여자 셋? 셋? 세에엣?”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자 셋에게 구혼했냐는 내 비난에 올리버는 과도하게 놀라는 시늉을 했다. 아니, 저건 시늉이 아니라 진짜인 것 같은데.

“한 명도 아니고 셋이라고?”

미치고 팔딱 뛴다는 걸 사람으로 표현하면 지금 올리버가 아닐까. 그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응접실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누구라고?”

한참을 응접실을 서성인 올리버가 물었다. 자기가 구혼한 여자의 이름도 몰라? 제일 먼저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나는 순순히 내가 들은 이름을 불러 주었다.

사실 나도 반반이다. 올리버가 그런 망나니짓을 했을 리 없다는 생각과 그래도 혹시라는 생각 반.

나도 오라버니를 믿는다. 그런 미친 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적어도 나와 같이 자란 올리버 비스컨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오해가 있을 수도 있잖아. 올리버가 그 여자들이 오해할 만한 행동을 했을 수도 있다.

“누군데, 대체! 그 여자들 대체 누구냐고?”

이름을 들은 뒤에도 올리버는 그게 대체 누구냐는 반응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이니?”

술 때문에 약간 나른해진 어머니가 물었다. 올리버는 어머니에게 몸을 돌리고 말했다.

“전혀요! 이름도 처음 들어요!”

“소피아 커센도?”

나는 확실하게 하기 위해 물었다. 올리버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누군데? 잠깐, 커센 가면 몇 년 전에 쫄딱 망한 집안 아냐?”

적어도 커센 가의 존재 정도는 아나 보군. 뒤이어 다른 두 명의 이름도 불러 줬지만, 올리버는 여전히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진짜인 것 같다. 나는 어머니의 옆에 앉아서 올리버를 가만히 쳐다봤다. 올리버를 믿는다. 물론 나는 그가 멍청한 짓을 할 거라는 것도 믿는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까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걸 믿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여자 셋에게 결혼 약속을 한 적 없다고?”

다시 어머니가 물었다. 올리버는 어이가 없다는 듯 어머니께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결혼이요? 만난 것도 아니고 심지어 결혼 약속을 했다고요?”

그런 말은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목이 탄다, 타.

“이상한 소문도 못 들었어? 오라버니가 어떤 여자를 만난다는 소문 말야.”

우린 이렇게 많이 들었는데? 물론 소문이라는 건 언제나 당사자에게 가장 늦게 들어가는 법이다. 하지만 이 집안에서 가장 소문에 느린 위치를 맡은 내가 있잖은가.

내가 올리버에게 만나는 여자가 있는 것 같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소문이 빠른 올리버가 못 들었다고?

놀랍게도 올리버의 표정이 굳었다. 어라?

“아, 그게….”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금세 공들인 올리버의 머리가 망가졌다. 저 머리, 나보다 더 오래 공들여서 손본 걸 텐데.

아침마다 올리버가 자기 방에서 머리카락에 얼마나 공들이는지 안다. 그러니 지금 저 행동은 정말로 당황했다는 뜻이겠지.

“다른 여자인 줄 알았지.”

“다른 여자가 있어?”

네 번째 여자가 있다고? 나와 어머니가 모르는? 어머니를 돌아보자 그녀는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런, 취하신 모양이네.

평소의 어머니라면 지금 이 상황이 전혀 기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셨을 거다. 올리버는 지금 세 명의 여자에게 구혼을 했다는 소문이 따라붙었다. 네 번째 여자가 제정신이라면 그런 소문이 도는 남자와 약혼하려 할 리가 없다.

“아니, 없어.”

놀랍게도 올리버는 곧바로 부인했다. 뭐라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다시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와 똑같은 표정을 지은 어머니를 확인하고 올리버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가만히 있었어?”

“아니, 그게….”

그게?

우물우물거리던 올리버는 갑자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래서, 내가 여자 셋한테 결혼 약속을 했대?”

왜 네 번째 여자의 이야기는 감추려는 걸까. 의심스럽게 생각하는데 어머니가 물었다.

“심지어 한 명에게는 네가 반지까지 줬다던데.”

“반지?”

올리버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외치는 순간, 내가 끼어들었다.

“두 명이에요, 어머니. 한 명에게는 어머니의 반지를 줬대요.”

“두 명? 내가 뭘 줘?”

“내 반지?”

두 명의 반응이 곧바로 튀어나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내가 들은 이야기를 두 사람에게 전달해 주었다.

비스컨 백작 부인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반지를 결혼 약속의 징표로 줬다는 부분에서 어머니와 올리버는 입을 딱 벌렸다.

“맙소사, 앤! 앤!”

어머니의 비명 같은 부름에 앤이 뛰어 들어왔다. 열린 문 사이로 앤뿐 아니라 다른 하인들도 몇 명 보인다. 무슨 일인지 엿듣고 있었던 모양이지.

