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2화 (177/239)

182화. 39 – 2

“그가 죽인 거죠!”

엘리엇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클레어가 소리쳤다. 그녀는 엘리엇에게 덤벼들 것처럼 외쳤다.

“그가 죽였어요! 그 자식 때문에! 그 자식이 죽인 거라고요!”

그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젠장.

엘리엇은 클레어를 찾아온 것을 후회했다. 그와 클레어의 입장은 다르다.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그 기억 속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은 달랐다.

“비스컨 남작이 아니었어도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죽었을 거다. 뒤늦게야 엘리엇은 그녀가 그것을 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더 가슴이 아팠지만.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그자가 아니었다면, 그자가 오지 않았다면 그분은 살았을 거예요! 그자 때문에, 그, 그 빌어먹을 가문 때문에….”

비스컨 백작가.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모든 것을 이용했다. 나라를 위해. 그리고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그 모든 것 중에는 자신의 목숨까지 포함돼 있었다.

비스컨 백작가가 없었다면, 애초에 비스컨 백작이 전투에서 사망했다면,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 그동안 고생이 많았어.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마지막 말이 클레어의 귓가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고 있다. 무슨 생각으로,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말했던 걸까.

번즈 백작을 멀리 보내고 클레어까지 떨어트려 놓은 뒤 홀로 쓸쓸하게 죽어 갔을 그녀가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번즈 백작은 어떻게 그렇게 비스컨 남작을 그냥 둘 수가 있지? 그녀였다면, 클레어가 번즈 백작 같은 힘과 실력이 있었다면 비스컨 남작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고개를 든 클레어는 몸을 돌려 떠나고 있는 엘리엇을 발견했다.

“잠깐.”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클레어는 놀라서 엘리엇을 쫓아갔다. 그리고 그의 뒤에서 물었다.

“뭐 하는 겁니까?”

“대화가 안 통할 것 같아서.”

엘리엇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대화가 안 통하는 사람을 상대할 생각은 없다. 그가 우는 사람을 달래야 한다면 그건 상대방이 유제니이기 때문일 것이다.

뻔뻔하기까지 한 엘리엇의 태도에 클레어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멍하니 쳐다봤다.

이런 놈이었다. 꿈에서도 번즈 백작은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에게만 감정을 보였다. 어쩌면 그래서 지금도 유제니에게만 열중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클레어는 그런 엘리엇이 부러워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겠군요. 비스컨 남작을 아무 감정 없이 대할 수 있어서.”

“난 그에게 감정이 없다고 말한 적 없는데.”

“감정이 있는데 그를 그냥 두는 겁니까?”

거짓말 말라는 클레어의 말에 엘리엇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딘가 비틀린 미소에 클레어의 기분이 섬뜩해졌다. 하지만 그 미소는 금세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반대로 비스컨 백작 때문에 그때까지 살아 있었을지도 모르지.”

씁쓸한 가설에 클레어의 얼굴에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헛소리! 그분은 책임감이 강한 분이었어요. 절대….”

절대 무너져 가는 나라와 사람들을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사람이 아니다.

아닌가? 정말?

엘리엇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본 클레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라넌 경,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오히려 비스컨 백작이 있었기 때문에 버텼던 걸지도 몰라. 그 말은….”

“압니다.”

엘리엇의 잔인한 말에 클레어는 고개를 숙이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비스컨 백작 때문에 버텼다는 건 클레어가 그분께 버틸 만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번즈 백작도 그런 존재가 되지 못했다는 뜻이고.

“아니면.”

그때, 다시 엘리엇이 입을 열었다. 아니면? 약간의 희망을 품고 고개를 든 클레어의 눈에 엘리엇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다가오는 남자도.

“비스컨 백작이 있어서 마음 놓고 자네와 나를 놓아줄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지.”

“그게 무슨….”

“번즈 백작, 여기서 또 만나는군.”

클레어가 묻는 것과 동시에 다가온 올리버가 입을 열었다. 클레어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는데 그와 클럽에서 이야기를 나눈 엘리엇이 먼저 그녀와 만나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는 질문에 엘리엇은 올리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잠깐.”

설마 클레어가 미쳤는지 확인하러 왔다는 거야? 당황하는 올리버와 달리 엘리엇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괜찮은 것 같군요.”

그리고 그대로 올리버를 지나쳐 떠나 버렸다.

아, 진짜. 괜히 이야기했어. 올리버는 멀어지는 엘리엇의 뒷모습을 보며 투덜거렸다. 그는 클레어가 미쳤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그럴까 봐 걱정한 거지.

하지만 곧바로 올리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그 꿈을 꾼 게 라넌 경이라고 이야기했었나?

“세상에, 유제니. 넌 알았니?”

