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0화 (175/239)

180화. 38 – 4

세리길의 그림 대부분이 그렇듯 그림의 주제는 요정 마고와 발시안이었다. 거대한 용을 향해 오른손을 뻗고 있는 마고와 그 뒤에 서서 검을 치켜세운 발시안.

이 그림에 대해서도 평론이 여러 가지가 있다. 마고가 요정이니 인간인 발시안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표현한 거라는 말도 있고, 세리길이 자신과 남편을 마고와 발시안으로 표현한 거라는 말도 있고.

베라는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재미있는 걸까? 그러면 좋겠다. 줄리아와 로렌은 별 관심이 없거든. 엘리엇은 이야기했더니 그 그림을 사 오는 바람에 기겁했다.

“이건 오테가의 결혼식인데 오테가라는 지역에서 결혼하는 풍경이래.”

나는 다음 그림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보면 알아요?”

“이것도 유명한 그림이거든.”

오테가의 결혼식 장면을 그린 거라 그렇다. 그쪽은 신랑과 신부의 손을 묶어 놓고 결혼식을 치르는 풍습이 있다. 나는 그림 한쪽에 그려진 남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신랑 신부일 거야.”

“지금까지 이게 마을 축제인 줄 알았어요.”

뭐, 결혼식이 마을 축제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결혼식을 의미하는 소품을 가르쳐 주었다. 꽃을 뿌리는 아이들, 신랑과 신부의 부모님, 예식을 거행하는 성직자까지.

“결혼하니까 생각났는데요.”

결혼식이 밤까지 이어진 모양이라고 그림의 위쪽에 그려진 달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나자 베라가 입을 열었다. 내가 쳐다보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이어서 물었다.

“비스컨 남작님, 결혼해요?”

그 질문을 여기서까지 들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잠시 베라를 쳐다봤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약간 속상한 표정이었다. 음, 이 표정이 뭘 의미하는지 안다.

아, 진짜. 올리버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나는 한숨을 내쉬고 베라에게 물었다.

“어디서 들었니?”

“어머니께요. 비스컨 남작님이 결혼한다고 하던데요. 아니죠?”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내 일이 아니라서 그렇게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특히나 요즘 같은 상황에선 말이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모르겠네. 올리버랑 그런 이야기를 안 해 봐서.”

“이야기 안 했어요? 그러니까, 비스컨 남작님이 결혼한다는 거요.”

“음, 누구한테 구혼한다는 말은 아직 못 들었는데.”

베라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녀는 주위를 돌아보더니 내게 속삭였다.

“듣기로는 남작님이 그 여자한테 반지를 줬대요.”

“뭘 줘?”

“반지요. 백작 부인의 반지를 줬다고 하던데요.”

집안마다 그런 게 있다. 반지나 목걸이, 머리 장식 같은 거. 대대로 장자에게 물려주거나 장자의 부인에게 물려준다. 비스컨 백작가에는 백작 부인에게 물려주는 반지가 있다.

언젠가 어머니가 올리버의 부인에게 주겠지. 그러니 그건 완전 헛소문이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헛소문이네. 올리버가 어머니의 반지를 다른 사람에게 줬다면 내가 모를 리 없어.”

“음, 유제니에게는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요?”

어머니와 올리버가 내게는 비밀로 하고 반지를 줬을 거라는 말에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물론 반지야 줄 수 있지. 그건 어머니의 것이니까.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그건 확실하게 하셨다. 어머니의 결혼반지는 비스컨 백작가에 내려온 반지고 대대로 비스컨 백작 부인이 가지는 것이라고.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신 거다.

그러니 그걸 굳이 내게 비밀로 하면서 줄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 반지를 누군가에게 줬다면 내게도 알려 주셨을 거야.”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어머니와 올리버라면 반지를 주기 전에 내게 그 여자를 소개해 줬을 거다. 우리는 적어도 한 번은 식사를 함께했을 거고.

“그 사람이 올리버의 부인이 되는 거잖아. 당연히 나도 알아야지.”

베라는 꽤 놀란 표정이었다. 당연한 일을 왜 놀라는지 모르겠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부모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비스컨 백작님과 백작 부인이?”

나는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올리버가 결혼을 한다면 두 가문이 합쳐지는 거다. 당연히 나도 올리버가 결혼한 여자의 집안과 원만한 관계로 지내야 한다.

하지만 베라는 아닌 모양이다. 그녀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 * *

“비스컨 남작.”

클레어의 집은 그리 크지 않았다. 올리버는 집사에게 안내받은 응접실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다가 클레어가 나타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정도 집이라면 올리버의 기준으로는 독신 남성이 친구 한두 명을 손님으로 두고 산다. 물론, 올리버의 기준이라고 했지 올리버가 그 정도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클레어는 그런 집에서 아버지와 동생 셋까지 함께 살고 있었다. 작위도 없고 마땅한 재산도 없는 귀족이 살 법한 집이다.

“무슨 일이지?”

딱딱한 클레어의 질문에 올리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여자는 왜 자길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걸까.

우습게도 지금 클레어는 올리버가 싫어서 딱딱하게 맞이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대부분의 손님에게 이렇게 대한다. 그저 환대에 익숙한 올리버에게는 딱딱하게 맞이하는 것처럼 느껴진 것뿐이다.