놀랍지도 않은 일이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어머니는 앤에게 자신의 반지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마님, 여기 있습니다.”

놀랍게도 반지는 뛰어나간 앤이 아니라 빅스가 가져왔다. 빅스도 우리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모양이지? 나는 웃어야 할지 화내야 할지 몰라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긍정적으로 보자. 어차피 빅스도 우리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한다.

“이걸 줬다고?”

어머니는 빅스가 가져온 상자 안에서 반지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재빨리 올리버를 쳐다보자 그 역시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다면 올리버가 상대방에서 백작 부인의 반지를 줬다는 것 역시 헛소문인 모양이다. 아니면….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올리버는 잘생겼고 비스컨 백작이 될 사람이니 좋아하는 여자가 있을 수 있다. 당연히 사교계의 시선을 받고 있고.

그가 무도회에서 어떤 여자와 춤을 두 번 추는 순간, 사교계는 올리버가 곧 결혼한다는 소문이 돌 거다. 그렇기 때문에 올리버가 무도회에서 춤을 잘 안 추려 하는 거기도 하고.

그런데 내가 아는 한 올리버는 최근에 무도회에서 춤을 춘 적이 없단 말이지.

소문이 날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여자 셋과 만난다는 소문이 났다. 그것도 각각.

“진짜 그 여자들 몰라?”

나는 어머니의 반지가 진짜인지 확인하는 올리버에게 물었다. 혹시 바꿔치기 당하기라도 한 게 아니냐는 어머니의 말에 그는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아, 진짜 모른다니까? 정말 이름도 처음 들었어. 커센 가만 빼고.”

커센 가조차도 가문 이름을 들은 거지 소피아 커센이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도 없다는 말에 나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확실하게 만난 적 없는 거지?”

“그래! 만나긴 뭘 만나?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한데….”

거기까지 말한 올리버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머리가 복잡하다고? 올리버가?

내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재빨리 표정을 바꾸더니 말했다.

“커피 하우스에서 일한다는 그 아가씨는 모르겠어. 최근에 커피 하우스에 친구들과 갔다 왔으니까.”

하지만 거기 직원과 한 대화라곤 나는 커피 한 잔이라는 말뿐이라고 한다.

“상인의 딸이라는 아가씨는? 그 상회와 만날 만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이어서 어머니가 물었다. 커센 양이라면 만났을 수도 있다. 무도회나 음악회나. 우리는 귀족이니까 누군가의 집에서 만났을 수도 있지. 그리고 올리버 성격상 소개를 받아도 ‘아, 네. 반갑습니다’ 하고 넘겼을 거다.

하지만 커피 하우스의 직원이나 상인의 딸이 가장 이상했다.

“전혀요. 제가 상회와 만나서 뭘 하겠어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 엘리엇처럼 사업을 한다거나. 하지만 생각해 보니 우리 집은 사업을 시도할 만한 자금이 없다.

“그럼 이렇게 해요.”

혹시 올리버에게 숨겨진 재능이 있지 않을까. 사업 수완 같은 거.

하지만 올리버의 빛나는 금발만큼이나 빛나는 얼굴을 보니 그런 걸 기대하면 안 될 것 같다. 비스컨 남매의 명예를 위해 말하자면 내가 올리버에게 너무 가차 없는 게 아니다.

올리버가 아카데미에 다닐 때 수학 숙제를 내가 다 해 줬거든. 덕분에 올리버는 대수학을 괜찮은 성적으로 통과했다.

왜 괜찮은 성적이었냐면 내가 해 준 숙제는 만점이었는데 아카데미에서 본 시험은 평균 이하라 그렇다.

“올리버가 여자 넷과 결혼 약속을 했다는 거잖아요?”

“셋이야, 셋!”

재빨리 올리버가 끼어들었다. 아까 한 명 더 있다며? 내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자 그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사람은 결혼 소문이 난 게 아니거든. 그냥, 좀, 에이씨. 어쨌든 그 사람은 아냐.”

허어.

이번 일이 끝나면 네 번째 사람이 누군지 한 번 더 취조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다시 말했다.

“좋아. 지금 여자 셋이 오라버니가 구혼했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난 누군지도 몰라.”

아, 알았다고. 나는 억울하다는 듯 다시 서성이는 올리버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게 아닌지 확인해 봐요. 이름을 잘못 들었다거나 그럴 수 있잖아요.”

“그, 그럴 수도 있을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좀 회의적이다. 자기와 결혼을 약속한 남자의 이름을 잘못 들을 수가 있을까? 게다가 한 명은 비스컨 백작 부인의 반지까지 받았다며.

“맞아! 뭔가 착각한 걸 거야!”

내 제안에 올리버는 손뼉을 치며 동의했다. 그러더니 안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 친구도 그런 적이 있거든. 무도회에서 기가 막힌 여자를 만났는데 그 여자 성을 잘못 들어서 찾느라 혼났어. 러긴이랬는데 알고 보니 르기인이더라고.”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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