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39 – 3
한 명은 커피 하우스에서 일하는 직원이고 한 명은 부유한 상인의 딸이다. 둘 다 평민이었지만 같은 사람이라고 오해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이름도 달랐고 생김새도 달랐으며 생활 반경도 겹치지 않았으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올리버가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거로 보였다. 유제니의 설명을 들은 세이마리아는 몇 번이나 그럴 리 없다고 말하려다가 멈췄다.
“커피 하우스의 직원과 상인의 딸이라고?”
유제니의 설명을 모두 들은 뒤 세이마리아가 확인한 건 그거였다. 뭔가가 이상한데? 유제니가 왜 그러냐고 묻자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내가 듣기로는 귀족 집안이었거든.”
물론 완벽하게 세이마리아의 마음에 든 집은 아니었다. 몰락한 가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세이마리아는 모든 게 다 자기 마음에 들 수 없다는 걸 아주 예전부터 체득했다. 그녀의 아들은 남들이라면 이미 결혼했을 나이지만 아직 약혼조차 하지 않았다. 좀 빠른 사람들은 벌써 아이까지 있다.
그런 상황에서 세이마리아는 올리버가 만나는 여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물론,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이름도 들으셨어요?”
유제니의 질문에 세이마리아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당연히 들었다. 어떤 사람이고 어떤 집안인지는 천천히 알아볼 생각이었다. 우선 올리버를 불러 이야기를 한 뒤.
“소피아 커센.”
커센. 낯선 이름이다. 유제니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커센 자작가로군요.”
“방계라더구나.”
커센 자작가는 사업의 실패로 가세가 기울었다. 말이 기울었다지 쫄딱 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막대한 빚과 함께 파산했으니까. 후계자인 커센 자작의 아들은 외국으로 나가 버렸고 자작과 자작 부인은 사망했다.
원래대로라면 아들이 작위를 이어받아야 하지만 그가 과연 막대한 빚을 갚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결국 자작가의 빚은 그대로 남아 있다.
“어떻게 만났대요?”
유제니의 질문에 세이마리아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까지는 모른다. 커센 자작가가 파산한 게 몇 년 전이니까 소피아 커센의 나이가 스무 살 초반이라면 사교계에 데뷔하지 못했겠지.
“올리버는 언제 들어온대요?”
우선 올리버와 이야기를 해 봐야 한다. 유제니의 질문에 세이마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모른다. 언제 어딜 간다고 자세하게 알리지 않으니까.
“도련님께서는 오늘 클럽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녁때 친구 모임에 가실 수도 있다고 하셨고요.”
그때, 빅스가 응접실 문 앞에 서서 말했다. 어머니에게는 알리지 않아도 집사에게는 알리는 모양이다. 유제니는 클럽에 사람을 보내 올리버를 불러오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집사의 뒤로 거대한 사람이 나타났다. 곧이어 집사가 말했다.
“그리고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안다. 유제니는 집사의 안내 없이 응접실에 들이닥친 엘리엇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한 번 돌아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엘리엇, 무슨 일이에요?”
“죄송합니다. 잠시 수도를 비우게 돼서 인사를 하러 들렀습니다.”
그제야 유제니는 그가 왜 찾아왔는지 깨달았다. 엘리엇이 전에 수도를 떠나야 한다고 말한 적 있다. 광산에 일이 있다고 했었다.
그래 봤자 하루 이틀이라 그녀는 그가 인사를 하러 올 줄은 몰랐다. 유제니가 잠시 당황하는 사이 세이마리아가 물었다.
“번즈 백작, 수도를 비운다니? 무슨 일이지?”
“별일 아닙니다. 광산에 다녀와야 해서 하루 이틀 비울 겁니다.”
하루 이틀이라고? 광산에?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를 만도 하지만 차에 탄 술 때문에 세이마리아의 머릿속은 그렇게 빠르게 돌지 않았다.
적어도 자식 하나는 문제가 없군.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러 와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고작 이틀 비우는 건데도 인사하러 왔다는 건 번즈 백작이 유제니에게 푹 빠졌다는 증거다.
“무슨 일 있습니까?”
엘리엇을 배웅해 준다는 핑계로 응접실에서 나온 유제니에게 엘리엇이 물었다. 유제니는 뻔뻔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라뇨? 아무 일도 없는데요.”
그러자 엘리엇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는 유제니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백작 부인께 술 냄새가 나던데요.”
젠장.
유제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가볍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다. 올리버가 여러 명의 여자와 동시에 만나고 있는 것 같다고.
“비스컨 남작이요?”
놀랍다는 표정이 엘리엇의 얼굴에 떠올랐다. 다행이군. 유제니는 적어도 올리버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비스컨 가 밖에도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래서 어머니와 둘이 오라버니를 어떻게 죽일지 고민 중이었어요.”