“날이 갑자기 서늘해졌어.”

남의 집에 방문하자마자 본론을 꺼내는 건 귀족 예법에 어긋난다. 이런 점이 묘하게 유제니를 닮아서 클레어의 얼굴이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표정을 관리하며 물었다.

“날씨 이야기하러 온 건가?”

에이, 씨. 올리버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진짜 한 번 물어봐야겠다. 그를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하지만 그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올리버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고 싶은 충동을 눌러 참으며 말했다.

“검은 늑대 기사단의 입단 제의를 거절했다며?”

내가? 언제? 올리버의 물음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클레어는 그가 예전 일을 묻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이제 물어봐?

“아, 아냐?”

클레어의 표정이 이상하자 올리버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고 하던데. 그는 며칠 전 클럽에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에스컬레 경이 라넌 경에게 검은 늑대로 이직을 제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라넌 경은 비스컨 남작 때문에 거절했다고.

“나 때문에 거절했다던데.”

이어진 올리버의 말에 클레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가 누구 때문에 거절해?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올리버가 다시 말했다.

“그, 나 때문에 기사단과 싸워서. 그래서 거절했다고 하던데. 아니야?”

올리버 때문에 기사단과 싸우는데 왜 검은 늑대 입단 제의를 거절했다는 건지 모르겠다. 클레어는 눈살을 찌푸린 채 올리버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거절한 건 맞아. 하지만 비스컨 남작, 당신 때문은 아냐.”

“어, 그래?”

놀라는 태도에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보면 비스컨 남작 때문이기는 하다. 하지만 동시에 비스컨 남작 덕분에 받은 제의였다.

“애초에 에스컬레 경이 검은 늑대로 오라고 제의를 한 건 내가 당신을 구했기 때문이었거든.”

올리버의 얼굴에 뿌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얼굴을 본 클레어는 얄미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말했다.

“거절한 것도 어떻게 보면 당신 때문이지.”

순식간에 올리버의 표정이 굳었다. 그걸 보자 클레어는 조금 재미있어졌다. 발시안이 평화롭기 때문일까. 올리버의 단순함이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귀엽다니.

클레어는 자신의 생각에 흠칫 놀라 인상을 썼다. 내가? 비스컨 남작을?

그럴 리 없다. 그녀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당신 때문에 얻은 기회는 필요 없어.”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졌다. 올리버는 방금 전까지 부드러웠던 분위기가 갑자기 날이 선 것을 느꼈다. 하지만 왜 그렇게 바뀌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인상을 쓰며 클레어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날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야?”

물론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할 수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올리버는 미움받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잘생긴 외모와 비스컨 백작가라는 배경 덕에 어딜 가나 환영받는 편이다. 남녀노소 그에게 호감을 품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비스컨 남작. 모든 사람이 당신을 좋아해야 하는 법이라도 있나 보지?”

올리버의 질문에 클레어는 저도 모르게 빈정거렸다. 그리고 금세 후회했다.

그렇게까지 빈정거릴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올리버의 방문 요청을 듣고 이번에는 좀 부드럽게 대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아니, 그런 법은 없지.”

놀랍게도 이번에는 올리버가 화를 내지 않았다. 이럴 때면 늘 누가 그렇게 말했냐고 화를 내며 떠났을 텐데.

그는 정말로 클레어가 왜 자신을 싫어하는지 궁금했다. 올리버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가슴 앞으로 팔짱을 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했다.

“우리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는 건 알아.”

똑똑히 기억한다. 유제니가 물에 빠졌고 올리버는 곁에 있던 엘리엇을 탓했다. 클레어는 그런 그를 비난했고.

클레어는 올리버를 비난할 만했다. 유제니의 말대로 유제니는 아직 번즈 백작과 결혼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라버니인 그의 책임이다. 그러니 클레어가 보기에 올리버는 자기 책임을 방기한 거겠지.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하지만 네 생각과 달리 나와 유제니는 사이가 좋아. 나는 유제니를 책임지려고 노력하고 있고.”

진짜로 그랬다. 가끔 번즈 백작을 만나면 대체 언제 유제니에게 구혼할 거냐고 재촉한다. 가끔 그러는 이유는 너무 자주 그러면 번즈 백작이 도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유제니를 책임지려고 노력한다는 말이 클레어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욱했다가 가까스로 멈췄다.

지금의 비스컨 남작은 그녀가 꿈에서 만난 비스컨 백작과 다르다. 그녀의 인생이 다르고 유제니의 인생이 다르듯이.

클레어는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평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스컨 남작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로 그녀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

그런데도 그녀가 마음을 당장 고쳐먹는 건 어렵다. 클레어에게는 아직도 꿈의 몇몇 장면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했으니까.

“당신을 싫어하는 건 그런 이유가 아니야.”

클레어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올리버는 면전에 대고 싫어한다는 말을 들은 충격에 약간 상처받았다.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진 클레어의 말에 상처 따윈 잊어버렸다.

“내가 당신을 싫어하는 이유는, 내 꿈에서 당신이 레이디 비스컨을 죽였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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