유제니가 하몬 가의 티 파티에서 돌아오자마자 세이마리아가 다가오며 물었다. 그녀도 오늘 약속이 있어서 나갔다가 들어왔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계단 아래에서 딸이 오길 기다렸던 것이다.

무슨 일이지? 평소와 다른 어머니의 모습에 유제니는 멈칫했다. 이럴 때면 늘 자식들은 자신의 과거를 뒤돌아보게 된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더라?

“올리버에게 만나는 여자가 있다던데!”

아, 그거.

유제니의 얼굴이 안도로 풀어졌다. 내 잘못이 아니군.

하지만 금세 다시 그녀의 얼굴에도 걱정이 떠올랐다. 그녀의 잘못이 아닌 건 다행이지만 어떻게 보면 이 사건이 더 문제다.

“네. 저도 들었어요.”

“알았어?”

올리버가 유제니에게는 이미 말했단 말인가? 놀라는 세이마리아의 표정에 유제니는 재빨리 말했다.

“아니요. 저도 방금 티 파티에서 들었어요. 베라가 아니, 하몬 양이 물어보더라고요.”

“하몬 양도 알고 있다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세이마리아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오늘 모임에 참석했다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옆자리에 앉은 서베인 부인이 대뜸 “비스컨 남작이 결혼한다면서요?” 하고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세이마리에도 서베인 부인이 뭔가 착각한 모양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녀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비스컨 남작과 만난다는 여자의 집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맙소사! 올리버, 이, 이….”

마음 같아서야 망할 자식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세이마리아는 비스컨 백작 부인이다. 그녀는 스무 살 이후로 욕을 입 밖에 내뱉은 적이 없었다.

한참 후에야 숨을 고른 세이마리아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멍청한 놈! 만나는 여자가 있으면 얼른 집에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야 그녀도 준비를 하지.

하지만 중요한 건 올리버가 만나는 여자가 있다는 게 아니다. 유제니는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어머니를 응접실로 모시고 들어갔다. 그리고 집사에게 말했다.

“빅스, 어머니께 차를 가져다주실래요? 술도 넣어 주세요.”

술이라고? 빅스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지만, 그는 금세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그사이에 유제니는 어머니를 소파에 앉힌 뒤 옆에 앉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아두셔야 할 것 같아서요.”

“또 무슨 일 있니?”

딸의 심상치 않은 모습에 세이마리아의 심장이 다시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집사가 술을 넣은 차를 가져오기를 기다리는 딸을 보며 인상을 썼다.

안 좋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마 이 애가 아이를 가진 건 아니겠지? 세이마리아가 생각하는 가장 최악의 상황은 그거다.

유제니가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하는 것. 하지만 그렇다면 번즈 백작을 재촉해 결혼을 시키면 된다. 설마 번즈 백작이 결혼을 못 하겠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점점 두통이 몰려와서 세이마리아는 다시 자신의 머리를 짚었다.

“올리버가 만나는 여자 말인데요.”

설마 올리버가 만나는 여자가 아이를 가졌나? 자연스럽게 세이마리아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건 차라리 낫다. 얼른 결혼을 시키면 되니까.

남의 아들보다 그녀의 아들을 다그치는 게 더 쉽다. 게다가 올리버라면 지금쯤 자식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고.

“아가씨.”

금세 집사가 술을 넣은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유제니는 빅스에게 차를 받아 어머니에게 건네며 말했다.

“우선 드세요.”

“차를? 설마 여기에 술 넣었니?”

술을 넣은 차를 준다는 건 사안이 심상치 않다는 뜻이다. 세이마리아의 얼굴에 공포가 떠올랐다. 올리버가 만나는 여자가 임신한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 뭐지? 설마 그 여자가 유부녀인 건 아니겠지?

“드시면 이야기할게요.”

얼른 듣고 싶은 마음과 듣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던 세이마리아는 유제니의 재촉에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빅스가 어찌나 독한 술을 넣었던지 마시자마자 입 안에 술 냄새가 확 퍼졌다.

“말하렴.”

독한 술이 들어가자 세이마리아의 기분이 조금 느긋해졌다. 유제니는 어머니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올리버가 만난다는 여자가 한 명이 아닌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지? 세이마리아는 자신이 벌써 취한 건지 잠시 의심했다. 올리버가 만난다는 여자가 한 명이 아닌 것 같다고? 올리버가 여러 명과 만나고 있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곧바로 세이마리아의 입에서 부정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자신과 아들을 믿었다. 올리버가 여러 명의 여성과 만날 정도로 난봉꾼이 아니라는 걸 믿었고 아들이 그런다면 자신이 알아챌 거라는 걸 믿었다.

유제니 역시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올리버와 만난다는 여자가 여러 명이에요. 오늘 하몬 양에게 듣기 전에 줄리아에게도 들었거든요.”

설마.

유제니의 말에 세이마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유제니는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이 다른 사람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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