여유가 생기자 농담이 흘러나왔다. 엘리엇은 유제니의 장난스러운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제가 죽여 드릴까요?”
“올리버를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 유제니의 얼굴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곧, 엘리엇도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제가 말을 맞춰 드리면 되나요? 당신과 함께 있었다고?”
깜찍하게도 엘리엇의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겠다는 유제니의 제안에 엘리엇은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그도 안다.
이게 장난이기 때문에 유제니가 그와 올리버의 살해 공모를 하고 있다는 걸. 엘리엇이 진짜로 유제니를 위해서라면 올리버를 죽여 버릴 수 있다는 걸 안다면, 이 좋은 분위기는 박살 나겠지.
“아니요, 안 그러셔도 됩니다.”
농담을 끝내는 엘리엇의 말에 유제니는 미소를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덕분에 기분이 풀어졌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고마워요.”
농담 때문에 기분이 풀어지긴 했지만, 사건이 해결된 건 아니다. 올리버가 여러 여자에게 결혼 약속을 했다는 이야기는 오히려 이제 시작일 거다.
이 사건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유제니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엘리엇 때문에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아닙니다. 언제든지 말씀만 하세요. 원하신다면 올리버를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지만 유제니는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엘리엇은 고개를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대가는 내키신다면 키스해 주시면 됩니다.”
유제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가 멈칫하자 엘리엇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
“농담입니다.”
농담이 아니면 못할 말이긴 하다. 그는 유제니가 자신을 경계하지 않길 바라니까.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길 바라기도 했다.
다행히 유제니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저 얼굴로 그런 말을 하면 기분 나쁘기도 어렵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아직 올리버를 죽이지 않는 게 좋겠어요. 오라버니가 사라지면 당신과 결혼하기가 어렵거든요.”
엘리엇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유제니는 그의 표정을 보고 설명했다.
“올리버가 죽으면 내 자식이 비스컨 백작이 되어야 하거든요.”
올리버가 죽으면 비스컨 가의 다른 남자가 없기 때문에 계승권이 유제니를 통해 이어진다. 그러니 비스컨 가가 온전하게 이어지려면 그녀는 계승권이 없는 남자를 데릴사위로 들여야 한다.
하지만 엘리엇이 놀란 건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와 결혼할 생각이 있으시군요.”
곧바로 유제니의 얼굴이 확 하고 붉어졌다. 그런 쪽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물론 그녀는 엘리엇과 결혼할 생각이 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올리버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죠.”
유제니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자 재빨리 엘리엇이 말했다. 농담의 연장선에 다시 두 사람의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유제니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늦어도 이틀 안에 다녀오겠습니다. 그전까지 부디….”
위험한 일 하지 말고 안전하게 지내라고? 유제니는 엘리엇의 다음 말을 예측했다. 하지만 엘리엇은 씩 웃으며 말했다.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지내세요. 너무 재미있게 지내지는 마시고요.”
뭐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녀에게 그가 덧붙였다.
“당신을 재미있게 해 준 사람에게 질투가 나니까요.”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유제니는 엘리엇의 말이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웃다가 말했다.
“그래요. 당신도 잘 다녀와요.”
여행 가는 남편과 배웅해 주는 아내 같다. 엘리엇은 그렇게 생각하고 씩 웃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가지 말까. 아주 잠깐, 엘리엇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깟 광산, 팔아 버리지 뭐. 유제니의 것이라 사긴 했지만, 유제니에게서 떨어져야 할 정도로 중요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유제니가 그에게 다가오더니 발뒤꿈치를 들었다.
얼굴이 조금 가까워졌다. 엘리엇은 그렇게 느꼈고 가만히 있었다. 다음 순간, 그의 뺨에 그녀의 입술이 닿았다. 뺨보다는 턱에 가까웠지만.
“올리버를 죽이지 않기로 해서.”
유제니는 그렇게 말하고 배시시 웃었다. 그 표정을 보자 엘리엇은 지금 당장 올리버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유제니가 말을 이었다.
“고마워요. 모든 게. 오늘 인사하러 와 줘서. 날 위로해 줘서. 그리고 재촉하지 않아 줘서.”
유제니는 엘리엇이 언제든지 결혼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가 유제니에게 결혼하자고 재촉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고.
그가 해 주는 모든 걸 고맙게 생각한다. 그런 인사에 잠시 굳어 있던 엘리엇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나의 레이디 비스컨.”
엘리엇은 유제니의 손을 잡고 몇 번이나 한 말을 다시 입에 올렸다.
“그 호칭 앞에 ‘나의’라는 단어를 붙이는 걸 허락해 준 것만으로 당신은 내 모든 것을 기꺼이 가질 자격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